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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땅에 사는 하늘 사람 (빌 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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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사는 하늘 사람 (빌립보서 3 : 17 - 21)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장두노미(藏頭露尾)!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랍니다. 감출 장, 머리 두, 드러낼 노, 꼬리 미. 장두노미란 ‘진실을 밝히지 않고 꼭꼭 숨겨두려 하지만 그 실마리는 이미 만천하에 드러나 있다’는 뜻이랍니다. ‘속으로 감추는 것이 많아서 행여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하는 태도’를 빗대는 말이랍니다. 정직하지 못한 우리나라 정치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한편으로는 진실을 말하여도 믿지 않으려는 씁쓸함이기도 합니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지나간 한 해를 접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습니다. 또 한 해를 펼쳐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합니다. 겉과 속이 같고, 시작과 끝이 같고,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같아지는 세상을 소망합니다.

우리는 온전한 자로써 온전해 지려고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목표를 향하여 끝까지 달려가는 운동선수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써 살아갈 수 있는 모범이 있습니까? 우리보다 먼저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 족적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모범은 무엇입니까?

I. 모범

오늘 말씀은 자신이 그렇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도록 보여준 모범입니다. 
     
17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7a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을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면서 다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너는 혼자서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본받다[summimhthv"/쉼미메테스]’는 말은 ‘같이 모방하는 사람’, 즉 함께 따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 사람이 같은 모범을 함께 따르는 것입니다. 
     
1. 함께 모범을 따르십시오.
     
한 인간의 행동은 그가 속한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개성과 집단 심리는 상호 연관성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한 아이가 어느 아이를 따돌리면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서 그 아이를 따돌릴 수 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야 할 곳에 누군가 용감하게(?) 쓰레기를 버리면 다른 사람들은 아무 생각도 없이 따라 쓰레기를 버려 쓰레기장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나쁜 사례입니다.
     
우리는 좋은 모범을 함께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을 보고 다 함께 성경을 읽는 붐을 일으켜야 합니다. 한 사람이 기도하면 다른 사람들도 함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사랑을 실천하면 그것이 입소문이 나서 함께 그 사랑의 행동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좋지 않은 일을 아름아름 따라서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범을 함께 따르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옳은 일을 따르는 것은 고독한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옳은 일을 하는 것은 고독한 일이 아닙니다.
     
17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7b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사도 바울은 간곡히 권면합니다. 자신을 본보기로 삼아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런 사람들을 눈여겨보라는 것입니다. ‘눈여겨보다[skopevw/스코페오]’는 ‘계속하여 자세히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빌립보뿐만 아니라, 에베소에도, 골로새에도, 갈라디아에도 신실하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위해서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또 있었습니다.
     
2. 모범을 따르는 이들을 따르십시오.
     
때때로, 나 밖에 없다는 고독감이 우리를 좌절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은 바르고 정직하게 살고 싶은데 그런 사람이 자신 밖에 세상에 없다는 것을 느끼면 용기를 접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좌절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악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시절에 살았습니다. 이세벨은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혼자만 섬긴 것이 아니라 온 국민에게 바알을 섬기도록 강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은 숨을 죽였고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이 기세를 떨쳤습니다. 이 때 엘리야의 탄식은 ‘나만 남았다’(왕상 19:10)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은 음성은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는 것이었습니다. 나만 남았다고 탄식할 때, 하나님은 일곱도 아니고, 일흔도 아니고, 칠백도 아닌, 칠천이나 남겨두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모범을 함께 따를 뿐만 아니라, 모범을 함께 따르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어려움을 이기고 살아가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교활한 속삭임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향하여 “그렇게 사는 사람은 너 밖에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야! 나보다 훌륭하게 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향하여 “이제 곧 바르게 사는 사람은 사라지고 말 것이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남겨 두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어!”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모범을 따르는 사람이자, 모범을 따르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눈을 하나님께서 밝혀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눈은 세상을 그저 좋게만 보려는 극단적 낙관주의는 아닙니다. 세상에는 좋은 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르지 말아야 할 불량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영혼에도 불량품이 있습니다.


II. 불량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따르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18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8a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바울은 이미 여러 번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눈물을 흘리다[klaivw/클라이오]’는 소리 내어 흐느껴 우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큰소리로 울부짖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복받치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였습니다. 바울을 가슴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 눈물 흘리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끊임없이 하였던 말씀 중에 하나는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는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8)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장을 시작하면서는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 3:1a)고 하였습니다. 

4장에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충만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기쁨과 함께 슬픔도 함께 있었습니다. 도무지 감출 수 없는 커다란 고통이 함께 있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기쁨이, 한편으로는 슬픔이 함께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이들에게도 슬픔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에게 슬픈 일이 있어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를 그토록 가슴 저리도록 아프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18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8b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의 가슴을 저리게 한 것은 건강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통장에 잔고가 얼마나 남았나 하는 경제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자신을 저버리고 떠나가는 배신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하였던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이 그를 한없이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2.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십자가의 복음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의로 똘똘 뭉쳐져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는 십자가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행하여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하면 반도덕주의적 성향이 강한 영지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는 본질적으로 악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더럽게 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하여 온전한 값으로 이미 지불된 십자가를 부족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십자가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지 않으려는 것도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 안 밖에 십자가의 원수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우리의 가슴은 쓰리고 아파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아파해야 합니다.

기쁨의 사람이 그토록 아파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9절 말씀입니다.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바울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을 보면서 슬퍼하였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땅의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멸망이 무엇입니까? 멸망[ajpwvleia/아폴레이아]은 영원히 저주 받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3. 멸망을 향하여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있습니다. 영원한 죽음을 향하여 가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를 질러야 합니다. 

영국의 도덕적 타락에 대하여 윈스턴 처칠 경은 
“대영제국의 도덕이 이렇게까지 문란한 상태가 된 이유는 이 나라에서 천국과 지옥이 더 이상 선포되지 않는데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마가리 아스가 하루는 해골과 대화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해골에게 물었습니다.
“네 속에 머물러 있던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 있습니다.”
     
마가리 아스는 다시 물었습니다.
“네 영혼보다 더 깊은 지옥에 빠진 이는 없느냐?”
“예수님을 반역한 유대인이 더 깊은 지옥에 빠져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는 호기심이 나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 유대인보다 더 깊은 지옥 맨 밑바닥에 떨어져 있는 이도 있는가?”
“있고말고요.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을 알고도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함부로 여긴 교인들입니다.”
     
우리는 함께 모범을 따르는 사람이자, 모범을 따르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혼이 불량품인체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안타까워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자 영원한 멸망에 처해질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눈이 내려도 그 죄를 덮을 수 없고, 아무리 물이 많아도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아파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절망과 함께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절망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고 명백한 사실은 우리에게 절망과 싸울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III. 희망

우리가 어떻게 감히 영원한 죽음으로 빠져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20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0a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힘은 자신이 빛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이 힘입니다. 빌립보에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로마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1.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새해 1월 1일부터, 복수국적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새 국적법이 발효된다고 합니다. 새 국적법은 대한민국 국적 이외에 다른 나라의 국적을 동시에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인 동시에 미국 국민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하고 다른 것은 포기하여야 했습니다. 사회 통합, 국가 경쟁력 강화, 외국 우수인력 유치 등을 위한 조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이중으로 국적을 가진 자였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천국의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천국의 시민권자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천국 시민이 아닌 사람들을 향하여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하늘의 빛에 속한 사람들만이 어두움 속에서도 빛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임을 확신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늘의 시민들인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20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20b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하늘의 시민인 우리는 하늘로 부터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다[ajpekdevcomai/아페크데코마이]’는 말은 열망을 품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고개를 쑥 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2. 우리는 구원자를 기다립니다.
     
여러분은 무엇인가를 정말로 눈이 빠져라 하고 기다려 본적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늘 두 가지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빨리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하고 싶다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사도 바울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바울에게 있었던 마음입니다. 빌립보서 1장에서 자신은 죽는 것도 유익하고 사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빌1:21,22)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소망도 재림에 대한 신앙도 사라지고 현세적인 번영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번영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발목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교회가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천국과 지옥, 재림과 부활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 없이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소금을 먹은 것처럼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희망이 없이는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절망적인 세상에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간절함을 성령님께서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왜 우리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21절 말씀입니다.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차한 몸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변하게 하다[metaschmativzw/메타스케마티조]’는 말은 ‘모양을 변형시키다’는 뜻입니다. 
     
3.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 살아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든, 아니면 죽어서 완전히 썩었든, 또는 화장으로 한 줌의 재가 되어 뿌려졌든 - 모두 마지막 때에 부활의 몸을 입을 것입니다. 우리의 낮은 몸은 이 세상에서 입고 있는 현재의 몸입니다. 죄짓기 쉬운 욕망, 죽음, 질병, 고난 등에 대해 무방비한 상태로 놓여 있는 연약한 육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주 유혹을 당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심각한 잘못에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광의 몸은 영원히 썩지 아니할 몸입니다. 신령한 몸(고전 15:42-44)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입으셨던 몸과 같은 몸을 입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눈물도 없고 아픔도 없고 죽음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부활의 몸을 입는다는 것은 이상한 신앙이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교회의 정통적인 믿음입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장차 온전한 몸을 입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능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도 오는 세상을 바라보면 힘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의 모범을 따르며 불량스러운 영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힘은 영원한 세계에 대한 희망에서 오는 것입니다. 땅에 사는 하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바울이 가졌던 신앙의 모범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멸망으로 향하여 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비록 지금 땅에 살지만 하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권면합니다. 

빌립보서 4:1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우리는 주님을 믿으며 굳세게 살아가야 합니다. 날이 가고 새로운 달이 올수록, 달이 가고 새로운 해가 올수록 예수님 안에서 든든히 서십시오. 우리는 그 날까지 굳건히 서서 버텨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지혜와 용기와 능력을 주셔서 세상을 이기고 영원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굳세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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