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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크리스마스 영성 (빌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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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영성 (빌 2:1-11)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회 절기 상 ‘대강절’(待降節 Advent)입니다. 대강절은 ‘대림절’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성탄절을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교회보다 더 잽싸게 성탄절을 준비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어디죠? 백화점, 호텔, 유흥업소, 상점 등등입니다. 빠른 데는 벌써 11월초부터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장식을 만들고 야단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탄절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오히려 더 열을 내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먹고 즐기는 세상 풍습에 휩쓸리다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성탄절을 엄벙덤벙 보내기 일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성탄절을 제대로 맞이하고 보내기를 소원합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성탄절의 참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성탄절 즉 크리스마스가 무엇입니까? 여러 번 말씀드렸죠. 기억하시나요? ‘크리스마스’(Christmas)라는 말은 ‘그리스도’라는 단어(Christ)와 ‘경배’라는 단어(Mass)로 이뤄진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쏙 빼놓고 인간들끼리 먹고 노는 것은 그야말로 난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크리스마스 하면 많은 사람들이, 특히 어린 아이들은 선물 받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는 가장 크고 놀라운 선물인 예수님을 이미 선물로 받았기에, 오히려 우리가 선물을 드리는 날입니다. 어떤 선물을 드려야 할까요? ‘나 자신’입니다. 주님은 나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나’인가?” 하는 겁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크리스마스 영성을 가진 ‘나’”입니다.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말이 어렵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도 합니다. 영성은 간단히 말해서 ‘신령한 품성’(divine character)입니다. 신령하다고 해서 추상적인 게 아니라, 우리 인격 가운데 구체적으로 이뤄진 “예수님을 닮은 성품”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 영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닮은 성품을 가리킵니다. 유명한 복음주의 신학자 제임스 패커가 한 말을 들어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크리스마스 영성은 우리를 위해 비천해지신 예수님의 성품을 삶 속에서 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제임스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中)  

그렇다면 대강절과 성탄절 기간 중에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닮으며 예수님의 영성을 이어받는 겁니다. 본문 5절 말씀 그대로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죠. 당시 빌립보교회는 좋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 교회는 불완전하므로 문제도 없지 않았습니다. 교인들 사이에 시기와 다툼, 불화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멀리서 그런 소식을 들은 바울은 빌립보교회가 더 좋은 교회가 되려면 예수님의 영성을 가져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세상이 왜 이토록 혼란합니까? 교회는 왜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영성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의 영성, 특별히 크리스마스 영성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우리 자신도 행복해지고, 더 나아가 세상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크리스마스 영성은 여러 가지지만, 오늘은 본문 중심으로 두 가지만 소개해 드립니다. ‘비움의 영성’, 그리고 ‘낮아짐의 영성’입니다. 
  

[1] 비움의 영성 :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 자신이지만 사람이 되심으로 ‘비움의 영성’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 6절~7절을 보세요.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something to be grasped)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but made himself nothing)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은 본질 상 하나님이십니다. 

본체란 말은 본질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성부), 아들 하나님(성자), 하나님의 영(성령)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당연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취한다’는 단어는 ‘움켜쥐다’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grasp’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누리셔야 되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종의 형체 즉 사람의 외양를 가지셨다는 겁니다. 여기서 ‘비운다’는 단어는 잔에서 물을 완전히 쏟아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그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철저히 포기하셨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의 신성을 상실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으로서의 영광만 고집하지 않고 사람의 누추한 외형을 덧입으셨다는 겁니다. 마치 ‘거지가 된 왕자’와 같은 겁니다. 거지 옷을 입고 거지들과 함께 거지처럼 삽니다. 그렇다고 왕자의 신분을 상실한 것은 아니죠. 일시적으로 왕자의 영광을 유보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지와 똑같이 보입니다. ‘왕자 거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되신 겁니다. 예수님의 이런 속성을 가리켜 흔히 신인양성(神人兩性 God-Man)이라 부르는데, 영어로는 ‘God-Man’(하나님 인간)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비우셨어도 예수님 안에 있는 신성의 충만한 은혜가 흘러넘쳤습니다. 요1:14,16 “14 말씀(=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비우시고 사람이 되셨지만, 그 가운데 영광과 진리, 그리고 은혜가 여전히 충만합니다. 비우면 채워지는 원리입니다. 잔의 물을 비우면 공기로 채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번 대강절과 성탄절에 저와 여러분도 비움의 영성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에 있는 고집과 욕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로 충만해질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인생 살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잘 살펴보면 그 상당수가 ‘모자람’ 때문이 아니라, ‘지나침’에서 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육신적으로도 그렇잖아요. 각종 질병들을 보면, 너무 많이 먹어서 오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특히 현대에는 비만 자체가 큰 질병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마음의 비만입니다. 끝없이 욕심을 부리는 겁니다. 그래서 만족이 없습니다. 

‘부자병’이란 게 있죠. 신조어인데 어플루엔자(affluenza)라고 합니다. 이 말은 풍요(affluence)와 유행성 감기(influenza)라는 단어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현대인들은 풍요로워질수록 오히려 더 많은 것에 욕심을 냅니다. 돈, 소유, 외모, 지위와 명성을 과도하게 선호하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불만 불평을 늘어놓으며 공허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비교의식에 사로잡히기까지 하면 더욱 심각해져서 우울증이나 불안감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누가 행복할까요? 많은 소유나 화려한 조건을 갖춘 가진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욕심이 적은 사람입니다. 자기 소유보다 욕심이 적은 사람이 충만한 행복감을 느낍니다. 누가 그런 사람입니까? 마음을 비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마음을 비우면 하나님께서 신령한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마음 속에서 헛된 욕심, 다시 말하면 헛바람을 빼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되고 행복해집니다.   

어느 날 대도시의 러시아워에 대형 트럭이 지하차도 입구에 꽉 끼어버리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트럭에 너무 많은 짐을 실어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운전사가 여유 있게 통과할 줄로 착각하고 몰아버린 겁니다. 경찰이 출동하고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고 난리입니다. 전문가들이 차를 빼낼 궁리를 합니다. 그때 한 소년이 다가와서 운전사에게 말을 겁니다. “아저씨! 제가 차를 빼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트럭 운전사는 짜증을 내며 말합니다. “야, 꼬마야! 다치니까 저리 가!” 그러자 소년이 물러가면서 크게 외쳤습니다. “아저씨! 타이어 공기만 빼면 돼요.” 그 말을 듣고 그럴 듯하다 싶어 그대로 했더니 정말 트럭이 쉽게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속에서 헛바람만 빼도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 절기에 우리 각자 자신을 비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도 비우셨는데 인간인 우리가 비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비우는 것은 지극한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쪼록 비움의 영성을 이루심으로 참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낮아짐의 영성 :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시되, 가장 낮고 천한 모습으로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 달려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8절 보세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he humbled himself)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신 그분이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비하’(卑下 Humiliation)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산골의 천한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왕족이나 귀족 집안에서 오셔도 시원치 않은데, 목수 요셉의 집안의 족보에 들어 가셨습니다. 그리고 해산일이 다 되어 로마 제국의 호적령으로 요셉의 원적지인 베들레헴에 갔다가 여관 방도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게다가 누더기 강보에 쌓여 말구유에 누여졌습니다. 

그 뿐인가요? 핏덩어리 같은 어린 몸으로 헤롯의 핍박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 갑니다. 나사렛으로 돌아간 이후에는 요셉의 목수 일을 도우며 고달픈 세월을 보냅니다. 요셉이 요절한 후에는 모친 마리아와 육신의 동생들을 보살피는 소년 가장이 됩니다. 공생애 중에는 머리 둘 곳도 없는 홈리스(Homeless)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노예나 흉악범 같은 사람이나 달리는 흉악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낮아지고,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이 낮아진 주님 앞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영성을 갖추는 게 마땅합니다.   

한번은 철부지 제자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서로 다투며 불화할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막10:44~45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혹시 세속적인 왕이 되실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 욕심을 품고 서로 높아지려고 파워 게임을 한 겁니다. 그들의 한심한 작태를 보고 예수님께서 일갈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신다는 겁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죄인을 대신한 대속물로 주러 오셨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죠. 십자가 달리기 전날 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할 때였습니다. 유대인의 식사 전에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그런데 낮은 자가 높은 자의 발을 씻어 줘야 합니다. 그런데 눈치만 보며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어줍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웨이터가 되신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본래 낮고 천한 제자들이 서로 높아지겠다고 버틸 때 본래 지존하신 예수님은 “그래, 내가 웨이터 할께!” 이렇게 자청하셨습니다. 

이렇게 낮아지고 밑바닥까지 낮아지신 예수님! 그러나 그분이 어떻게 되셨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높이셨습니다. 

9절~11절 보십시오.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지존하신 예수님은 본래 모습 그대로 가장 영광스런 이름을 가지셨고, 모든 존재가 무릎 꿇고 주님으로 고백하고 경배하게 됐습니다. 이를 가리켜 예수님의 ‘승귀’(昇貴 Exaltation)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의 낮아짐으로 구원 받은 우리가 어떤 영성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스스로 낮추는 ‘낮아짐의 영성’을 추구하는 게 마땅합니다. 아니, 본래 나 자신의 모습만 깨달아도, 주제 파악만 해도 ‘낮아짐의 영성’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창3:19 “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 ” 우리는 본래 흙에서 왔습니다. 서양 언어에서 ‘겸손’(humility)이란 말이 어원적으로 ‘흙’이란 말(라틴어 humus)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흙인 것을 아는 게 겸손입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 십자가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요? 

약1:9~11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혹시 세상에서 낮고 천해도 기죽지 말라는 겁니다. 왜요?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존귀해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무엇이 좀 된다고 해서 교만 떨고 거들먹거리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봤자 별게 아니라는 겁니다. 인생은 잘나 봤자 쉬이 시드는 풀과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당연히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세상의 계급장을 다 떼어야 합니다. 세상에 나가서도 계급장보다 낮게 행동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너무 싫어하십니다. 

벧전5:5~6 “5 ...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낮추십니다. 아니, 대적 즉 원수로 취급하실 정도입니다. 그 대신 겸손한 자는 필요할 때마다 높여주십니다.   

조금 썰렁한 우화가 있습니다. 한 마을에 세 친구가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친한데 은근히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내려 와서 세 친구에게 각각 한 가지씩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자 첫번째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저 두 친구보다 잘 되고 싶습니다. 그러니 나를 스타로 만들어 주십시오.” 천사가 그를 스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두번째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저 친구보다 높아져야 하니까 킹(왕)으로 만들어 주습이소.” 천사가 그를 킹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세 번째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저 두 친구들을 이기고 싶습니다. 저를 스타로, 그리고 킹으로도 만들어 주세요!” 그러자 천사가 알았다며 그에게 스타킹을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교만하고 시기 질투하면 이런 신세가 되는 겁니다. 

전북 김제에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작은 교회지만 한국교회 역사상 유서 깊은 교회입니다. 1905년에 설립된 한국초대교회 중의 하나인데, 그 교회의 조덕삼 장로님과 이자익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경남 남해에 이자익이란 가난뱅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어디 벌어먹고 살 데가 있나 해서 이러 저리 떠돌다 전북 김제의 금산리에 당도합니다. 그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잣집을 물어 무조건 찾아갑니다. 그 집은 머슴들에게도 쌀밥을 주는 마음씨 좋은 조덕삼의 집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마부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그 마을에 선교사가 찾아와 복음을 전합니다. 

조덕삼도 이자익도 예수 믿게 됩니다. 집안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 몇이 조덕삼의 사랑채에서 교회가 시작됩니다. 이듬해에는 조덕삼과 이자익이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어 장로 1명을 뽑는 선거를 실시하게 됩니다. 후보는 2명, 조덕삼과 이자익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조덕삼이 당선되어야 하는데, 이자익이 당선되고 말았습니다. 상전에다 15세 연상인 조덕삼이 떨어졌으니 큰일입니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고, 게다가 목회자가 없어 장로가 설교를 담당해야 되는 상황이라 더욱 그랬습니다. 교인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는 비슷한 일로 양반들이 뛰쳐나간 일도 있었으니 정말 당황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조덕삼이 나서서 수습합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이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이자익 영수가 저보다 더 열심입니다. 여러분, 이자악 장로님을 모시고 우리 잘 해 봅시다!” 그 후 평양신학교에 유학 보내 목사 만들고 담임목사로 청빙하여 잘 섬겼습니다. 이자익 목사는 장로교 총회장 3번이나 지낸 유명한 목사가 됐습니다.

한편 조덕삼은 장로가 되었고, 유광학교를 설립해서 민족 지도자들을 양성했습니다. 그리고 집안도 잘 됐습니다. 아들도 장로, 손자도 장로가 됐습니다. 그 손자가 바로 故 조세형 장로(前 민주당 국회의원)입니다. 이자익 목사님도 훌륭하지만, 조덕삼 장로님은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성을 소유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가 높아집니다. 이게 바로 낮아짐의 영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축복과 영광입니다.  

여러분, 금년에도 어김없이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탄절을 위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혹시 세상 풍습대로 엄벙덤벙 지나가는 것은 아닌가요? 혹시 연례적인 행사처럼 형식ㄱ적인 예배 몇 번 드리고 끝내는 것은 아닌가요? 이건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 자신’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려야 합니다. 크리스마스 영성을 품은 산 제사로! 부디 크리스마스 영성인 ‘비움의 영성’과 ‘낮아짐의 영성’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자신도 행복해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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