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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산을 잘 합시다 (행 20: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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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산을 잘 합시다 (행 20:17-23)


벌써 금년 한해의 마지막 주일,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분수령에 서서 각자가 느끼는 것도 다양할 것이고, 또 생각하는 것도 많은 차이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특별히 여러분 각자가 처한 형편이 어떤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집니다. 건강하고 형통한 사람은 밝은 눈으로 새해를 기다리고 묵은 해를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병들고 실패하고 좌절감에 빠져 있는 분들은 세월이 흐르는 것이 더없이 처량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또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해서 많은 걱정들이 쏟아져 들어오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밀레도에서 바울이 장로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이 시기는 바울이 순교하기 한 10년 전쯤 기록을 하지 않았나 추측을 합니다. 그 당시 바울의 나이는 이미 60대에 접어 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예수를 처음 믿은 이후로 그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서 소아시아를 누비며 많은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중요한 도시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또 아주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세계 역사가 되도록 자리 매김 하는데 있어서 영웅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이 되었고, 또 서구 문화를 놓고 볼 때 문명의 물꼬를 바꾸어 놓았다고 할 만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있는 이상 영원히 그 이름을 기억해야 될 아주 대단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 누구나 자기의 화려한 업적에 도취되고 만족해서 이제 좀 템포를 늦추고 적당히 살자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이만하면 됐다. 좀 천천히 가자. 여유를 갖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무슨 말입니까? 그는 사명을 위해 한 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복음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그는 지금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 남들이 말리고 심지어 성령께서도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결박과 환난이’ 있음을 알려주는데도 바울은 죽으로 그 길을 갑니다. 바울은 비록 장래의 일이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성령의 이끄심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를 자신의 죄 때문에, 특히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맹렬히 핍박한 그 죄를 생각하면, 벌써 죽었어야 할 몸이지만 하나님의 그 말로 다 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은혜로 아직까지 살아있으며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위대한 선교사역을 행할 수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더 바랄 것, 아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 귀한 것은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뿐이었습니다. 그의 생명조차도 그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말 앞에서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비쳐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해마다 한해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를 발표하는 교수 신문이 있습니다.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에 ‘장두노미'(藏頭露尾)가 선정됐습니다. `장두노미'(감출 장, 머리 두, 드러낼 노, 꼬리 미)란 머리는 숨겼지만 꼬리는 숨기지 못하고 드러낸 모습을 뜻하는 말입니다. 쫓기던 타조가 머리를 덤불 속에 처박고서 꼬리는 미처 숨기지 못한 채 쩔쩔매는 모습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이는 진실을 밝히지 않고 꼭꼭 숨겨두려 하지만 그 실마리는 이미 만천하에 드러나 있다는 뜻과 또 하나는 속으로 감추는 것이 많아서 행여 들통날까봐 전전긍긍하는 태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우리의 일생을 결산하는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 역시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우리에게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이 내 인생을 마친다면 어떻하시겠습니까? 오늘 바울사도의 결산보고를 통하여 우리의 지난 삶과 비교해 보면서 함께 은혜 받고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결단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1. 희생의 사역입니다. 

모든 위대한 꿈, 위대한 소명은 희생 없이 성취된 것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도 그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 희생의 값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본문 19절 시작에 그는 자신의 희생의 경험을 한마디로 ‘모든 겸손과 눈물’이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의 소명을 위해 또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눈물을 흘려야 했던 것입니다. 희생 중에 희생은 자신의 자존심조차 포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래 종이라는 단어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갈5:1에서 “그리스도께서-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가르친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 사도가 고후4:5에서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너희들의 종노릇을 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이 각오 없이 복음의 소명을 성취하기는 어렵습니다.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사도는 다른 사람보다 못하거나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랑할 것과 내세울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민 히브리민족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대접받는 베냐민지파였습니다. 그는 철학의 도시 다소에서 출생했고, 당시 가장 유명한 학자 가말리엘의 수제자였습니다. 교파 중에서도 당시 가장 정통파 바리세파 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진 자였습니다. 귀족 중의 귀족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죄인 중에 괴수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삶은 교만한 삶입니다. 

우리가 배웠으면 얼마나 배웠으며,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습니까? 알면 얼마나 압니까? 그런데 혹시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하게 살지는 않았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 교만한 자는 물리치십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말할 수 없는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독사에 물리기도 하고, 배가 파선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춥고 배고프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참고 인내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고난과 희생을 당할 때 그것이 일회성의 고난이나 희생이라면 한번만 꾹 참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정말 힘든 것은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난에 직면하는 일입니다. 일찍 산 순교자였던 안이숙 여사가 옥증에서 먼저 순교하러 형장으로 나가는 분들에게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죄송하다고 하자 그들은 그녀에게 오히려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우린 죽으면 그만 영광에 들어가겠지만 자네는 살아서 고난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우린 걱정 말고 부디 자네 자신을 위해 기도를 쉬지 말게나.” 바울이 본문에서 회상하는 에베소 사역의 고백을 다시 기억해 보십시오. 19절을 다시 읽어 보면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는 실로 오래 참음으로 사역을 감당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다만 하나 영혼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3장 4절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인내했습니까? 죄 짓는데 더 빠르고, 참지 못하고 타협하고, 주님을 멀리하며 살지는 않았습니까? 이 해를 보내면서 한 번 지난날을 회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이중생활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신자처럼 살지만 밖에만 나가면 죄인과 똑같이 사는 우리 모습이 얼마나 초라합니까? 

2. 성령에 이끌려 살았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생각, 자기 철학, 자기 기분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다릅니다. 자기 욕심대로나 자기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령의 지시에 따라 살았습니다. 여기 2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여기 보면 “심령에 매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심령은 성령을 이야기하고 “매여”라는 말은 원어로는 “데데메노스”라는 말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성령에 묶여 있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묶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메섹을 향해 갔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오히려 자기가 성령께 묶였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계속 성령께 묶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계속 주님을 사랑하며 살고자 하면 성령에 매임을 받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내 기분대로 내 감정대로 주님을 사랑하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조금만 상황이 변해도 달라집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에 기복이 심하게 됩니다. 

때로는 주의 사랑을 잃어버리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그러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동안 곳곳에서 결박당할 일들과 고통 겪을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어디를 가든지 핍박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고, 성령에 붙들려 사는 바울인데 어떻게 가는 곳마다 핍박이 끊이질 않습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복음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마귀의 끊임없는 방해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생명까지 위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예수를 믿고 그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정말 기쁨으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옵니다. 자꾸 문제가 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생활의 적극적이 삶을 살지 못하고 적당히 주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이런 핍박이 온다면 여러분, 그래도 예수를 의지하고 따르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예수를 믿으면 잘 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이렇게 된다면야 누가 믿겠습니까? 

바울 역시 그의 이력서를 보면 고난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믿고 나서 그는 그 때부터 순교의 자리에 설 때까지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됩니다. 예수 믿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겼습니다. 이처럼 위협과 핍박이 저들 앞에 놓여 있는 불안함이 그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지금 바울은 밀레도에 있습니다. 예루살렘까지는 우선 배를 여러 차례 갈아타고 가이사랴까지 가야합니다. 가는 동안 여러 항구를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육로로 또 여러 도시를 거쳐서 올라가야 합니다. 여행 자체만도 이미 60이 넘은 노년기의 바울로서는 힘겨웠을 것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겁이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편안한 잠자리와 좋은 음식들 그리고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위안을 삼고 용기를 내 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정 반대입니다. 때로 옥에 갇힐 것이랍니다. 극심한 고통을 겪을 것이랍니다. 여행 자체도 겁이 나는 일인데 결박과 고통이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헌신했다 할찌라도 주변의 만류가 있고 그 길이 죽을 수도 있는 길이라면 누가 선뜻 길을 나서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비록 장래의 일이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성령의 이끄심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말 앞에서 우리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비쳐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성령의 이끄심에 기꺼이 순종하고 있는가? 우리는 안전한 것이나 확실한 것만을 좇고, 불확실한 것이나 위험한 것은 피하는 데에 지나치게 익숙한 것은 아닌가? 우리는 너무나 우리의 생명을 우리만을 위해 아끼고 있지는 않는가? 아들을 희생시키시면서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쉽게 잊고 지내지는 않는가? 그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 앞에서 내 생명은 물론이고 너무나 많은 것을 아끼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시간을 너무나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물질을 너무나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관심을 너무나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체력을 너무나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정성을 너무나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즐거움을 너무나 아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삶의 귀한 것들의 목록에서 제일 끝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사도 바울에게서는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동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를 위해 달려갈 길을 온전히 달려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그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만이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그가 은혜로 얻은 새 생명을 가치 있게 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고 사는 문제는 그에게는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서도 그러한 뜻과 삶을 보시기를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제 한해가 저무는대도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바울처럼 예수 믿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란 내 삶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삶의 주인이 바꾸어졌는데 어떻게 인생이 바꾸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회심의 진정성을 의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회심은 우리의 인생관과 세계관의 변화를 초래할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옛날 방법, 옛날 모습 그대로 삶의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예수를 믿고 거듭난 바로 그 한 순간 나의 신분이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전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의미 있는 변화의 시작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헨리 C.모리슨이라는 아프리카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영적인 불모지와 같은 아프리카에서 선교 사역을 하는 동안 건강을 잃고 가족을 잃기도 하고 이젠 늙은 선교사가 되어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타고 돌아오던 배에는 아프리카의 한 국가를 방문 후 코끼리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데오도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뉴욕 항구로 입항하고 대통령이 내리자, 붉은 레드 카펫이 깔리고 군악대의 팡파레 소리로 대통령을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일행이 항구를 빠져 나간후 모리슨 선교사가 항구의 출구로 나서자 레드 카펫도 없었고 군악대의 팡파레 소리도 멎은 후였고 그를 마중 나온 사람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교사는 저녁 노을 진 하늘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답니다. “주님, 이것이 40년간 아프리카에서 저의 청춘을, 저의 건강을, 그리고 저의 일생을 바친 결과란 말입니까?” 그때 그는 저녁 노을 사이로 말씀하시는 조용한 한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헨리야,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단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레드 카펫이 아닌 황금의 유리길로 군악대가 아닌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내가 너를 마중 나오마”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 고향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약속의 말씀을 바라보고 나에게 맡겨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의 길을 가야하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과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입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에 인생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도, 부도, 명성도, 성공도, 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설령 내가 그것을 누렸다 할찌라도 바닷물을 들이키듯 갈증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 주님입니다. 젊음은 지나갑니다. 명예도 지나갑니다. 인간적인 야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주 앞에 마지막에 순결하게 서기 위해,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으로 주 앞에서는 놓칠 수 없는 마지막 영광을 위해 세상 적인 잣대를 포기하는 자, 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오늘 2010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를 결산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아직 인생의 중간 결산인 게 다행입니다. 아직 기회가 남아 있기에 감사합니다. 바울은 한번 뿐인 인생을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과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저와 여러분도 남은 인생 여정 가운데 가장 소중한 믿음 지키고, 주어진 사명 충성스럽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천국영생과 상급을 확신하면서 당당히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광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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