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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말 없는 순종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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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순종 (마 1:18~25)


언젠가부터 성탄절의 주인공이 산타클로스가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크리스마스’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인가?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산타클로스입니다. 이제 크리스마스하면 예수님보다 산타클로스가 먼저 떠오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미 산타클로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어린 아이들에게 마음 좋은 할아버지로 깊이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산타할아버지의 이미지는 코카콜라 회사가 산타클로스를 빨간 옷을 입고 흰 수염을 기른 서양인으로 묘사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느덧 성탄절은 예수님이 주인공인 날이 아니라 단지 선물을 받은 날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상업화된 산타클로스를 우리의 문화적 환경에서 서서히 내쫓아야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달력의 12월 25일에 동그라미를 그려놓습니다. 성탄절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날이 되면 아빠, 엄마가 선물을 사주겠다고 약속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기독교의 문화적 위기라고 할 수 있고 사상적 위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성탄절이란 낮은 자, 연약한 자, 억눌린 자, 바로 우리 죄인들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산타클로스의 문화로 바뀌고 있습니다. 받는 것만 좋아하는 절기로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예수를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겸손의 절기가 아니라 오히려 사치와 방종과 타락을 부추기고 있는 문화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산타클로스 대신에 예수님을 멀리서부터 찾아와 경배한 동방박사를 성탄절의 문화 아이콘으로 바꿔야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셉은 말없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에 감추어진 인물이 또 하나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로써 예수님께서 출생했을 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가장 누추한 마구간에서 예수님이 출생할 때에 옆에서 지켜보고 돌보던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들이 찾아왔을 때, 그리고 멀리서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하며 예물을 드릴 때 옆에서 지켜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살기등등했던 헤롯왕의 위엄 앞에서도 예수님을 이끌고 애굽까지 피난살이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예수님과 함께 놀아주며, 소년 예수님에게 목수로서 해야 할 일을 가르치면서 거의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예수님과 함께 보냈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12살이 되었을 때는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드려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성전에 올라간 적도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었어도 성경은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 요셉에 대해서 많은 기록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말은 한 마디도 기록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은 감추어진 사람입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만 예수님의 아버지로서 요셉은 마치 벙어리처럼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말없는 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메시아 사건을 가능하게 한 순종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 견고히 땅을 디디고 있는 믿음의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한 여인이 필요했고 한 남자가 필요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여러분, 마리아 없는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요셉 없는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의 궁극적인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위해서 이 땅에 마리아가 필요했고 요셉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이 영광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고통을 받았고 아파했습니다. 심적으로도 엄청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그 아픔을 이겨낼 만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처녀가 잉태해야한다는 그 부끄러움과 그 수치를 이겨냈는데 그것이 믿음이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약혼녀가 자신이 아닌 남의 아이를 가졌다는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 그것을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요셉은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이 요셉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한 남자로서,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그가 받았을 충격이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태복음 1:18)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만 했을 뿐 아직 동거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결혼생활을 하기도 전에 약혼자가 임신했다는 충격적인 보고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한 사람의 인물됨을 확인하려면 그 사람이 탄탄대로를 지나갈 때가 아니라 어려움을 당할 때, 그의 모든 삶의 터전이 뒤흔들릴 때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인품과 됨됨이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조용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깊이를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커다란 위기 속에서 만난 어려움을 잘 이겨냄으로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일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요셉을 나타내는 특징이 있습니다. 요셉이 어떤 성품을 갖고 있었는가? 그는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태복음 1:20) 

여기 보면 “이 일을 생각할 때”라고 말합니다. 원문에는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아마 여러 생각들이 그의 머리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아니, 내 아내가 될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갖다니!’ 그는 마음속으로 통분했을 것입니다. 남자로서 열불이 솟구쳐 올랐을 것입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없는 고뇌와 분노가 그를 사로잡았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는 배신의 쓰라림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그토록 꿈꾸었던 신혼의 꿈이 산산 조각난 것을 어쩔 수없이 바라보고 있어야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요셉이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우리가 요셉의 처지였다면 이런 처지에서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성경은 아주 담백하게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화를 냈다거나 욕을 했다고 기록하지 않고 단지 한 가지 말로 요셉의 상태를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이 일들을 생각했다.” 그는 가슴에 깊은 상처와 고통을 받으면서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생각했다는 말은 깊은 묵상을 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깊은 묵상을 했다는 말은 조용히 내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생각할 줄 아는 묵상, 생각이 동반된 기도를 할 때에 주님의 사자가 그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혜인 것입니다. 고뇌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새 역사를 이루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인생이란 고뇌하지 않고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일을 해도 그렇습니다. 사랑할 때도 그렇고 직장에서도 그렇습니다. 내 인생에 꿈과 목표를 향해 달려갈 때도 그렇습니다. 고뇌해야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깊이 생각하다가 자신으로부터 자신이 사랑했던 마리아에게로 그의 생각이 옮겨졌습니다. 한편으로는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가 가여웠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약혼한 처녀가 임신하면 그것은 곧 불륜이요 간음이었기 때문에 율법에 의하면 사람들이 이 여인을 돌로 쳐서 죽여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동네방네 이 소식을 알리게 되면 이 여인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이 이 여인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요셉이 어떠한 성품을 갖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태복음 1:19) 

여기 보면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에 엄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동시에 긍휼한 마음으로 사람을 배려하고 친절히 대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은 한때나마 사랑했던 아내를 배려하는 남편의 마음이었습니다. 율법 앞에서는 냉정했지만 마지막으로 아내에 대해 배려심을 가지기로 작정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침묵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면서 남의 탓을 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 속에도 그런 성향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터트려야하고 책임을 덮어씌워야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문제가 있으면 그 아픔을 내 아픔으로 알고 침묵하면서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도 그런 성향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싸우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까? 아니면 내가 아파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까?’ 

이 두 가지의 마음, 여기서 요셉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면서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접목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얻으려면 생각하고 고뇌해야 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할까요? 기도해야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뇌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자신의 생각을 내려 놓았습니다

요셉은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마리아로부터 들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누가복음 1장에 있었던 이야기를 요셉에게 했을 것입니다. 이때 요셉은 화가 났을 것입니다. 어떻게 남자 없이 잉태할 수 있냐고, 이건 거짓이라고 꾸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증인이 그의 꿈속에 나타났습니다. 천사로부터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가 뭐라고 그럽니까? “다윗의 자손 요셉아.” 

요셉은 늘 꿈꾸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하는 꿈,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내주시는 꿈,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민족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에게서 날 아이가 온 백성을 구원할 자이다.” 두 사람의 증언으로 인하여 요셉의 마음속의 불신은 점점 확신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또 2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 

요셉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결정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작은 생각을 가졌구나. 이제는 하나님의 커다란 약속에 내 생각을 집어넣어야겠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순종했습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마태복음 1:24) 

요셉은 사자의 본부대로 아내를 데려왔습니다. 이제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더 이상 근심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요셉은 침묵했지만 가장 많은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준 인물입니다. 요셉은 무언(無言)의 사람이었지만 생각할 줄 알고 고뇌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아뢰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말 없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생각을 내려놓고 순종하십시오

저는 이 요셉을 보면서 창세기의 아담이 생각났습니다. 아담과 요셉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담은 생각이 없던 남자였습니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선악과를 덥석 물어버렸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일을 하면서도 고뇌하지 않았습니다. 생각을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셔서 왜 먹지 말라고 했던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했을 때 그는 자기가 했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함께 있었던 여인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웠습니다. 이것은 생각이 없고 고뇌하지 않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달랐습니다. 요셉은 어려운 사건에 부딪쳤을 때 고뇌했습니다.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말씀이 그에게 주어지자 그는 곧바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갖고 있었던 예수님을 잉태했다고 하는 그 순종했던 모습을 귀하게 하나님께 드릴수가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의 대표자로 이름이 기록되어있다고 한다면, 요셉과 마리아는 순종했던 사람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주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때로는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아플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 앞에 의탁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야 생명의 사건이 일어나고 성탄절의 기쁨의 사건이 내 삶속에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 앞에 내 생각을 투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불신앙 가운데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거기에 순종하겠다고 선언할 때 성탄절의 위대한 사건이 내 안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건을 만드시고자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지성과 이성으로 계속해서 막는 것이 무엇입니까? 감정적으로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감성,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성 속에 우리의 것들을 드려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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