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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마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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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마 3:16-17)


크리스마스는 어린이들을 위한 시즌입니다. 물론 어린이말고도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어린이가 없다면 산타클로스도 없을 것이고 선물을 주고받는 즐거움도 없을 것입니다. 어른들끼리만 보내는 크리스마스는 재미가 없습니다. 왜 어린이의 역할이 이렇게 강조되느냐. 아마도 예수님이 아기로 오셨기 때문이고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선물을 가지고 왔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자녀는 우리의 최고의 보배입니다. 가장 귀중한 소유입니다. 625전쟁 시 피난민들의 사진을 보셨을 것입니다. 머리에도 짐을 이고 손에도 짐을 들고 달구지에 짐을 싣고 끌고 가지만 제일 귀중하게 데리고 가는 것이 바로 자녀들입니다. 등에 업고 어깨에 태우고 손을 꼭 잡고 피난 가는 피난민 사진을 보셨을 것입니다. 제일 귀중한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70년대 중반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는데 그때만 해도 한인 이민자들에게 왜 이민을 왔습니까 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자녀의 미래.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제일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자녀의 미래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자녀들은 부모와 같이 살지 못하고 외국으로 내쫓겨가고 있습니다.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이것은 겉으로는 교육을 위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정직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국내에 자녀들이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면 왜 아이들을 해외로 내보내겠습니까.

 지구상에 우리처럼 이렇게 많은 자녀들을 이렇게 일찍 해외로 보내는 나라가 또 어디 있습니까. 중국이 그렇습니까, 일본이 그렇습니까. 선진국이 그렇습니까. 싱가포르가 그렇습니까. 이것은 우리나라에만 일어나고 있는 독특한 현상인 것입니다. 그 이유로 교육열이 높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교육열이 그렇게 높다면 우리나라에 더 나은 교육환경을 만들어주면 될 것이지만 이것은 어떻게 보면 탈피현상인 것입니다. 엑소더스(exodus)입니다. 국내의 너무 높은 경쟁, 너무 많은 스트레스, 자녀의 어깨에 지워주는 무거운 짐, 여기로부터 탈피하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심각한 경쟁 구조에서 우리 자식둘이 피해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피해자가 되는 것은 이건 부모가 못난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하나님이 백성의 죄를 갚으실 때 아비로부터 아들에게까지 삼사 대까지 벌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오늘날 우리 자녀들이 겪고 있는 고난은 부모의 죗값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부모의 욕심 ․ 부모의 교만 ․ 부모의 불신, 이 죗값을 자식들이 삼사 대에 걸쳐 갚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인의 한두 명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국인의 집합적인 죗값일수도 있습니다. 성공과 학벌지향주의, 남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생각,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우리 민족의 집합적인 죗값을 우리의 자녀들이 치루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청소년의 입장에서 보면 어린 시절이 제일 행복한 시절이 되어야 됩니다. 유치원을 kindergarten이라고 하는데 kindergarten은 독일말로 어린이 정원이라는 뜻입니다. 가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유치원은 정원이 아니고 학원이에요.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린이들, 청소년들의 제일 행복해야 되는 시절이 공부의 무거운 짐 때문에 괴로운 시절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부모에게는 자식이 어릴 때가 제일 행복한 추억이 있는 시절이 되어야 되는데 우리나라의 부모, 특별히 어머니들은 제일 괴로운 시간입니다. 자식과 싸우느라고, 공부 때문에 다투느라고 부모에게도 괴로운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은 같이 살아야 가족이지요.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아옹다옹하면서 살아야 가족이지 헤어져 있으면 그게 무슨 가족입니까. 어차피 아들딸은 시집 장가가면 떨어져 살게 돼 있는데 굳이 아이일 때부터 헤어진다면 가족의 정은 어디 있고 가족의 행복은 어디 있다는 얘기입니까. 제가 누구를 흉보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우리 한두 사람이 어떻게 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복합적인 병폐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피해자요 가해자입니다. 

아마도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과제가 있다면 그건 남북통일이 아니고 더 어려운 과제로써 장자 우리 후손들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옥처럼 경쟁하지 않아도 복된 삶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에요.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하면 물질적으로 잘사느냐를 염려하면서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질적으로 어떻게 하면 잘 사느냐를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는 과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우리만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예수님의 가족에게도 비슷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하면 즐거운 것 ․ 평안한 것 ․ 크리스마스 추리 ․ 하늘의 별 ․ 동방박사 ․ 또 양치는 목자 ․ 천군천사 이런 것들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그런 것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아주 사악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바로 헤롯왕이 예수를 찾아 죽이려고 한 일입니다. 그래서 누가 아기 예수인지 모르기 때문에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를 다 죽였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생각할 때 이 사건을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내면에 있는 사악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 내면에 있는 사악함.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그냥 나이스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나이스한 사람, 그냥 친절하고 나이스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굳이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저를 보세요. 저는 그렇게 나이스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옛날에 목사가 된다는 말은 그냥 나이스한 남자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결코 목사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악의 존재 앞에서 강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합니다. 인간은 악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기들을 귀여워하고 예뻐하는 것 같지만 인간은 아기라도 자기에게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면 죽을 수 있는 존재에요. 그래서 헤롯은 유대인의 임금이 탄생했다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에 잇는 사내아이들을 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사악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착하게만 태어났는데 환경 때문에, 연약함 때문에 방황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면 예수님이 굳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었어요.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고칠 수 없고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인간이 스스로를 용서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면의 사악함. 악에 굴복하고 악과 타협하고 악의 지재를 당하고 선한 것보다는 악한 열매를 맺고 이와 같이 이중적인, 종교인조차도 악하고 비종교인이든 종교인이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심지어 어른이든 어린이든 악할 수 있는 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에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그저 사람이 개과천선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그저 사람이 교양을 얻고 깨달음을 얻고 수양을 해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바꿔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고 결국은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는 영적으로 이루어져야 되고 이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롯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부르느냐. 예수님이 우리를 구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가 구할 수 없는 존재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 없이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로움은 의지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로 의로워질 수 있다면 예수님 필요 없습니다. 인간의 의로움은 의지가 아니고 결국은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그 탄생의 시점에서부터 아주 심각한 반대와 또 대립과 또 핍박에 시달렸습니다. 오늘 본문이 전형적인 예입니다 .예수님이 인생의 말년에만 시련을 받으신 것이 아니고 탄생하신 시점에서부터 당신을 죽이려는 세력이 있었어요.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예수님이 탄생하는 시점에서부터 역사했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는 근본적으로 그것을 싫어하고 반대하고 대적하려는 무리가 존재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교양이든 그 사람의 천성과 상관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느 나라든 어느 문화든 그것을 근본적으로 싫어하고 반대하고 적대하는 세력이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순교했습니다. 오늘날도 순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저 어떤 상징적인 스토리가 아닙니다. 사람이 의롭게 살려고 하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다는 메시지가 아니고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베들레헴 일대의 남자아이를 다 죽일 정도라면 이것은 진리를 대적하는 심각한 인간의 악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섣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복음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땅에 악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위협을 느낍니다. 위협받는 것을 느낍니다. 진리를 대적하고 교회를 싫어하고 복음을 반대하고 심지어 복음 전하는 사람의 생명조차도 위협을 받는 이러한 영적인 적대적인 세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때 왜 예수님이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권세를 제어할 권세를 주었다’고 말씀하셨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성경말씀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는 말씀이 있는지를 그제서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악의 세력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에 대한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영적인 씨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냐. 악 앞에서 강건한 사람입니다. 악으로 악을 이기는 건 아닙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용서하셨지요. 그리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고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서 진리의 능력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일으켜주셔서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해 주시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권세를 발견할 수 있고 신앙의 능력을 보고 그리스도인의 권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고 기도의 능력을 갖고 힘 있는 믿음을 갖고 살기를 원하는 이유가 다 거기에 있습니다. 그냥 나이스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도 아기였을 때는 부모의 도움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꿈에 천사의 경고를 받아서 마리아와 예수님을 모시고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남의 나라에 가서 몇 년을 살게 되는데 지금도 이집트에 가면 마리아와 예수님이 피했다는 장소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해외로 유학 가는 것을 볼 때마다 애굽으로 피신한 아기 예수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목숨을 찾는 자들 때문에 남의 나라에 가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나라의 어린이들도 그들을 쫓아오는 위협 ․ 불안 ․ 두려움 ․ 괴로움 ․ 불행 이것을 피해서 해외로 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일일 것입니다. 자녀를 보호해야 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자녀의 행복을 지켜줘야 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자식이 자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으니까 부모가 지켜주는 과정에서 최선의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것은 잠정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애굽에 영구 정착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제까지 애굽에 머무셨느냐. 헤롯이 죽을 때까지. 15절을 보면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19절에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예수님이 애굽에 피한 것은 헤롯이 그의 목숨을 찾았기 때문이고 그 위협이 끝난 후에는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활동하실 무대는 애굽이 아니라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녀를 외국에 유학 보내는 것 다 좋지만 외국에 유학을 보내는 것은 외국인을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이 장차 활동할 무대가 어디인지를 알아야 됩니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처음 개봉됐을 때 제가 저의 어머니와 같이 본 기억이 납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됐을 때라고 생각되는데 극장에 조금 늦게 들어갔어요. 그래서 자리에 앉으니까 벌써 영화가 시작됐어요.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가 시작하는 부분에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의 전경이 나오지 않습니까. 높은 산과 강물과 그 아름다운 전원 장면이 음악과 함께 나타날 때 사람들이 그게 하도 아름다워서 ‘와~’ 하면서 감탄하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아마 많은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나도 저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심겨졌을 것입니다. ‘나도 저렇게 아름답고 자연이 풍성한 곳에서 살고 싶다!’ 그런데 그 영화를 끝까지 보면 주인공들이 남의 나라로 도망갑니다. 그 사실을 아세요. 오스트리아에서 살지 못하고 나치 독일의 탄압을 피해서 다른 나라로 도망간다는 스토리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자연이 아름답고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평화스럽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면적인 평화를 보전해 주는 것은 아니에요. 외국을 우리가 겉모양만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의 설 땅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이에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 하나님이 나를 어디에서 쓰시기를 원하시는가. 내 사명의 땅은 어디냐. 내 자녀에게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그들에게 기업을 주실 곳이 어디냐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모도 애굽에서 정착한 것이 아니고 위협이 끝났을 때 헤롯이 죽은 후에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스라엘 땅에서 일하실 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나와 내 자녀가 설 땅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거기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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