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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성탄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마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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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마 2:1-12)


며칠 전에 총회 발간지인 개혁 신문 편집위원회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그 날 참석한 목사님 자녀 한 분이 연평도에 해병대에 입대해 어려움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목사님은 일본에 계셨는데 일본 방송은 마치 한국에서 전쟁이 터진 것처럼 온 방송이 앞 다투어 보도를 했답니다. 그렇잖아도 아들을 군에 보내고 그 지역에 근무하는 아들이 안부가 얼마나 걱정이 되었겠습니까? 후에 아들과 통화를 하고 안보 불감증인 이 나라에 하나님이 경고하는 메시지란 사실을 다시 한번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 중에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실력이 있는지 여부는 시험을 쳐봐야 알고, 그 사람이 훌륭한 남편인지는 집에서 가족들에게 하는 태도를 봐야만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는 어떤 결과를 기대하더라도 예측만으로는 알 수 없고 막상 “뚜껑”이 열려야만 실제로 어떤 내용인지, 실력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번 연평도 사건이 벌어진 후에 많은 국민들의 가슴이 충격으로 떨리게 된 것은 갑작스런 포격으로 인한 놀람과 인명피해 때문만이 아닙니다. 

한국 군대의 대응준비, 큰소리치던 최신식 무기들의 실상과 성능 등이 한꺼번에 뚜껑이 열리듯 만천하에 들어나면서 충격이 훨씬 더 크지 않았습니까? 해안포대가 즐비하게 늘어선 북한 군대의 바로 코앞에 있는 최전방 연평도에 고작 자주포 6문이 있었고 그것도 반은 못쓰는 것들이었답니다. 평소 공개적으로 장담하던 최신 전자무기, 즉 적이 포를 쏘면 즉시 그 궤도를 전자시스템으로 역추적하여 상대방 포대를 타격할 수 있다더니 막상 상황이 벌어지니까 그 역추적 레이더는 작동을 안하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연평도라는 전쟁상황을 통해 결국 뚜껑이 열렸고 국민들의 기대는 충격으로 뒤바뀌고 신문, 방송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경제부흥으로 최신식 무기개발과 구입을 위해 수십조원이라는 엄청난 나라 돈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뚜껑이 열리면서 어쩌면 그런 주장들이 허구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충격에 나라 전체가 휩싸인 것입니다. 뚜껑을 열어봐야 압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루 빨리 정리하고 개혁해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부정과 부패로 나라 돈을 빼먹고 뇌물로 정치를 하고 진급을 하는 체제는 뚜껑이 열렸을 때 온 민족과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의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마찬가지 문제입니다. 좋은 교회, 훌륭한 성도들의 교회로 소문이 났다가도 막상 내적, 외적 문제가 터질 때 아무 힘을 못쓰게 된다면 그야말로 뚜껑을 열어서 그 실상을 들어낸 것 밖에 다른 변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성탄절의 뜻 깊은 날을 준비하지만, 지난 날 메시야가 이 땅에 오기를 그토록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오래 전부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까 나라를 통치하는 왕도, 그 시대의 영적인 지도자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 어느 누구도 메시야의 탄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여기 성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첫 번째 반응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헤롯왕과 그 측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온 세상의 구세주가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났다는 소식을 동방박사로부터 들었을 때 굉장히 당황한 것 같습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헤롯궁을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메시야가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이 물음은 한 순간에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을 소동케 했습니다. 

헤롯왕은 자기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결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가 지금 유대인의 왕인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난다는 것은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그는 에돔 사람으로서 로마의 권력에 편승하여 유대인의 왕이 된 사람이 아닙니까? 헤룻은 자기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도 짓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세금도 감면해 주었고, 자기의 금 접시를 녹여서 백성들의 식량을 사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유대인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을 없애기 위해 300명의 법정 위원들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를 반대하는 장모나 아들들에게도 쉽게 칼을 휘둘러 서슴없이 죽이는 잔인한 왕이었습니다. 

또 그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10명의 아내를 거느리면서,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근친상간도 서슴없이 하던 악한 왕이었습니다. 여기 2절에 "소동했다"는 말은 ‘불안하게 하다’는 의미로 당시 그 누구보다 헤룻에게는 민감한 문제입니다. 그는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빨리 이 소문의 진상을 파악해서 예루살렘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소문으로 해롯 왕은 심기가 극도로 불편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헤롯왕은 갑자기 박사들을 조용히 불러 말합니다. 7,8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왕도 아기 예수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예언되어 온 아기 예수 탄생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또 헤롯왕은 그분이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아기 예수께 경배한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메시야이신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헤롯왕은 겉으로는 '나도 아기 예수께 가서 그에게 경배하리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습니다. 

그는 겉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환영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자기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또 하나는 신앙의 열정을 잃어버린 불행한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대 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당시의 대표적인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전문적인 성경학자들입니다. 

헤롯은 대 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서기관들에게 묻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대 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은 성경을 통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사천리로 대답합니다. 4절과 5절에 보면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자! 얼마나 해박한 성경의 지식을 가졌습니까? 그러나 이들 역시 뚜껑을 여니까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들입니까? 

당시 대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일년에 세 번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때마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사드릴 때 쓰는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 등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팔았습니다. 물론 시중보다 몇 배 비싼 가격으로 팔았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로마 화폐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화폐에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만 사용하는 거룩한 동전으로 바꾸어야만 성전 안에서 파는 제물을 살 수 있었습니다. 

돈을 바꾸어 줄 때 엄청난 폭리를 취하며 바꾸어 주었습니다. 물론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서 판 재물이 아니면 제사 드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성전 안에는 이렇게 제사용 가축을 파는 가게가 많았습니다. 이 가게의 주인이 대 제사장들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훗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장사꾼들의 상을 둘러엎으신 것은 바로 이 제사장들의 짓거리들을 향한 주님의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또 서기관들은 누구였습니까? 율법의 해석자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말하면 판사, 변호사처럼 백성들에게 법관 대우를 받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특권을 누리던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오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야가 오면 제사장도 필요 없고 서기관도 필요 없게 됩니다.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잃게 되는데 좋아할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저들은 아기 예수, 만왕의 왕이 오셨다고 했을 때, 예수를 찾아가기는 커녕 의도적으로 무관심했고 바로 이 사람들이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는 자리에 서지 않습니까? .

성경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들이 아기 예수를 외면하고 반대하고 끝내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 지식과 신앙은 다른 것입니다. 이들 종교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허수아비처럼 무관심했던 저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신앙생활에서 가장 무서운 것 가운데 하나가 무관심입니다. 습관적으로 예배하고 찬송하고, 습관적으로 헌금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뭐, 회개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왔으니까요. 뭐, 반성도 없습니다. 자기 딴에는 열심히 일했다는 자만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믿음의 척도인 줄을 압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흥분이 될리가 없습니다. 그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으셨다는 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한 번도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려 본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예수 믿은 오랜 경륜만 자랑합니다. 예배를 종교적 악세사리, 주일 행사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교회 생활의 전문가라고 착각합니다. 바로 그 제사장이 그 서기관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참 놀라운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이들은 예수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사막을 횡단하여 진리를 찾아오는 동방 박사들입니다. 저들은 별을 따라 와야 했기에 낮에는 방향을 알 수 없었고 밤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하루 이틀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동쪽으로 무려 2,500Km나 떨어진 페르시아에서부터 왔습니다. 지난 번 우리 청년들이 압록강 하류에서부터 두만강 하류까지 2000km 가 넘는 길을 일주일 내내 차를타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생업을 포기하고 목숨을 걸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오는 동안 사나운 맹수를 만나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고, 강도떼를 만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여비와 물건들을 다 빼앗길 수도 있는데, 그들은 목숨걸고 별 따라 왔습니다. 왜 그들이 목숨을 걸고 페르시아에서부터 베들레헴까지 왔습니까? 무슨 이유로 그들이 자신들을 헌신했습니까?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메시야이신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고 그 분께 경배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저들의 행동은 안일주의 신앙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신선한 도전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얼마나 편리해 졌습니까? 또 이 편리 때문에 놓친 영적인 보화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십자가 고난의 신앙을 잃었습니다. 예수님 만나기 위해 당연히 치루어야 할 그 값을 치루려 하지 않습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원수는 값싼 은혜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배란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만나는 결단이요, 헌신입니다. 동방박사들에겐 이 결단이 있었습니다.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2절과 11절에 나타난 대로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래 전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생전에 만 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재림하셨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내 생전에 내가 쓴 왕관을 그 발 앞에 벗어 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예배란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복을 감사하며 기뻐하고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경배하기 위해서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가장 귀한 것들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황금은 보석 중에 가장 귀한 것입니다. 유향과 몰약은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얻을 수 있는 향유 가운데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다는 것, 그것은 그들이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여행을 하는 도중에 여비가 부족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예물을 팔기만 하면 얼마든지 넉넉하게 여행을 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소중한 예물을 절대로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가장 존귀한 것을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드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 그들은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 그들은 목숨걸고 베들레헴까지 와서 주님을 경배하고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리고 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꿈을 통해 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헤롯왕을 만났을 때, 헤롯왕은 "베들레헴에 가서 자세한 사항을 알아보고 메시야를 찾거든 돌아올 때에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라"고 했는데, 꿈에 "헤롯왕에게로 돌아가지 말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주어졌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그 말씀대로 다른 길로 해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경배와 참된 예배의 모습입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습니다. 만약 그들이 경배는 멋있게 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롯왕을 만났다면 그들의 경배는 불완전한 경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셨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까 당시 통치자나 영적 지도자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까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성탄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영접한 사람의 숫자는 그 당시 불과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소수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행한 성탄의 자세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기뻐하고 영접했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천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시당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 짓밟힌 자, 실패한 자, 병든 자, 죄인으로 몰린 자,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가 오심을 기뻐했습니다. 

보세요. 세상이 버린 곳,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 마구간에 아기로 오신 예수, 바로 그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입니다. 하나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만도 대단한 희생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신 자리가 마구간입니다. 그곳은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거기다 태어나자마자 애굽으로 피난 생활을 하십니다. 사람들을 위해 오셨는데 그 사람들에게 쫓겨 피신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실 때 마땅히 거처할 집한 칸 없어서 밤에는 감람산에서 주무실 때가 많고, 또는 가난한 3남매가 사는 나사로의 집에 머무를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도 마땅히 묻히실 무덤하나 없어서 아리마대 요셉 무덤을 빌려서 묻히셨습니다. 세상 사람들 예수님을 볼 때 30세 되신 분을 50세로 보기가 예사입니다. 이처럼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쏟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그 고초, 그 희생을 당하셨습니까? 바로 나를, 여러분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 섬기러 오신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달았다면 나의 모든 것을 다 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여기 모인 우리 모두, 누구하나 예외 없이 어느 해인가 인생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그리스도에 관한 멧세지를 들으면서도 진정으로 그 분을 만나지 못한 채 주님 앞에서야 한다면, 그리고 주님을 영접했으면서도 참으로 그 분을 경배하는 살지 못하고 부끄러움과 후회 속에서 그 분을 만나야한다면, 그때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다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성 교회는 이맘 때면 성탄에 사랑의 쌀 나눔을 통해 우리 주변에 사랑을 주었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 예배때는 광진구에 쌀. 나눔 운동을 하기 위해 조그마한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25일 성탄절에는 예배를 마치고 동대문 쪽방에 가서 노숙자들과 함께 식사도하고 그들에게 겨울을 날수 있도록 쌀을 나누는 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어려운 것 사실이지만, 이 성탄의 계절에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그 작은 일 마져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이번에도 우리 주변에 구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신 주님의 그 사랑을 우리 함께 실천하여 우리의 섬김과 사랑이 이번 성탄절에도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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