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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사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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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사 1:1-9) 
 
 
이사야의 이름은 히브리어 이샤([vy,, 구원하다)와 야후(Why, 여호와)의 합성어로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대로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주제입니다. 구원은 동전의 양면처럼 두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측면과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신원하셔서 모든 상황으로부터 건지시는 측면입니다. 이사야서는 구원의 두 측면을 여러 형식을 통해서 반복합니다. 1장에서 이미 그 주제가 요약되어 나타나는데, 오늘은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원인과 구원의 유일한 원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절은 다음 기회에 자세히 살피도록 하고 2절부터 보겠습니다. 이사야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소환합니다. 그것들은 수천 년이 지나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법칙에 따라 흐트러짐도 없이 잘 운행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양육’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키우고 향상시켰다’는 두 단어의 번역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특별한 양육 대상이며 존귀하게 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거역”은 반역을 의미하는 정치적 용어인데, 법적인 관계를 깨뜨리고 달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과의 관계를 끊고 달아난 것이 모든 고난의 출발점이라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을 말합니다. 죄란 하나님께 대한 거역, 곧 왕이신 그분에 대한 반역입니다. 그분께 등 돌리고, 그분으로부터 달아나서, 그분과 상관없는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구체적인 범죄 행위들은 이 죄의 결과일 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죄를 심판의 원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 하십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고통 없는 낙원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순종하면 더욱 향상된 세상이 준비되어 있었지요. 세상은 현재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나은 세상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면서부터 세상은 끔찍하게 바뀌었습니다.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고통과 슬픔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당신님의 백성으로 구별하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방적인 하나님은 은혜로 다시금 존귀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마저도 거역했습니다. 

흔히 미련한 짐승이라 말해지는 소나 나귀도 “임자를 알고”, 그들을 먹이는 “주인의 구유”를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거역한 백성은 주인을 “알지 못하고” 그분께서 먹이시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3). 죄는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참으로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하게 만듭니다. 인생의 주인이 자기인 것처럼, 늘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게 만듭지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대신 썩어질 양식을 위해 아침부터 밤늦도록 수고하게 합니다(요 6:27). 즉,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존귀한 존재로 향상시켜주기는커녕 염려 없이 살아가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퇴보시켜버리는 것이지요.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사리분별을 스스로 못하는 덜된 인간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믿지 않는 그들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들을 물어보십시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바보들입니다. 단지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기를 반복하지요. 짐승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염려하지 않고 살아가는 짐승만도 못한 삶이 되지요.

하나님을 ‘주님’으로 부르지만 실제로는 자기가 삶의 주인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양을 취하지만 마음 깊이 믿지는 않지요. 그들은 말씀대로 행하는 참 하나님 백성을 고지식한 멍청이로 여깁니다. 신앙생활을 종교적인 활동에 힘쓰는 정도로 생각하지요. 성실하게 종교 활동을 하고 있으면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예배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 등 돌리고 그분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주인이심과 매일의 삶을 채워주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짐승보다 못한 것이라고 평가하십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는 그분께 대한 무지와 어리석음을 낳은 후에 나아가 구체적인 범죄들을 낳습니다. 4절은 하나님께로부터 달아난 인생들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이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출 19:6). 그런데 임자와 주인의 구유를 알지 못하는 그들은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으로 전락했습니다. “거룩한 씨”(6:13)로 기대되었던 자들이 “행악의 종자”가 되었고, 여호와께서 양육한 자식이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하나님을 거역한 이후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했고, 가인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창 3:8; 4:16). 성경을 읽어보면 죄인이 힘썼던 일은 항상 여호와를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볼 수 있듯이 죄인은 아버지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하고 할 수만 있으면 그분을 피해 멀리 달아나려 합니다. 그 결과 더 나은 삶이 됩니까? 아닙니다. 아담은 낙원을 잃었고, 가인의 후손은 노아 홍수 때 다 멸망했습니다. 탕자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지요. 죄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즐겁지 않도록 만듭니다. 죄는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피해 멀리하도록 만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멀어질수록 인간의 삶은 점점 거룩함과는 멀어진 모습을 낳게 되어있습니다.

죄가 가져온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5-6). 머리부터 발바닥까지라는 표현은 사회적으로는 왕으로부터 백성까지를 뜻하며, 개인적으로는 전인을 뜻합니다. 아무튼 죄로 인해 맞을 때가 없을 만큼 하나님의 매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여러 모양으로 깨지고 터지고, 깨진 곳이 또 깨지고 터진 곳이 또 터지고, 양심의 가책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고, 봉변을 당하고 수치를 겪었어도 죄인은 죄를 중단하지 못합니다. 죄로부터 돌아서지도 못합니다. 그것이 인간을 사로잡는 죄의 세력입니다.

죄가 사로잡은 결국이 어떠한 모습입니까?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7-8).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내 뜻대로 살면 더 나은 상태가 될 것처럼 유혹하는 일이 아담 때부터 써먹어온 죄의 수법입니다. 하지만 죄는 철저한 파괴, 황무함, 비참함, 수치만 남겨놓습니다. 열정적으로 산 것 같아도,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아도, 계산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죽도록 고생하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뼈 빠지도록 바쁘게 수고만 했지 남는 게 없습니다. 마음과 정신만 황폐해집니다.

올해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지난 한 해를 돌아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빴는지는 모르겠는데 한 해가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았으니 신앙생활을 제대로 했다면 첫 예배를 드릴 때보다 조금이나마 더 하나님과 가까워졌겠지요. 우리의 아이들도 좀 더 하나님과 가까워졌겠지요. 우리의 모습이 좀 더 제사장 나라답고 좀 더 거룩한 백성으로 향상되었겠지요. 참으로 여호와께서 양육하신 자녀답게 이 시대에 거룩한 씨로 남았겠지요. ……. 대답에 자신이 없어집니다. 오히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만 같습니다.

돌아보면 정말 바쁘다고 생각했을 때도 드라마 볼 시간은 있었습니다. 시간을 내서라도 영화는 보았고 스포츠를 즐겼습니다.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틈틈이 죄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지만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인지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삶의 이면에 있는 ‘마음의 멀어짐’ 현상에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분께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가 중요하지요. 바쁘다는 것은 핑계였고 사실은 마음이 멀어졌기에 말씀 읽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 아닌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9).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대한 이런 표현은 한국 기독교 총회를 멸망할 집단이라고 성토하는 것보다 더 심합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복음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도 여호와께서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다 망했어야 할 만큼 부패했다고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성서계명교회도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징계 속에서도 깨끗하게 중단하지 않고 금세 반복하는 죄들로 인해 아주 없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인 은혜로 우리는 남겨 두셨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수많은 죄와 허물 속에서도 조금 남겨 두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살아 왔음을 고백합니다. 죄들과 허물에 대해서도 회개해야 하겠지만 구체적인 범죄들보다 더 훨씬 더 중대하고 심각하게 회개해야 할 문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마음의 태도임을 명심해야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등 돌린 채 열심히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언제나 인간이 겪는 모든 비참함의 원인임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슬프지만 하나님의 남겨 두심 속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오직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 1:8)는 말씀에 희망을 두고,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새 해를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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