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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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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2)
 

지난 10월에 발간한 ’2010 세계 인구 현황 보고서’에 의하면, 세계 인구가 69억 870만명입니다. 이 통계에 잡히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니 아마 세계 인구는 그 이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70억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저마다 독립된 인격체로서 살아갑니다. 주님께서는 “3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고 하셨는데, 이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70억의 1에 불과한 존재로 보시지 않고 온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여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각 사람이 자기 목숨이 그렇게 귀하다는 것을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왜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한 것입니까? 왜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 자기의 인격을 더럽히는 짓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일까요? 왜 사람들이 육신의 쾌락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일까요? 자기 생명의 존귀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한 존재로 보아주시는데 정작 인간들은 자신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허탄한 것들을 얻기 위해 생명을 낭비하고 인격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한 세상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무슨 영혼이 있고 천국이나 지옥이 있단 말이냐?”라고 합니다. “이 세상과 만물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지, 창조주 하나님이 어디 있단 말이냐?” 그럽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세상 살다가 가면 그만인 것이 인생이라면, 사람이 짐승이나 곤충보다 나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저절로 생겨난 존재라면 도덕이니 윤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저 자기가 좋은 대로 살다 가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만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존엄성이 결정됩니다. 

시편 49편 20절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하신 말씀이 이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존귀한 존재로 지으셨지만 타락한 인간은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 욕망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볼 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위대한 사실은 달리 없는 것입니다.

이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 힘쓰고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이르기를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장거리 육상 경주에 나선 선수들에 비유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경주에 나선 사람들입니다. 이 영적 경주는 마라톤과 같이 장거리 경주입니다. 곧 일 평생에 걸쳐서 신앙의 경주를 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관람석에는 허다한 사람들이 앉아서 우리의 경주를 관전하며 격려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관중이 아닙니다. 본문에 보니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곧 그들은 이미 경주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천국에 간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신앙의 경주에 나선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봉독한 히브리서 12장 1-2절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성도들은 주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고서 경주에 임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 바로 앞에 있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하는데, 구약시대에 살았던 신앙의 선조들이 보여준 위대한 믿음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거기 보면,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생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와 다윗과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 그리고 무명의 성도들이 나옵니다. 이 분들이 숱한 시련과 핍박을 무릅쓰고서 끝가지 믿음을 지킨 것은 하나님께서 주실 위대한 상급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의 믿음은 헛되지 아니하여 죽은 자와 방불한 그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자손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 보면 모세에 대하여 이같이 증언합니다. “24)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양아들로서 대제국 이집트의 왕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고대 이집트 역사를 보면, 여자로서 바로가 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모세의 양어머니인 공주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그 공주에 이어서 바로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지상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보다 하나님께서 주실 영원한 상급을 더 귀하게 여기고 그것을 바라보고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고난 받는 편을 택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히브리서 11장에서 신앙의 선조들이 상주심을 바라고 오로지 믿음으로 산 것을 언급한 저자는 12장 1절에서 “이러므로”라는 말로 신약의 성도들과 앞에서 언급한 위대한 구약의 성도들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이러므로”가 무슨 뜻입니까? 구약의 위대한 믿음의 선조들이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고 온갖 고난을 다 감내하고 믿음을 지킨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고서 저들처럼 불퇴전의 용기를 갖고 믿음을 지켜나가라는 것입니다. 

경주에 나선 선수들은 저마다 메달을 바라보고서 최선을 다합니다. 만약에 메달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그 선수는 결코 최선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영적 경주에 나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영적 경주는 더 영광스러운 상급이 보장되어 있으므로 한층 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9장에 이르기를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신앙생활은 소일삼아 심심풀이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상급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간혹 보면, ‘나는 상급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라고 말하는 신자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영적 무지를 드러낸 것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고 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로 매도 맞고 옥에도 갇히고 욕도 먹고 굶기도 하고 헐벗기도 하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감내한 것은 주님 앞에서 받을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이르기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류의 구주가 되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같은 예수님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도록 높여 주셨습니다. 주님과 사도들과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같이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고 자기들의 사명을 완수했다면, 우리도 그 분들과 같은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일을 할 때 그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고 반드시 영광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을 믿고 분발하여 최선을 다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영적 경주에 나선 성도들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평소에 우리는 격식에 갖추어 옷을 입습니다. 정장을 하지 않을 경우에도 속옷과 겉옷을 갖추어 입습니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두꺼운 외투도 껴입습니다. 주머니 속에는 지갑도 넣고, 손수건도 넣고, 핸드폰이나 볼펜도 넣고 다닙니다. 게다가 손에는 책이나 간단한 화장품을 넣은 가방이나 핸드백을 듭니다. 남자는 구두를 신고, 여자는 뒷굽이 높고 뾰족한 구두를 신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입은 옷가지와 소지품의 무게를 달면 적어도 족히 몇 kg은 나갈 것입니다. 학생들의 경우에는 책가방의 무게만 해도 10kg 이상 나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기에 나선 선수들은 어떻습니까? 할 수 있는 한 간단한 복장을 하고, 신발도 할 수 있는 한 가벼운 것을 신습니다. 평소에 하던 액세서리도 다 제거합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몸을 움직이는데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어야 기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육상이든 수영이든 레슬링이든 경기의 종류에 상관없이 똑같습니다. 

영적 경주에 나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적 경주를 방해하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시간과 마음을 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을 말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네 종류의 밭이 나옵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가 자라는 밭과 좋은 땅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땅을 제외하고는 다 씨앗을 뿌렸으나 결실을 맺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기 때문이고, 돌밭에 떨어진 씨앗은 흑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기 때문에 결실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만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새들은 마귀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로서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됩니다. 

이 비유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나온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신실한 성도가 되기 전에 믿음의 길에서 이탈해서 떨어져 나가는데,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비유에 언급된 그대로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교만과 자만심이 말씀이 그 마음에 뿌리 내리지 못하게 방해하고, 염려 근심, 돈에 대한 욕심이 방해를 해서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하게 하므로 결국 믿음의 길에서 떨어져 나가고 맙니다. 

또는 교회에 속해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세상 염려, 근심에 사로잡히고,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내지 못하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지 않으면 제대로 믿음을 지켜나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세상 즐거움을 찾아 누리느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성도들은 믿음의 형제들과의 교제를 좋아해야 하는데 세상 친구들이 좋아서 자주 만나다 보니 신앙생활을 등한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경우에는, 세상 친구들이 영적 경주를 방해하는 무거운 짐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 경주를 방해하는 무거운 것 가운데는 이단과 사이비한 가르침도 포함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이단과 사이비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이 노리는 대상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고 기성 교회의 신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단, 사이비들이 접근해 올 때 냉정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호기심으로 그들과 접촉하기 시작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한 교훈에 감염되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약물을 복용하고 경기에 임한 선수와 비슷해서 결국 경기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설령 메달을 땄다고 해도 약물 복용이 발각나면 취소되고 맙니다. 결국, 이단, 사이비 교훈에 감염되면 정통적인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무거운 것을 벗어 버려야 할 뿐 아니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성격은 사람을 쉽게 얽어매는 것입니다. 한번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한번 향락에 발을 내디디면 그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그 파멸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한번 도박에 손을 대면 한번으로 그치지 않고 결국 도박으로 패가망신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죄는 어떤 종류의 죄든지 쉽게 우리를 얽어맵니다. 그러므로 영적 경주에 나선 성도들은 단호하게 얽어매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함으로써 죄를 청산하고 죄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할 때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직 믿음의 경주에 전념을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영적 경주에 나선 성도들은 인내로써 경주에 임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했습니다. 훌륭한 선수가 되려면 인내를 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번에 광저우 아세안 경기에서 한국 여자 양궁팀이 세계 최강답게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이 말하기를 "감독님이 죽도록 훈련을 시켰다"고 했다고 합니다. 기술훈련 뿐만이 아니라 야구 경기가 열리고 있는 야구장에서 소음 적응 훈련을 받았고, DMZ에 가서 군사훈련도 받고 보초도 서는 등 담력 훈련도 받았다고 합니다. 금메달을 딴 기보배 선수는 “뱀을 목에 두르고 담력훈련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아세안 경기에서 메달을 따기 위해서 선수들은 피땀을 흘리는 훈련을 받고 온갖 여건에 적응하도록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가 없으면 감독이 가하는 훈련을 따라갈 수가 없어 대표 선수에서 탈락하고 맙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인내는 영적 경주에 나선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인이 되려면 인내로써 시험과 핍박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시시 때때로 시험이 다가옵니다. 사람으로 인한 시험도 있고, 물질로 인한 시험도 있고, 직분과 관련해서 오는 시험도 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종류의 시험이 다가옵니다. 

그러한 때에 성도 여러분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에 보니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고 하였고, 야고보서 1장에 이르기를 “2)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0장 36절에 보니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였고, 그 3절에서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도무지 참지 못할 일을 만났을 때라도 십자가를 참으시고 죄인들의 무서운 만행을 참고 견디신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이겨내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네 번째로, 영적 경주에 나선 성도들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일컬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예수님이 우리 믿음의 창시자시며 또한 믿음의 완성자시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의 믿음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시고 출발점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믿음을 완성시켜 주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시고 목표점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영적 생명을 보장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믿음의 창시자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라보라는 것은 우리의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뜻입니다. 다른 데 한 눈 팔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신앙의 경주를 할 때 정도(正道)를 이탈하지 않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신 대로, 우리에게 생명의 길이 되십니다. 육상 경주에 출전한 선수는 트랙을 따라서 달려 갈 방향을 바라고 달려야지 역주행하거나 경기장을 가로 질러서 달리면 실격패하고 맙니다. 잠언 14장 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우리가 가야 할 생명의 길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이 바라보아야 할 푯대가 되십니다. 선수는 골인지점이 어디인지 알고 그것을 바라보고 달려야지 우승할 수 있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면 제대로 달음질할 수가 없습니다. 선수는 오직 목표만을 바라보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야 합니다. 성도들이 바라보아야 할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의 삶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에 이르기를 “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목표로 삼을 때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달려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영적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여 주님 앞에서 영광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기 원하시거든,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내로써 시험과 환난을 이기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를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으나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면서 영원한 상급을 받는 그 날까지 영적 승리를 누리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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