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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 내게로 오라!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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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내게로 오라! (마 11:28-30)


I. 건축 조형예술

교회 건축을 하다보면, 예배당 모양에도, 색깔에도 주제가 있습니다. 이전 마두동 예배당 주제는 바로 오늘 본문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입니다. 공원쪽에서 건물을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두팔 벌려 세상을 안으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고 계시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배당은 단순한 건물이 아닙니다. 그 안에 신학이 있고 말씀이 있습니다. 기독교 건축은 예술이요 신학이요 형상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예배실은 교회를 가족 공동체로 이해하는 우리교회의 교회론이 담겨 있습니다.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우리의 꿈이 담겨있습니다. 강댓상, 성찬상의 무늬 하나에도 성도들이 모여 교회가 되고 소그룹 목장, 가정들이 모여 교회를 이룬다는 목장 중심교회의 철학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기 십자가를 보십시오. 

이 십자가는 벽에 걸어 두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골고다 언덕에 서 있던 십자가처럼 세워진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조금 크게 서 있습니다. 스피커, 영상, 다른 기제들에게 눌려 위축된 십자가가 아니라 세상을 압도하는 듯 당당한 십자가입니다. 모든 건물을 압도하는 이 공간의 주인공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나 때문에 채찍 맞고 못 박히고 창에 찔려 상처난 십자가입니다. 마디마다 가시가 돌출되어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빛에 비춰진 가시는 물방울이 맺혀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것은 물방울이 아닙니다. 

멜 깁슨의 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는 절정의 순간에 하늘에서 집채만한 물방울이 십자가 곁에 떨어져 수천의 물방울이 되어 튀어 오릅니다. 멜 깁슨은 이것이 하나님의 눈물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돌출된 가시들이 빛을 받으면 눈물처럼 보입니다. 여기 불빛에 비춰진 우리 십자가의 눈물방울은 아버지 하나님의 아픔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로비에 나가면 오병이어 조형물이 매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기적이 오병이어의 기적일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보리떡과 물고기가 5천명을 먹이는 양식이 되었듯이 하나님은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를 사용하셔서 오늘의 한소망교회를 이루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입니다. 오병이어 조형들은 수많은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욱 큰빛이 되어 한소망교회와 우리의 가녀들은 한국교회를 섬기고 이 민족을 살리는데 하나님이 쓰실 것입니다. 물고기와 떡은 누에고치가 실을 뿜듯이, 거미가 줄을 뿜듯이 수 없는 줄로 연결되어 만들어졌습니다. 한계가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풍성함을 상징합니다. 

로비 문을 열고 나가면 모세의 떨기나무 불꽃을 상징하는 머리돌이 서 있습니다. 초라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도 꺼지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은 거룩한 땅입니다. 야산 벌판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 성전이 되고 예배의 처소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에벤에셀 기념비를 세우듯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념하는 머리돌을 이렇게 세웠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셨습니다”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II. 예수님상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예술은 기독교 역사속에 음악과 그림 그리고 조각, 조형물로 표현이 되어 왔습니다. 개혁신학에서 말씀이 귀로 듣는 설교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성찬으로 표현되듯이 기독교는 귀로 듣는 음악과 눈으로 보는 미술로 표현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귀를 만드셨기에 음악이 필요하고 눈을 만드셨기에 미술이 필요합니다. 

개신교는 그림이든 조각이든 조형이든 열린 자세를 가지고 기독교 예술을 발전시켜 왔으나 천주교는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진 오히려 폐쇄적인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최근엔 개신교, 천주교, 희랍정교 모두 자유롭게 기독교 예술을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수정교회, 미국의 컴패션 건물 등엔 인상깊은 예수님상이 자랑스럽게 서 있습니다. 발 씻는 예수님상에 어린아이들이 친구처럼 등을 타고 노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교회도 로비층 난간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마태복음 11장 28절을 주제로 한 예수님 상이 서 있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가 고통과 무거운 짐을 지고 교회에 오는 성도들을 금방이라도 내려가 그 짐을 받아 줄 듯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곳에 올때마다 무거운 짐이 벗겨지고 기쁨과 행복과 자유를 얻어가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즐거운 교환의 장소로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조형물들과는 달리 이 예수님상은 세우고 싶은 목사의 마음과 선구자적인 결단이지만 조심스러운 마음이 교차하여 고민과 기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림이나 조형예술이 과연 예수님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그래서 기독교 미술을 전공한 교수, 예배학 교수, 기독교 문화학 교수들과 토의도 하고 의논도 하고 연구도 하여 기쁨과 설레임으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미술가요 이 작품을 작가 최민준 목사님은 “이 예수님상은 조각 조각 짤려진 자국을 그대로 남겨두어 자신을 짜르고 찢어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님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해설했습니다. 성찬에서 빵을 떼는 심정으로 이 예수님상을 통해 영감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주의 전에 올때마다 두팔 벌려 반겨 맞아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저주와 질병, 고난과 아픔, 시련과 문제덩어리들이 기쁨과 사랑과 회복과 치유와 자유와 화평으로 바뀌어 지는 즐거운 교환의 역사가 이곳에 올 때마다 일어나시길 축복합니다. 

날마다 무거운 짐이 굴러 떨어지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예술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담고 있는 상징과 말씀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목사인 제가 그곳에 서서 여러분을 영접하고 환영하고 싶지만 그것이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예수님상은 성도님들께 평안을 드리고 싶은 목사의 마음이 한껏 담겨 있습니다. 

한 주간도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얼마나 무거우셨습니까? 

안아주고 싶지만 오직 우리를 안아주시고, 내 인생의 무거운 짐을 맡아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인생을 살아오면서 힘겨운 짐이 없던 때가 있었나요? 나에게는 인생의 짐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고달프고,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대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살아가며,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괴롭고, 권력자는 그들 나름대로 힘겨운 고통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공부하고 시험을 치러야 하는 짐이 있고,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연약함과 죽음의 짐이 있습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에게 괴로움은 떠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고통 속에서 태어나서 고통 속에서 살다가 고통 속에서 죽어갑니다. 출애굽 지도자 모세의 기도대로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라” 그러기에 세계 정복을 꿈꾸던 나폴레옹도 세인트 헤레나 섬에 유배되었을 때, “나는 지금까지 단 일주일도 행복한 날이 없었다. 저기 바닷가에 넘실거리는 물결은 세상 사람들의 눈물이요, 저기 부는 바람 소리는 세상 사람들의 한숨소리로구나”라고 한탄했던 것입니다.


III. 인생의 무거운 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18세기 영국이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다닐 때, 수없이 많은 배들을 띄웠습니다만, 그 중에는 적지 않은 많은 배들이 침몰되곤 했습니다. 배들이 자주 가라앉게 된 큰 이유는 짐을 너무 많이 싣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사무엘 프림솔(S. Plimsoll)이라는 사람이 이를 연구하고 조사하여 영국 국회에 한 개의 법안을 제출, 통과시켰습니다. 그 법의 이름이 적재한계선(Load Line)이라는 법이었습니다. 일정한 짐을 실은 배가 일단 물 위에 띠워지면 그 배가 물에 닿는 부분에 선, 줄을 긋고, 그 이상은 절대로 초과해서 짐을 더 못실게 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큰 배를 보면 배 아래에 노란선, 하얀 선이 그어져 있지요? 이 선을 프림솔이란 사람이 제안했다고 하여 Plimsoll line이라고 합니다. 일단 이 선이 물에 닿으면 그 이상 짐을 실을 수 없습니다. 이 선은 생명선과 같습니다. 그 이상 짐을 실으면 배가 가라앉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 조그만 풍랑이 일어도 쓰러지고 뒤집혀지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쉬기를 원합니다. 피곤한 영혼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리며 살다가 어느 곳에 짐을 내려놓고 쉬기를 원하지만 쉴만한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사역의 짐을 벗어던지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께 맡기고 힘을 얻어 기쁨으로 지고 사십시요.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29절)

신앙생활의 멍에는 벗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지는 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인생의 짐을 대신 져줄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인류 중에 그 누구도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준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무거운 인생고를 해결해 줄 수가 없습니다.

이순신도, 세종대왕도, 아브라함 링컨도, 알렉산더도, 석가도, 공자도, 그 어떤 성현도 괴로움을 안고 괴로워하다가 죽었습니다. 자기가 죽어서 무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까? 흙 위에 누워 흙을 덮어쓰고 누운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인생이 힘들고 고달파도 인생의 짐을 주께 맡기고 감사함으로 교사의 짐, 목자의 짐, 사역의 짐을 지십시요.


IV. 당신이 쉬지 못하는 이유

사람이 잘 쉬지 못하고 마음이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탐욕 때문에 인간은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스스로 만족을 모르는 소유의 욕구가 바로 탐욕입니다. 원한다고 모두를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건만 인간은 끊임없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하고야 말 것처럼 욕심을 부립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합니다. 탐욕을 버리고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자족하는 비결을 깨우쳐야 참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 다 얻고 소중한 가족들과 자녀들을 다 잃고 나면 당신에게 남는게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짐을 맡아 주십니다. 

둘째, 시기와 질투 때문에 인간은 잘 쉬지 못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늘 남과 나를 비교하는데서 옵니다. 내가 특별히 못나지도 않았는데, 남과 비교해 보면 괜히 뭔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나는 만족하지만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배가 아파 옵니다. 그래서 그들을 헐뜯고 깎아 내려야 속이 시원해지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에 쉼이 있을 리 없습니다. 아무리 깍아내려도 나보다 더 훌륭하고 잘 사는 사람은 항상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내 곁의 소중한 사람 원수로 만들지 마십시오. 시기 질투를 품고 살아가는한 당신에게 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것 아닌데 비교하지 마세요. T.V에 그 여인이 이쁜데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가 잘 쉬지 못하는 세번째 이유는 분노 때문입니다. 

순간적으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혈기를 내고 나면, 몇 날 씩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나의 혈기로 상처 받았을 상대방을 생각하면서 잠을 못 이루고 그렇게도 노력했건만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성경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는데 화해를 해야지 하면서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손을 내밀지 못하고 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고요. 더구나 가정과 교회안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구요. 

넷째, 교만 때문에 인간은 진정한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치에 비해 늘 인정과 대접은 정당하게 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서운하고 저 사람에게 섭섭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도 쉼은 없습니다. 늘 마음이 불편스럽습니다. 인정 받아보겠다고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해 봅니다. 자기가 옳다고 소리질러 봅니다. 그럴수록 초라해지는 자신을 느낍니다. 거기 어찌 쉼이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쉼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죄 때문이었습니다. 

밀턴의 대 서사시 실락원은 쉼터를 잃어버린 인간의 고뇌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곧 쉴 곳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겐 참된 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음악에도 쉼표가 있고 그림에도 여백이 있습니다. 조각에도 공간이 있고 고속도로에도 휴게소, 주유소가 있습니다. 활도 시위를 계속 팽팽히 조율해 놓거나 계속 당기고만 있으면 탄력을 잃어버려 정작 과녘을 발견했을 때는 힘을 받지 못하고 맙니다. 

이처럼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안식을 잃었습니다.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등진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것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에게 최초로 수고란 말이 나옵니다. 여자에게는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3:16)라 하였고 남자에게는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고 했습니다. 얼굴에서 땀이 흘러야 소산을 먹을 것이라는 수고의 벌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온 것이 바로 ‘수고’였습니다. 

이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에 짓눌려 일이 즐겁지 않은 저주를 말합니다. 삶이 즐겁지 않은 것 그것이 수고입니다. 교회생활 그리고 사역이 즐겁지 않은 것이 수고입니다. 그것 즐겁지 않은 마음을 주께 가져오란 말입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수고란 말은 함부로 하는게 아닙니다. 그래서 안식을 잃은 것은 즐거움을 잃은 것이요 행복을 잃은 것입니다. 천국은 안식하는 곳이요 지옥은 안식을 빼앗긴 곳입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불행은 안식을 잃은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안식 얻을 곳이 없습니다. 안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께서 거두셨기에 하나님이 안식을 주시기까지는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내가 주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는 진정한 안식을 얻지 못했노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역 내려놓는다고 안식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어도 날개를 퍼득이다 보면 하늘을 날게 됩니다. 


V. 다 내게로 오라.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이 쉼 - 안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역사의 지평에 등장할 메시아의 출현을 예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53:4) 그분은 인간이 지고 있는 수고의 짐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분이 탄생할 때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한 천사가 나타나서 장차 태어날 아기에 대해 이렇게 예고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진정 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홀로 담당하사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과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한 어깨에서 짊어지셨습니다. 여전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허덕이면서 삶의 길을 걸어가는 오늘날의 순례자들에게 그분은 이렇게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것이 그분의 초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 - 엉뚱한 곳에 가서 쉼을 구하지 말고 내게로 오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로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에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한 종교에로의 초청이 아닙니다. 심지어 교회로 초청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시 유대 종교는 민초들에게 해방과 자유와 안식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수고와 짐만을 안겨주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종교는 종교자체가 짐일 수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 시대를 향하여 찾아오는 교인들에게 평안과 안식과 자유를 주기보다는 오히려 짐이 되고 수고를 강요하지는 않았는지요. 예수님 당시 소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죄악의 짐을 지고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더욱 커다란 정죄와 무거움과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쉼 - 참된 안식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오늘 여러분 교회에까지만 오지 말고 당신의 구세주, 당신의 무거운 짐을 맡아주신 그분, 당신의 저주를 해결하신 그분, 당신의 영생복락을 준비해 준 그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십시오. 거기 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초창기 선교사들은 요즘 승합차 비슷한 큼직한 자동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선교사 한분이 차를 몰아 시골길을 가는데 한 할머니가 시장 갔다 돌아오는 길에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지나갑니다. “할머니 이 차에 타십시오.” 선교사의 차에 올라탄 할머니는 차에 타고서도 머리의 짐을 내려 놓을 줄을 모릅니다. “할머니 짐 내려 놓고 편히 가세요.” 할머니 왈 “나 하나 탄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짐까지 내려 놓겠소.” 그때 선교사님 하신 말씀이 “할머니 몸 맡겼으면 짐 맡기세요” 하더랍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왔으면 내 인생도 내 인생의 문제들도 나의 꿈도 모두 주님께 맡겨 보십시오. 


VI. 예수님이 풀어주시는 짐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와 풀어야 할 짐, 예수님이 풀어주시는 짐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께 나오면 죄의 짐이 풀어집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죄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죄가 없어.” “나는 법 없어도 살아”하는 사람을 종종 보는데 그런 사람이 제일 흉측한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은 죄 중에 잉태되고 죄에서 태어나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짐을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죄짐을 다 풀어 주셨다는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짐은 그 자리에서 당장 풀어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질병의 짐이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서운 고통 중의 하나가 질병입니다. 질병은 생명을 앗아가고 행복한 가정을 파괴해 버립니다. 가정에 남편이 병들면 행복이 깨집니다. 자식이 아프고 아내가 병들면 온 가정이 우울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병을 퇴치하려고 지구가 생긴이래 수천년간 약초를 찾아다녔고, 오늘날도 의학이 발달했다고 자랑은 하지만 불치병은 더욱더 늘어갈 뿐입니다. 말세의 재앙 중에 질병으로 고통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성경은 예고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암, AIDS, 이름 모를 난치병들...

그러나 야훼 라파!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출15:26) 이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를 만난 모든 환자들은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 시간도 예수님께서는 질병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내게 오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못된 질병의 짐아 풀어 져라!” 이 시간도 진정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질병의 짐이 풀어집니다.

세째로, 가난의 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계지도를 펴놓고 국민 소득 2만불, 3만불 이상 되는 나라마다 색칠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색칠된 나라가 예수를 믿는 나라인가 다른 종교를 믿는 나라인가를 알아 보십시요. 여러분이 찾아낸 30여개 국 중에서 95%가 기독교 국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5%에 해당하는 그 외 한 두 나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경제부흥을 이룩한 다음 껍데기만 취하고 알맹이 예수를 버린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는 그 물질적 풍요로 인하여 무서운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네째로, 죽음의 짐이 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오늘밤 찾아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죽음 이후의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예수 앞에 나와 죽음의 짐이 풀려진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내 인생이 끝난다고 해도 오늘 지구가 없어진다고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무거운 짐들을 벗기를 원치 않습니까? 짐이 이것들 뿐이겠습니까? 인간은 모두가 생활고의 짐, 자녀들의 염려, 근심, 걱정, 절망, 좌절, 실패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모든 짐진 자들을 향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지금까지 여러분이 어떤 인생의 짐을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서 그 짐들이 몽땅 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VII. 맺으며

비전채플이 건축되는 과정에서 몇 개월동안 건축이 중단된 적이 있습니다. 한 켠에서는 H빔 옹벽이 무너지고 있었고 이곳 저곳 콘크리트 바닥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혼자서 지켜 보다가 울음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건축 중보기도실에 들어가 엉엉 울었습니다. “하나님, 내 자식이 병들어 누웠어도 이만큼 아프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내 건강이 무너져도 이만큼 아프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해결해 주세요.” 실컷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주께 맡기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셨습니다. 건축이 중단되고 못하게 된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몇 년 동안 연기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이 성질머리에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비전채플을 주께서 마침내 세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짐이 아무리 무거워도 당신 망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믿음 없음이 문제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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