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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사들의 성탄절 (눅 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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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성탄절 (눅 2:10-14) 
 
 
12월 25일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삼은 것은, 366년경 정의의 태양신 ‘미트라’를 숭배했던 로마 이교도들의 축제를 대항하면서부터였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습니다. 로마의 이교도 축제들은 육신적이고 쾌락적이었습니다. 온 국가가 시끌벅적한 축제를 벌일 때,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기도 한 성도들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웠겠지요. 따라서 세속 분위기에 맞선 대항문화의 하나로 성탄절을 시작했다면 비록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바로 그 날은 아니라 할지라도 지킬 만한 의의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성탄절을 세속 문화에 대항하기 위한 기독교 문화의 차원으로만 생각한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성탄을 문화 행사의 일환으로 보내다보면 몇 해 지나지 않아 지루해지기 십상입니다. 해마다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니까요. 처음엔 참신했던 프로그램도 10년 이상 비슷하게 우려먹고 나면 식상해지지요. 타성에 젖어버린 성탄절은 반갑기는커녕 스트레스가 됩니다. 소재가 제한되어 있는 상태에서 해마다 창의적으로 재미있는 성탄 문화 행사를 구상해내는 것은 한계가 있는 반면, 관중들의 문화 수준은 높아지고 있으니까요. 이쯤 되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도 아닌데 꼭 분주한 행사를 치러야 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성탄절이 연말마다 찾아오는 빚쟁이처럼 애물단지가 되어버리고, 기쁜 성탄절이 아니라 피곤한 성탄절이 되지요.

대항문화 관점만으로 성탄절을 보면 성탄절은 참 이상합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들은 성탄절에 넘치는 기쁨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형 매장들과 술집과 숙박업소들은 멋진 현수막과 반짝이는 네온사인들로 거리를 장식하여 화려한 크리스마스를 보냅니다. 반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빈약한 교회 안의 소규모 축제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마저도 준비하기 어려운 개척 교회는 소박한 문화의 쓸쓸함 속에서 성탄을 보내겠지요. 그들은 만끽하지 못한 즐거움의 부스러기라도 채우기 위해 이리저리 동냥하듯 대형 교회 축제의 주변을 기웃거려야 할까요? 문화 중심으로 성탄절을 생각하면 세속을 부러워하기 딱 좋습니다.

크리스마스 축제는 대항문화의 관점보다는 이교도들의 축제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잊지 않고자 했던’ 신앙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기억하지 않는 이교도의 축제일조차도 예수님을 기억하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육신적이고 쾌락적인 분위기에 휩쓸리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억하며 그분의 탄생을 기념하기 원했지요. 적어도 성탄절을 처음 시작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처럼 ‘대항문화’보다는 ‘예수님’을 생각하려는 마음이 더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성탄절은 무엇보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특별히 많이 생각하고 기념하는 날이 되어야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해마다 여러 관점에서 성탄절을 생각해왔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의 입장에서, 요셉의 입장에서, 마리아의 입장에서, 아들을 세상에 보낸 아버지의 입장에서. 올해는 천사들의 입장에서 성탄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에 가장 활동적이었던 존재는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들판의 목자들에게 나타나 성탄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메시지의 서론은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좋은 소식들은 모두가 상대적입니다. 합격 발표가 어떤 이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슬픈 소식이 됩니다. 결혼 발표가 당사자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동시에 외로운 솔로의 염장을 지르는 소식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상대적으로 슬픈 사람이 없는 절대적인 기쁨의 소식, 곧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소식이기에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기쁨이 될까요. 그 소식의 내용이 천사가 전한 메시지의 본론에 나타납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 천사는 단순히 구원자의 탄생을 선언하지 않고 “다윗의 동네”라는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이로서 메시아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렸습니다(미 5:2). 예수님은 단순히 구원자가 아니라 성경에 약속되었던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아담에게 약속되었던 “여자의 후손”이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던 “씨”이시며, 다윗에게 약속되었던 “자식”으로서의 구원자셨지요(창 3:15; 22:18; 삼하 7:12-13).

대표자 아담이 사단의 시험에 넘어짐으로 인해 온 인류는 죄에 빠졌습니다. 아담 이후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 즉 영원한 죽음이 선고된 존재였습니다. 아담에게 부여되었던 원의를 상실하고 죄를 짓고자 하는 부패한 성향을 가진 채 태어나게 되었지요. 이를 원죄라 하는데, 원죄는 여러 모양의 자범죄들을 낳았습니다. 인간에게 고통과 슬픔을 안겨주는 모든 악들은 이러한 죄로 말미암았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하나님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해보려는 희망을 가졌지만, 세상은 점점 생지옥처럼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옥에서가 아니라 극악무도해지는 사람들의 잔인성 속에서 이미 악마를 봅니다.

밤길 가기가 두렵다는 말은 옛 말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대낮의 학교 운동장조차 안심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으니까요. 무엇이 사람을 이토록 파괴했습니까? 무엇이 사람을 이처럼 잔인하고 파렴치하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사람을 이처럼 음란하고 폭력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렸습니까? 한 마디로 ‘죄’입니다. 비참한 사실은 사람 스스로는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동양의 교육도 서양의 교육도 사람을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지는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육의 현장마저 온갖 죄로 더럽혀지고 있음을 똑똑히 보고 있습니다. 예술 분야 역시 사람의 정서를 고상하게 만들어놓기 보다는 나날이 외설적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이 예전보다 더 심각해진 것은 아닙니다. 죄를 감추기보다 노출하는 시대이고 대중매체가 더 빠르게 소식을 전파하기 때문에 더 심각해 보이는 것뿐입니다. 로마 시대에도, 소돔 고모 시대에도, 노아 시대에도 사람들은 변함없이 폭력적이고 음란했습니다. 그 속에서 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생지옥 같은 세상을 구원하실 분을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이제 아담이 범죄 한 후부터 줄기차게 약속되었던 구원자께서 드디어 오셨다고 선포합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셔서 그분의 거룩하심같이 거룩하게 하실 분이 오셨음을 선언했지요. 참으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구원을 얻은 성도도 그의 행위 자체를 두고 평가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의 마음에도 구원 받지 못할 자와 마찬가지로 폭력적인 잔인성과 절제하기 힘든 음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사랑하는 마음, 죄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고서도 불의로 억누르는 모습, 비고의적인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고의로도 죄를 찾는 모습, 극단적인 보복을 생각을 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능력이 지금도 우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 1:5).

적어도 성도는 세속보다 더 멋진 문화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사람이지요. 성도는 성탄의 기쁨을 프로그램을 통해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그분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그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기쁨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비록 조촐하고 소박한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세상이 느끼지 못하는 잔잔한 기쁨과 세상이 누릴 수 없는 만족스러운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참 기쁨이 무엇인지, 참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오히려 흥청망청하는 세속의 즐거움을 불쌍히 여기게 되겠지요.

복음 메시지 다음에는 허다한 천군이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이 이어졌습니다(13).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 사람들은 이 구절의 뒷부분에 관심을 많이 둡니다.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에 관심을 두다보니 쉽게 행사 중심이 됩니다. 그러한 관심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천사의 찬송 내용에 있었지요. 하지만 천사는 그보다 먼저 성탄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찬송합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성탄에 어떻게 영광을 받으셨는지를 생각해보면서 참으로 인생과는 구별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거창한 일을 벌입니다. 위대한 사람일수록 이전보다 더 크고 더 웅장하고 더 화려한 모양새를 취해서 영광을 드러내려 하지요. 그래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들이 불가사의하다고 말하는 위대한 건축물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분이라면 지극히 거창한 일을 통해 영광을 드러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소박한 것으로써, 즉 허름한 마구간의 말구유에 누인 아기를 통해 충분히 당신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땅에 거창한 건물을 세우거나, 어떤 거창한 행사를 벌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관점이 아니라 세상의 관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당신님께서 어떻게 영광 받으시는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소박하게 탄생하신 예수님께서는 일생을 좁은 지역에서 몇몇의 제자들을 데리고 소박하게 행하시면서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천사들처럼 복음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탄이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화려함에 휩쓸리지 않고 우리 주님을 생각하는 소박한 성탄이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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