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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 (롬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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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 (롬 6:1-11)


우리는 오늘 본문까지 이르는 동안에 대단히 중요한 사도 바울의 발언들을 들은 바 있습니다. 그것들은 주로 “의”와 “율법”에 대한 발언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몇 가지 말씀을 돌이켜봅니다. 먼저 3:20-24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8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바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졌다고 주장합니다. 4:2-3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5:20에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썼습니다. 우선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한 말의 진의를 바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죄를 짓게 하시기 위해 율법을 만들어 주셨다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 본뜻은 바울 자신의 율법에 대한 다른 발언들을 상기함으로써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한 말이나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4:15) 한 말이나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5:13) 한 말들이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한 사도 바울의 참 의도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한 말은 많은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는 말은 사람들에게서 바울이 율법폐기론을 설교한다거나 율법의 윤리적 요구를 무시한다는 의혹을 품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는데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은 그 의혹에 더욱 불을 지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사람들이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상한 질문이 바로 오늘 본문의 첫 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하면 분명 사람들 가운데는 “그러면 은혜가 더 넘치게 하기 위해 죄 가운데 머물면서 더 많은 죄를 지어야 하겠네?”라고 할 자들이 있을 것인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야 하겠느냐고 바울이 묻는 말이 본문 1절의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답하는 말이 본문 2절의 “그럴 수 없느니라.”입니다. 

사도 바울의 대답은 단호하고 명쾌합니다. 그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하고는 이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을 향하여 속사포처럼 쏘아대며 반문합니다. 본문 2-3절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 반문 속에는 이미 그가 오늘 본문에서 하는 모든 말이 다 압축되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사고를 대변하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우리”입니다. 본문 3-5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일차적으로 죄에 대한 죽음으로 설명합니다. 바울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합한 우리가 어찌 다시 죄와 합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이미 죄하고는 끝난 사람들이라.”고 외치는 데 사용한 표현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끌어들인 것이 세례입니다. 옛날 세례를 행하는 방식은 세례 받는 사람의 몸이 물속에 완전히 잠기도록 들어갔다가 나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행위를 통해서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는 것을 상징하고자 한 것입니다.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 옛 삶이 방식이 완전히 물에 수장되어버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세례를 에로 들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단지 죄에 대한 죽음으로만 설명하고 말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보다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것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원래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례뿐 아니라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그와 연합됨을 의미했습니다. 본문 5절 이하를 계속해서 봅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먼저 그의 죽으심과 연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죽음은 죄로부터의 완전한 결별이라는 뜻의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죽으심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와 함께 죽는 것은 우리가 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고 죄에서 의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마귀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다시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죄로 돌아가거나 죄 가운데 머물 생각은 하지도 말아야 하고 할 수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계속해서 죄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의 지배와 그 노예상태에 더 이상 있지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 대하여 죽은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하여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이 연합에서 우리는 떨어져나가려 해서도 안 되고 떨어져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열심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놀라운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 귀한 선물에 믿음으로, 사랑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시고 온 세상의 왕이시며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이 죄의 심각성을 경감시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으시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의 제물로 내놓으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중한지를 웅변적으로 답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만 하면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다는 사실이 우리의 죄가 작아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쉽게 죄에 거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크나큰 선물을 주신 주님께 순결한 믿음과 성별된 삶으로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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