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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성탄이 기쁜 이유 (눅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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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탄이 기쁜 이유 (눅 2:8-14)

   
지난 주일인 성탄주일에 “기쁨의 성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기쁘게 맞아야 한다는 취지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나심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기뻐해야 하는지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성탄절인 오늘은 예수 성탄이 기쁜 이유에 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일이 왜 우리에게 기쁜 일인가에 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10-1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일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기 예수의 탄생은 모든 인간들이 다 기뻐해야 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고등부 교사들과 함께 잠시 일본 기독교 순교지 탐방을 하고 왔습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12월 23일이 공휴일이라는 점입니다. 알고 보니 이 날이 천황 생일이기 때문에 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월 25일 오늘 성탄절은 공휴일이 아닙니다. 아기 예수 나신 날은 출근해서 일한다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아기 예수 탄생보다 천황 탄생이 더 기쁘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성탄절이 공휴일입니다. 일본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성탄절을 공휴일로 정해도 왜 이날 쉬는지 그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정말 기뻐하며 이 성탄절을 보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 나신 사건이 인류에게 가장 기쁜 사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인간들은 이 사건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몰라서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이 도대체 무슨 사건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 탄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아기 예수 탄생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요일 4:9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기 예수의 성탄은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분명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요 3:16-7절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요한이 믿음의 눈을 열고 볼 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여러 가지 하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인간 구원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일들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제사 제도를 세우셔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셔서 하신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신 사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기 예수의 성탄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성탄 사건은 그 무엇보다도 기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 해 전 아끼는 후배의 장례식을 다녀왔습니다. 제 모교회 후배인데 제가 교사로 말씀을 가르쳤던 제자이기도 했고, 자라서는 함께 교회 봉사를 같이 했던 정말 동료이기도 했습니다. 한결 같이 교회에서 큰 기둥처럼 봉사해 오던 신실한 주의 일군이었습니다.

그해 여름 가까운 친척들과 자기 가족과 함께 휴가를 갔습니다.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고 어른들은 강가에서 담소를 하며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들과 조카들이 물에 빠져 급류에 휩쓸리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이 후배는 물로 뛰어들어 아이들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카 둘을 구해 내고 자기 아들을 구해 내고 그리고는 힘이 빠져서 물에서 나오지를 못해서 익사하고 말았습니니다.

문상을 가서 가족들을 위로했습니다. 아빠 때문에 살아난 아들이 정말 서럽게 울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그 뜨거운 사랑을 온 몸으로 체험한 그 아들이 정말 뜨겁게 울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 아이는 평소에 아빠에게 야단도 많이 맞고, 신앙생활 잘하라고 엄격하게 가정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아빠에게 불만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빠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입니다. 아빠의 그 큰사랑을 깨닫고 정말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후배가 물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되게 했던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아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가 죽어가면서도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아이들을 건져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야만 했을까요?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죽게 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보내시지 않을 수 없으셨습니다.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외아들을 아낌없이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제 후배의 아들이 아빠의 그 큰사랑을 깨닫고 통곡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 큰사랑을 깨닫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사랑하는 여러분! 이 찬양을 가슴으로 뜨겁게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성탄절을 정말 기쁘게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구원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사람 가운데 파울 틸리히(Paul Tillich)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책 가운데 신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 도서 가운데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폴 틸리히는 모든 인간들에게는 다양한 관심이 있지만 그 중에 궁극적인 관심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 그 깊은 내면에는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궁극적인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여러 가지 관심이 있습니다. 출세하고 성공하고자 하는 관심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사랑 받고자 하는 관심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관심이 있습니다. 명예를 얻고 인기를 얻고 이름을 남기고 싶은 관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저 너머 또 다른 관심이 있습니다. 다른 관심이 다 채워지고 해결돼도 여전히 해결되어야만 하는 관심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관심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관심입니다. 이것이 궁극적 관심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 인간은 이 궁극적 관심을 해결할 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길을 찾기 위해 어떤 이는 벽을 바라보고 9년 간 면벽 수도를 했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한 평생 고행을 하며 지냅니다. 어떤 이들은 금욕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선행을 해 봅니다. 그렇지만 길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은 있어도 진정 그 길을 찾은 사람들은 없습니다.

오래 전에 등산하다가 황당한 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정상으로 오르는 길을 향해 오르고 있는데 갑자기 길 한 복판에 팻말이 붙어있는 것입니다. “길이 없습니다. 막혔습니다.” 아마도 안식년제로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막아 놓은 것 같았습니다.

길이 있는 줄 알고 올랐는데 정상을 눈 앞에 두고 길이 없어서 오를 수가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돌아내려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이 있는 줄 알고 나섭니다. 그런데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뼈아픈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 14:6에서 우리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즉 주님께서 우리 인간이 찾는 그 궁극적 관심을 해결할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만나면 그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14일 오전 6시 “꿈의 바닷길”이라 불리는 거가대교가 개통됐습니다. 부산 강서구 천성동 가덕도와 경남 거제시 장목면 유호리 사이 8.2km 구간에 거가대교라는 새로운 길이 놓이 것입니다. 이 길은 해저침매터널과 사장교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최첨단 토목기술이 집약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길입니다.

이 길이 열리면서 부산 거제가 거리가 140㎞에서 60㎞로 단축되고, 통행시간도 2시간10분에서 50분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물류비용이 크게 절감될 뿐 아니라 경남지역의 경제, 문화, 생활 전반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될 전망입니다. 

그렇습니다. 길이 있어야 합니다. 길이 열려야 합니다. 길이 열리면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행복한 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탄 사건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 사건입니다. 도무지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없었습니다. 마치 저 북한 때문에 서울서 만주로 서울서 저 시베리아로 갈 길이 막힌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 오셔서 그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을 풀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셋째, 보질 것 없는 내게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눅 1:46 이하를 보면 소위 마리아의 찬가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47-8을 보면 마리아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마리아는 나 같이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성탄의 귀한 도구로 써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총을 생각하면서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보내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 예루살렘이 아닌 정말 보잘 것 없는 작은 고을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것도 여관도 아닌 마구간이었습니다. 짚을 깔고 말의 밥통인 구유 위에 누이셨습니다. 만왕의 왕이 왜 이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까요?

이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의 왕족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도 있었습니다. 가장 경건한 체 했던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천사가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준 사람이 바로 들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경건한 일과는 관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저 성실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무거운 삶의 무게에 눌려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런 목동들에게 이 기쁜 소식이 제일 먼저 알려졌을 까요?

예수 탄생을 알고 스스로 찾아와 경배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경 박사들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구주가 나실 것이 예언되어있다는 사실도 저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구세주 탄생을 알지 못했습니다. 

뜻 밖에 이 사실을 깨닫고 경배하러 온 사람들은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이들은 율법도 몰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줄도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철저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을 별을 통해 알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내셔서 아기 예수 탄생을 경배하게 하셨을까요?

이 일련의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마리아의 고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번 짧은 일본여행을 통해 일본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우리를 안내해 준 나나에 자매에게 물었습니다. “왜 일본사람들이 한국 드라마에 그렇게 열광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일본사람들에게 없는 아주 특별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情)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부모 자식 사이에도 그저 친구의 우정 정도 수준의 관계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를 그리워하거나 자식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답니다. 여러 해 동안 자식이 부모를 찾지 않는 경우도 흔하고 노부모가 굶고 병들어도 돌아보지 않는 일이 다반사라는 것입니다. 부부도 대부분 각방을 쓰고 서로 애틋한 정을 나누는 일도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한국 드라마에 나타나는 연인 사이의 정, 가족들 간의 깊은 정을 보고는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이 나나에 자매가 제가 마중 나온 장미영 선생을 허그해 주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라했습니다. 자기 일본인들은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허그하는 일이 없고 심지어 악수도 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면서 이 자매를 축복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을 일본어로 불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자매를 허그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자매가 난생처음 허그를 받아보아서인지 제 품에서 얼마나 우는지... 이 자매는 그 누구에겐가 특별한 관심을 처음 느껴본 것입니다. 그리고 따뜻한 사랑을 처음 받아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성탄절은 정말 기쁜 성탄절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진정 성탄의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과 이 온 누리에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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