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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들이 빠지기 쉬운 착각 (눅 2:4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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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들이 빠지기 쉬운 착각 (눅 2:41-51)


어떤 철학자가 절망을 가리켜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절망과 낙심의 끝은 포기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포기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불행한 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절망적인 상황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적인 상황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인생 여정에서 절망적인 상황은 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까?
절망적인 상황의 원인은 우리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참으로 지혜롭고 강하고 능력이 있다면 우리에게 절망적인 상황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한계와 나약함, 그리고 무능력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누구나 다 연약하고 약한 존재입니다.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한없이 유한한 존재입니다.  인간의 한계에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이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한계가 있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다 죽고 망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절망과 실패 앞에서 필연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다 정말 필연적으로 절망하고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필연을 극복하고 구원을 얻으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절망적인 상황과 실패로부터 구원을 얻고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십니다.  우리 인간은 나약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강하시고 전지전능하십니다.  한계가 있고 나약한 인간이 무한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붙잡게 될 때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은 극복될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됨으로써 소망을 갖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축복의 근원이시고 구원의 소망이십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마음에 확신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붙드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도 절망적인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갔지만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신실한 사람에게도 절망적인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들에게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의 원인은 우리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입니다.  그러나 절망의 원인은 불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고 망하는 것은 절망 때문이지 절망적인 상황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근원이시고 구원의 소망이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아니 분명히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과 그 구원의 뿌리가 되는 소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의 삶은 밝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면 멀어지게 될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어두워지게 되고 절망적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삶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과의 거리와 관계에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그 두 사람에게 어떤 사이냐는 질문을 합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관계와 사이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이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알기는 알지만 거의 관계가 없는 사이가 있습니다.  그 보다는 조금 더 잘 아는 사이이어서 서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상식적인 지식이 있고 점심 정도는 나눌 수 있고 기쁜 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축의금과 부의금을 낼 수 있는 정도의 관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죽고 못 사는 관계가 있습니다.  뗄 레야 뗄 수 없는 그런 사이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이와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그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입니다.  그와 같은 사이와 관계는 축의금과 부의금 정도를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내 것과 네 것이 구별이 없는 관계입니다.  물질은 물론이고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하나님과 어떤 사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면 과연 당신은 예수님과 어떤 사이이십니까?
솔직히 어떤 관계이십니까?
그냥 좀 알고 지내는 사이이십니까?
그보다 좀더 친하게 지내시는 사이이십니까?
아니면 가족과 같이 뗄 레야 뗄 수 없는, 내 것과 네 것의 구분과 구별이 있을 수 없는 그런 관계와 사이이십니까?
저는 그 관계와 사이의 차이에 따라 우리 삶의 명암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이,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거리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사랑하십니다.  말씀으로만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전부를 다 던져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가까이 올 수 없는 거리와 사이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하여 때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온전한 사랑은 one way가 아니라 two way입니다.  한 쪽만의 일방적인 사랑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짝사랑으로 병든 사랑입니다.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사이와 관계는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소망이 되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와 사이에 있어서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다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만 하나님을 선택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과 소망과 축복은 이제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와 관계가 서먹서먹하지 않아야 합니다.

미국의 남북 전쟁 때 남군의 지도자는 리 장군이었고, 북군의 지도자는 링컨 대통령이었습니다.  리 장군과 링컨 대통령은 다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리 장군보다 링컨 대통령이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사랑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집무 중에 기도를 많이 한 대통령으로 유명합니다.  때때로 그의 사무실 앞에는 '기도 중'이라는 팻말이 붙고는 했습니다.  그는 하루에도 몇 시간씩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북군에 속한 교회의 목사님들이 대통령을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이 우리 북군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대답을 통하여 링컨이 얼마나 믿음이 좋았던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부분의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 달라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여호수아 5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 한 사람과 마주 대하게 됩니다.  여호수아로서는 정말 기겁하고 놀랄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에게 묻습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편이냐? 우리 원수의 편이냐?"는 말입니다.  그때 칼을 든 사람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지금 여호수아가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묻는데 그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왔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동문서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네가 여호와의 편에 서 있으면 나는 너의 편이 되고, 네가 여호와의 편에 서 있지 않으면 나는 너의 적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기 보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구원과 소망은 하나님과의 사이와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와 사이이냐에 따라 구원과 소망의 명암이 바뀝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과연 어떤 사이이십니까?  그냥 좀 아는 사이이십니까?  아니면 내 것과 네 것이 없는 죽고 못 사는 관계와 사이이십니까?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만 내가 하나님과 죽고 못 사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돈과 재산을 함께 쓰고 나눌 수 있는 가족으로 영접하고 받아들이십니까?  우리는 아이들에게 필요하다면 더 크고 더 많은 것도 지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신다고 고백한다면, 정말로 그렇게 고백한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헌금도 내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가족이시기 때문에 축의금 내듯이, 조금 많은 축의금을 내듯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나는 저 사람하고 죽고 못 사는 그런 관계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참으로 그 사람과의 관계는 아주 멋쩍은 이상한 관계가 되고 맙니다.  혹여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게 멋쩍고 이상한 관계는 아니십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이는 내 입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한 구체적인 헌신과 삶의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신약 성경 중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 기록을 빼고 나면 공생애 이전의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공생애 이전의 아동기에 관한 유일한 본문입니다.  그 내용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부모님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축제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하룻길을 내려와서 보니까 예수님이 없었습니다.  분명히 그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줄로 알았던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예수를 찾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할 때까지 예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성전에 남아 계셨는데 저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동행하는 줄로 착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일년에 한번 씩 성전에 가는 길을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동 여행이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일행 중에 함께 있는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을 모르고 착각했다는 것입니다.  다행이 그 착각이 하루였기 때문에 사흘 정도의 고생을 한 후에 예수님을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착각이 좀 더 길어졌다면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겠지만 평생을 착각하며 살았다면 평생 예수님을 잃어버린 채 착각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곁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예수님이 나와 함께 아니 계셨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나와 함께 아니 계시다는 그 사실조차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한 마디로 착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는 예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여정 가운데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동행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생각과 가치관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소원하는 그 기도 속에, 그 꿈과 비전 속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고난을 겪고 있는 그 고난의 현장에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고 동행하고 계십니까?
정말로 여러분은 언제 어디에서든 예수님과 함께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요셉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을 모르고 함께 하실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를 잃어버렸던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오늘 이 시대의 교인들이 예수 없는 종교꾼에 머물러 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번잡한 생활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잃어버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민족이요, 백성임을 확인하는 축복된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면 약 300만 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말이 300만 명이지 이것이 얼마나 많은 숫자입니까?  지금 울산 시민이 백만 명이 조금 더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보통 일입니까?  거기에다가 유월절에 잡는 제물의 피 냄새가 예루살렘 성 10리 밖까지 진동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길이 얼마나 분주하고 번잡했겠습니까?

나사렛에서 살고 있던 예수님께서도 열두 살이 되어서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일주일동안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곳곳마다 축제의 마당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유월절의 축제가 끝나고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난 마리아와 요셉은 하룻길을 간 후에야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를 잃어버린 요셉과 마리아를 보십시오.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이라는 시골에서 올라왔습니다.  오랜만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볼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세상 것이 좋았으면 예수님이 옆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하룻길을 달려 왔을까요.  결국 그들은 번잡한 세상 문화에 푹 빠져서 예수님이 동행하고 있는지 조차도 몰랐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위가 번잡하면 정신을 뺏기기 쉽습니다.  관심을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 예수를 그만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에게 예수를 잃어버릴 수 있는 아주 확실하고도 분명한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저 세상만 바라보고 가십시오.  세상의 번잡한 문화에 완전히 빠져보십시오.  취미도 좋습니다.  세상의 취미에 한 번 정신없이 빠져보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100% 완벽하게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확실히 보증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지옥에 가는 것은 제가 책임을 지지 못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주위가 번잡하면 정신을 빼앗기기 쉽습니다.  바른 일에 관심을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세상 문화와 취미에 빠져버리면 우리는 예수 없는 예수쟁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확실한 한 가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을 전혀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이 이 땅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도가 세상에 있다고 세상 것만 바라보면 틀림없이 방황하게 되어 있습니다.  혼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세상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있다고 해서 세상 것만 바라보면 교회는 혼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로서의 본연의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주요 완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문화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합니다.  세상의 취미도 주님과 함께 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필경 예수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예수를 잃어버리고서도 잃어버린 줄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에서 구원의 확신이 사라지고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음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이 예수 없는 인생을 살았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때임을 아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대인들이 얼마나 번잡한지 모릅니다.  저마다 바빠서 죽겠다고 합니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습니다.  바쁘다고 하면서도 취미생활은 어쩌면 그렇게 많습니까?  주부들도 아침 식탁을 다 정리한 다음에 커피 한 잔 끓여놓고 성경책을 펼쳐놓고 하루일과를 묵상하며 기도하는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손에 설거지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또 다른 번잡한 일에 시달립니다.  산란하고 불안정하고 산만합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동행할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너무 집착해서 살다 보면 예수를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지금 보면 세상에 너무 집착해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 가지 일에 전념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지나치면 이롭지가 않습니다.  취미는 좋은 것이지만 지나치면 좋지 않습니다.  지나친 취미가 마침내 예수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지금도 산 때문에, 낚시 때문에, 골프 때문에, 이 취미를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해서 예수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헛되고 헛된 것들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신기루와 같은 것들에 너무 매이지 마십시오.  가짜만 보고 살면 진짜를 모릅니다.  번잡한 세상 문화에서 벗어나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정말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 없는 예수쟁이가 아닌지 나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오늘의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분주한 생활 속에서 정신없이 살다가 정작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도 잃은 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시니까 그런 줄 알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차라리 잃은 줄을 알면 그래도 다시 찾고자 하는 소망이라도 있습니다.  더욱이 답답한 것은 잃은 줄도 모르고 사는 어리석은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교회의 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행사를 준비하며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정작 신앙은 간 곳 없고 영적으로 지쳐 쓰러질 때가 많습니다.  주의 일을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복음의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본질적인 것에 매달려 허우적거리다가 본질을 놓쳐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44절에 보면 허둥대고 살아가는 인생들을 향한 비극적인 한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4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했으나 예수는 동행 중에 아니 계시더라.  마리아는 예수가 요셉과 함께 있으려니 생각했고, 요셉은 예수가 마리아와 함께 있으려니 생각을 했던 겁니다.  당시의 유대인 풍습을 알면 우리는 이 말씀을 좀더 쉽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갈 때나 내려 올 때에 여자는 여자들끼리 남자는 남자들끼리 이야기하며 갑니다.  그런데 아이는 엄마 손을 붙들었다가 남자들이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아빠 손을 붙듭니다.  그리고는 조금 가다가 다시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엄마 손을 붙잡습니다.  그러니 내 곁에 없지만 마리아 곁에 있겠거니, 내 곁에 없지만 요셉 곁에 있겠거니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가 안보이네?  엄마한테 있을 거야."  그리고 하룻길을 내려오게 됩니다.  결국 둘 다 예수를 잃은 채 인생 길을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여행을 하는 가운데 한 마을을 지나오게 되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한 집에 교패가 붙어 있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벨을 눌렀습니다.  마침 집을 지키던 새댁이 나왔습니다.  목사님께서 엉뚱한 질문을 남깁니다.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당황했던 이 새댁은 얼떨결에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이 가정은 장로님 가정입니다.  제 남편이 집사이구요.  저도 교회 집사입니다"
"아니, 교회의 직분 말고 이 댁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엉뚱한 질문을 남기고 낯선 길손은 떠나갔습니다.  이 분이 떠나고 난 다음에 새댁의 귓전에 쟁쟁거리는 소리가 남아있습니다.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정말 내 속에 예수님이 계실까?  내 생각 속에 예수님이 계실까?  내 언어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내가 행복해하는 이 심장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내 우선 순위 속에, 가치판단 기준 속에 예수님이 계신가?  진지하게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없이 하루종일 간 것은 헛된 하루였습니다.  예수 없이 가는 만큼 헛수고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니 시간 낭비요, 정력 낭비요, 물질 낭비요, 심령은 근심이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예수 없이 되어지는 것은 그만큼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요, 헛수고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예수님께로 돌아갈 때에만 사는 길이 있습니다.  여기에만 참 평안과 만족이 있습니다.  예수 없이 가는 그 길에서 빨리 돌아서야 합니다.  때가 늦으면 늦을수록 손해입니다.  나중에는 후회를 하고 가슴을 쳐도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 길은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집에다 물건을 놔두고 와도 다시 집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어제 갔던 길이 궁금하면 다시 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 길은 되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연습도 시행착오도 없습니다.  한 번 걸어가는 직선이 있을 뿐입니다.  완전한 일방통행입니다.  인생 길은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리허설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종착점에 섰을 때에 내 곁에 예수가 아니 계시더라.  이렇게 된다면 그의 인생은 정말로 망한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기억하십시오.  오늘의 말씀은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를 안다고 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중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에 우리의 절박한 문제는 잃어버린 예수를 다시 찾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서도 자신이 늘 하나님과 함께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 자신은 하나님과 사이가 좋을 줄로 대부분 착각하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축의금 좀 넉넉하게 드릴 수 있는 관계이면서 말입니다.  축의금은 내가 기분이 좋으면 조금 더 많이 내고, 기분이 나쁘고 마음이 상하면 하지 않거나 조금 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그런 관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정작 자신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이가 좋은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구원과 승리와 성공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이, 거리에 그 구원과 승리와 성공 그리고 축복과 은혜의 명암이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이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하나님을 따라 다니는 어정쩡한 삶을 청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73편 28절에서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저와 여러분에게 축복임을 제발 깨달아서 하나님과 더 가까운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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