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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구주(예수)가 필요한 인간 (롬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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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예수)가 필요한 인간 (롬 6:23)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져서 불바다를 이루고 있을 당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어거스타 선상의 갑판 위에서 식사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백악관 참모인 프랭크린 그래함은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건네주었습니다. “대통령 각하! 워싱톤 시간으로 8월 6일 7시15분에 일본 히로시마에는 커다란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그래함 참모! 아마도 이것은 인류 역사를 전환시킬 가장 커다란 사건이군!” 이라고 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히로시마 원자탄 투하로 인하여, 4년간이나 질질 끌던 태평양 전쟁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은 말을 잘못한 셈입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역사를 전환시킨 가장 큰 사건은 히로시마의 원자탄 투하가 아니라, 이 세상에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인류의 역사를 B. C와 A. D 즉 주님 오시기 이전 시대와 이후의 시대로 갈라놓았기 때문입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뉴욕에서는 아들이 군대에 가있는 가정마다 앞쪽 유리창에 별을 붙였는데, 특히 아들이 전사한 가정은 황금색별을 붙였습니다.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다섯 살 된 아들과 함께 뉴욕 시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창문들을 관심 있게 바라보던 아들은 아버지를 향해 물었습니다. “아빠, 왜 창문에 별이 붙은 집과 안 붙은 집이 있어요?” 아버지는 별이 붙은 집은 아들이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집들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아이는 창문에 별을 붙인 집을 볼 때마다 손뼉을 치며 외쳤습니다. 

“아빠 저 집도 아들을 나라에 주었네. 또 저 집도….” 마침내 주택가가 끝나는 공터에 이르렀습니다. 주택 사이로 난 빈 공간을 통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가 보였습니다. 작은 꼬마는 “아빠, 저기 하늘나라 창문에 붙어있는 별 좀 봐! 하나님도 아들을 보내셨나봐!”하며 소리를 쳤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왜 하나님께서 한 분밖에 없는 아들을 전쟁터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도록 보내셔야만 하셨을까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개혁자 요한 칼빈은 인생이 알아야 할 첫째가는 중요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며, 둘째는 사람에 대한 지식인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사람도 알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거꾸로 뒤집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가 사람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알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이 같은 문제는 할일 없는 사람들의 단순한 사색 놀음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이 문제와 대답 속에서 내 삶의 의미와 인생의 목적이 뚜렷이 밝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보면, 사실 이보다 더 중대한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장성한 사람에게는 제 나름대로의 인생관이란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얕고 천박한 인생관이란 마치 폭풍과 비바람이 몰아치는 캄캄한 밤에, 성냥불 하나만으로 길을 걸으려는 사람처럼 어리석고 무모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인가? 이 시간 우리 함께 인생 최대의 수수께끼를 풀어 보도록 하시겠습니다.

‘인간에 대한 완전연구’라는 저서를 쓴 B. A. 하워드는 인간의 몸을 이루는 물질이 다음과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물 38ℓ, 비누 7장에 해당하는 지방, 9,000개의 연필심을 만들 수 있는 탄소, 2,200개의 성냥을 만들 수 있는 인, 중간 크기의 못을 만들 수 있는 철분, 소량의 칼슘, 극미량의 코발트, 요오드, 아연, 구리, 몰리브덴, 티타늄 등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물가가 많이 올랐다고 해도 물질적으로 따질 때,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보잘것없습니까? 우리나라 돈으로 단돈 몇 만원에 해당되는 인생들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것이 인생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고 했고, 벨그송은 “인간은 웃을 줄 아는 동물이다.”고 했으며, 괴테는 “인간은 속아 사는 동물이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은 꿈을 꿀 때는 천사이고, 빵을 생각할 때는 거지가 된다.”고 했으며, 가수 최희준은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고 노래했습니다.

시인 하이네는 “나 여기 왔으나 어디로부터인가를 모르노라. 나 여기 있으나 무엇 때문인지를 모르노라. 나 여기 살았으나 그 수명을 모르노라. 나 가노라 하지만 어디로인가를 모르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까지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밖에 알지 못한 셈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에도 해답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입니까?

1.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먼저 그 명칭에 대한 어원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을 히브리어로 ‘아담’(???)이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땅’이라고 하는 단어 ‘아다마’(????)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곧 ‘땅’이요 ‘흙’이란 말과 같습니다. 좀 더 직접적인 증거를 찾아보면, 창 2:7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연 발생한 것도 아니고, 동물에서 진화된 것도 결코 아닙니다. 인간은 존재하게 된 원인을 갖고 있는데, 그 원인자는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세 가지 점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성의 구별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내가 남자를 지망해서 남자가 된 것도 아니고, 여자를 지망해서 여자가 된 것도 아닙니다. 남자이던가 여자이던가 둘 중에 하나의 성은 내가 택한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분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둘째, 나는 어찌하여 다른 나라에 태어나지 아니하고 한국 민족으로 태어났으며, 나는 어찌하여 그 때 나지 아니하고 지금 낳았으며, 나는 어찌하여 박 씨이고, 어찌하여 이와 같은 인간 구조를 가지고 태어났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사는 시간과 죽는 시간, 이 세상의 삶의 길이 등이 내가 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입니다. 

2)인간은 신체와 영혼의 두 요소로 합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창 2:7은 인간 신체의 기원과 영혼의 기원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신체는 땅의 흙으로, 곧 기존 물질에 의해 만들어졌고, 인간 영혼의 창조에는 기존 물질의 사용 없이,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에게는 육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영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러한 말씀들은 모두가 영혼의 귀중 성을 강조한 말씀들입니다.

3)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창 1: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은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남자일까요? 여자일까요? 하얀 수염이 휘날리는 노인일까요? 하나님은 남자도 아니시고 여자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약 1:17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1)인격 혹은 영혼에서-하나님이 인격을 갖고 계시듯이, 인간은 인격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이 영이듯이 인간은 영성을 갖고 있는 영물이며, 하나님께서 영원불멸하듯이, 영혼은 불멸하고 불사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입니다. 

(2)원의(原義)에서-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의롭고 지혜롭게 창조되었습니다. 

(3)지상 주관 권에서-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의 대주재자이듯이, 인간은 모든 하등 피조물 계를 주관하는 만물의 영장인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했으며, 전 7:29에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2. 범죄 타락하여 멸망하게 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은 인간은, 공중과 육지와 바다를 주관하는 만물의 영장으로 영광스럽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영생 불사할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창설하신 낙원 에덴동산에서, 풍성하고 만족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사탄의 시험에 빠져,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범죄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처럼 높아져 보리라는 야망과는 정반대로, 그 때부터 인간성은 짐승처럼 악마처럼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 정도에 있어서 어떠합니까? 칼빈주의에서는 인간의 지성, 감정, 의지가 전적으로 부패했다고 주장하고,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와 일치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동양 사상 가운데 성선설이라는 것도 있고, 성악설이라는 것도 있는데, 타락 이후의 성경적 인성관은 성악설이라고 보아서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기르면서 잘 관찰해 보십시오. 배워서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지만,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탐심을 부립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를 지으므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본래가 죄인이므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순진한 소녀에게도 죄악의 씨는 있습니다. 성자의 가슴에도 죄악의 씨가 있고, 걸음마밖에 하지 못하는 어린것들에게도 죄악의 씨는 다 있는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칠순이 넘는 노신사를 만나 전도한 얘기입니다. 노신사가 말하기를 “나는 이 세상을 70년이 넘도록 살면서 손톱만큼도 나쁜 일을 안했소. 내 재산으로 남에게 구제 사업도 많이 했고, 학교도 세워 공부도 시키고, 좋은 일을 많이 했소. 그러니 천당이 있다면, 나를 그렇게 어렵지 않게 들여보내 줄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난 옥한흠 목사님이 잔인하리만큼 단호하게 한 마디 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너무나 의로우시고 너무나 거룩하신 분이에요. 

그래서 선생님이 손톱만큼도 잘못을 안했다는 게, 그게 정말 별거 아니에요. 마치 태양 앞의 촛불 같다고나 할까요? 어두움에서는 촛불이 굉장하지요? 그러나 태양이 솟아오르면 촛불은 너무나 의미가 없잖아요? 선생님께서 손톱만큼도 잘못한 것 없다는 것이, 사람 앞에서는 인정받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가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람이 조금 양심적으로 살았다고, 약간 구제 사업했다고 하는 것 모두가, 마치 태양 앞의 촛불이나 마찬가지에요. 선생님, 그것 갖고는 구원을 못 받아요. 천당 못 갑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랬더니 그 노인이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가, 한참 후 침묵을 깨트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골에 내려가면 교회에 나가겠소. 가족들과 집안 대소가 간에 의논해서 예수 믿기로 하겠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의 대가, 죄의 형벌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말씀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고 했으며, 히 9:27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한번 죽으면 그만이다’ ‘죽으면 다 끝이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리들은 진리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이 하는 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사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전 11:9에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고 했고, 전 12:14에는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했고, 계 21:8에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후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영원한 지옥 형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옥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1)지옥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된 곳입니다. 다시는 영원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결코 하나님께 기도할 수조차 없는 곳입니다. 2)마귀와 귀신들과 각종 악한 무리들과 함께 지내는 곳입니다. 가장 악하고, 가장 추하고 더러운, 가장 잔인한 살인마들과 함께 지내는 곳입니다. 땅에서는 제아무리 예의 바르고, 고상하고 친절한 사람,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이런 악한 무리들과 영원히 함께 지내야만 하는 곳입니다. 3)지옥은 소망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소망은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근본적인 원동력입니다. 병이 들면 낫게 될 소망을 갖고, 가난하면 더 나아질 소망을 갖고 살게 됩니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털끝만한 소망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지옥에서는 심지어 자살할 가능성마저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마다 불로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곳, 죽고 싶어도 죽을 수조차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영원토록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3. 구주(예수)가 필요한 인간입니다.

지, 정, 의가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송장과 방불해서,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Total Inability, 즉 전적으로 무능하다고 합니다. 청소년 시절에 비오는 날 냇가에서 배터리로 고기를 잡다가 감전되어, 그 무거운 배터리를 걸머진 채 그만 물속에 넘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의식은 초롱초롱하여 일어나야 할 텐데, 이러다가는 죽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전혀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동생이 밧데리통을 걷어차는 바람에, 전선이 끊어져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의식은 뚜렷하면서도 감전으로 인하여 꼼짝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인간은 마음으로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죄인,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비통한 부르짖음 속에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리를 죄와,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 가운데서 건져 줄 수 있단 말입니까? 공자가 구원 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석가모니가 구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깊은 강물에 빠져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데, 공자 같으면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하더냐. 사람은 항상 바른 길로 가야 된다고 하지 않더냐?” 하면서 지나가는 셈이고, 석가모니 같으면 “너의 구원을 네가 힘써 이루라.”고 지나가는 격인데, 예수님은 친히 물에 뛰어 들어 건져 주신 구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가 왕자의 길을 버리고 구도자의 길을 갔던 이유는 생노병사라는 인간의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죽음과 관련된 석가모니의 한 일화는 불교에서 바라보는 죽음에 대한 이해를 보여줍니다. 고따미라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큰 부잣집의 안주인이었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딱 한 가지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소원하다 결국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아들이니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이가 첫돌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복받친 여인은 죽은 아이를 안고 만나는 사람마다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한 노파가 석가모니에게 찾아가보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은 석가모니를 찾아가 죽은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이를 가엽게 여긴 석가모니가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아이를 살려주겠다. 단 조건이 있다. 마을에 내려가 겨자씨 한 알을 얻어오는데, 그 겨자씨는 이제껏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던 집의 것을 가져와야 한다.” 

석가모니의 말을 듣고 고따미라는 여인은 기뻐하며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겨자씨를 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여인은 석가모니가 요구한 그런 겨자씨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온 마을에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던 집은 단 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의에 빠져 돌아온 여인에게 석가모니는 ‘생자 필멸’ 사상 즉 “꽃은 피어도 지고 사람은 나도 이윽고 죽는다. 이 모든 것은 생명 있는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는 교훈으로 애써 위로합니다. 

그런데 이와 아주 대조적인 기사가 성경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나인’성을 지나가시는데, 한 과부의 아들이 죽어 상여가 나가고 있었습니다. 슬피 우는 여인을 보신 예수님은 상여를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12살 먹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 주시고, 죽은 지 나흘 되어 썩어 냄새까지 나는 나사로를 말씀 한 마디로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병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 죄인에게는 의인이 필요하고,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구주가 필요합니다. 죄인에 대한 이 같은 필요성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요 은혜의 종교입니다. 본래 구원이란 말은 죄를 전제로 하고, 은혜란 사랑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죄’가 있었기에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은혜’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내면서도 서운해서 우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보면, 신구진 집사님이 사랑하는 딸 ‘그린’이를 1년간의 예수 전도단 선교사로 미국에 보내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공항에서 딸의 선후배들이 배웅하는 모습을 보며 한쪽 구석에서 결국 울고 말았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을 죽음에 내 놓으셨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라고 쓴 글이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좋은 길이 열려서 미국으로 떠나는 데도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너무도 서운해서 울음이 터지고, 하루 종일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 인간의 상정일진대, 한 분밖에 없는 독생자를 나 같은 죄인들을 위해 이 땅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사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뜨겁게 영접하는 복된 성탄이 되시기를,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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