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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가 능히 도우신다! (히 2: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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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능히 도우신다!  (히 2:17-18)

 
며칠 전 신문에서 읽은 기사의 제목입니다.
"56년 전 고학생 도와 준 걸인 소년 찾습니다."
그 기사의 간추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근 7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한 노인이 "50여년 전 고학생으로 어렵게 일하며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걸인 소년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뒤늦게나마 은혜를 갚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100만원을 신문사로 보내왔습니다.

노인은 자신이 대학 2학년이던 1954년 6월 하순 서울 신신백화점 신축 공사 현장 인근에서 노동판 일감을 찾기 위해 전전하다 숙소로 돌아가려는 순간 수중에 6환밖에 없어 7환이던 전차표를 사지 못해 쩔쩔맸다고 했습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차에 거리에서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로 구걸하던 5~6세가량의 어린 걸인이 다가와 1환을 건네 줬다고 했습니다. 그는 멋쩍었지만 이를 받아서 전차표를 샀다는 사연입니다.

"바로 전차가 들어와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차에 올랐고 이후 56년이 훌쩍 흘렀지만, 당시 도움을 준 그 소년이 늘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면서 "하지만 이후 많은 식솔을 부양하느라 정신없이 살아왔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고 이름도 몰라 찾기 어렵겠지만 늦게나마 그 소년을 찾아 은혜를 꼭 갚고 싶다."는 애절한 뜻을 전했습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넉넉한 사람들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특히 기사를 읽으면서 누가복음 21장에 기록되어 있는 가난한 과부가 가지고 있던 두 렙돈, 즉 생활비 전부를 헌금한 것을 보시고 주님이 칭찬하셨던 것도 생각이 났습니다. 나이 어린 거지가 고학생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에 대해서 오늘 우리도 뭔가 느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는 누가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지 분명히 알 수 없는 편지입니다.
때문에 이 편지를 쓴 동기나 목적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는 이 편지를 받는 초대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킬 것과 닥치는 모든 어려운 시험에 대해서 끝까지 싸워 이길 것을 권면하려고 한 것만은 분명하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 편지는 역사 속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성도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또한 온갖 불의와 불법과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 가운데서 절망하기 쉬운 오늘 우리에게도 힘과 용기와 소망을 주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일에 신실한 대제사장이셨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7)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일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에 대한 정의가 분명치 못할 것 같으면 주님의 몸된 교회도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 하반절)
뚜렷한 목표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올바른 목표가 아닐 것 같으면 교회는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삶의 목적은 오직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공포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심한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무거운 죄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시려고 주님은 친히 모든 것을 바치셨습니다. 그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란 사람들을 구원하여 다시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까? 과연 하나님의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아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기는 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의 더러운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바른 길에서 벗어났을 것 같으면 더 늦기 전에 주님의 삶을 기준으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조정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일에 자비로운 대제사장이셨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 대해서 자비로우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주로 어떤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까? 주님은 주로 소외된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에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아픔을 불쌍하게 여기시는 자비로운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 저녁 시간에 정신이 약간 불안정하게 보이는 청년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 날은 청년부 헌신 예배를 드리는 날이기 때문에 모두들 예배를 준비하느라고 분주했습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찬양을 하는 중에 그 청년이 진행자를 불렀습니다. 진행자는 바쁘니 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댄싱 팀이 공연하는데 그 청년이 또 다시 진행자를 불러서 자기도 나가서 함께 춤을 추고 싶다고 했습니다. 진행자가 좋은 말로 다음에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난 후 그 청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과연 몸과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회인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특히 사회적 약자, 소외되고 버림받아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좀 더 민감해야 합니다.
물론 정부나 지방 자치 단체들이 시행하는 복지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도가 미처 돌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로 교회가 찾아가서 위로하고 격려해야 할 대상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자비와 긍휼의 태도를 속히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은 사람들과 함께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친히 경험하셨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아픔들이 있습니다.
외국인 근로자들이 겪는 서러움과 아픔이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여성들과 아동들이 가정에서, 또 일터에서 학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추운 겨울이 되면 노숙자 문제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년 실업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도 우리가 품고 가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런 문제들을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돈이 많기 때문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승리의 주님이 함께하사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을 친히 겪으신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주님이 분명히 선언하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하반절)

다사다난했던 경인년 한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지난 일 년을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정말 많은 복을 주신 한 해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뱅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종합 5위를 기록했습니다. 김연아 선수도 온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금메달을 목에 걸지 않았습니까? 축구도 월드컵 원정 경기 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했습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도 아주 좋은 성과를 올렸습니다. 또한 G20 정상회의도 성공적으로 치르지 않았습니까? 다른 나라의 원조를 받던 나라가 이렇게 빨리 다른 나라를 원조하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은 아마 전 세계적으로 우리가 유일한 경우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해 보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들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천안함이 침몰하고 꽃다운 병사들과 구조에 나섰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북한군의 연평도 기습 포격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공포로 떨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인기 연예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원정 도박으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인기 탤런트와 개그맨이 마약을 투약했다가 구속되지 않았습니까? 반인륜적인 범죄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으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마비된 채 제멋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것이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어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믿는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친히 고난을 당하셨고 또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 옛날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했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비록 이 세상은 어둡고 캄캄하지만 참 빛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마침내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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