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랑의 줄에 매여 삽시다 (호 11:1-12)

첨부 1


사랑의 줄에 매여 삽시다.
호세아 11장 1-12절


호세아서는 크게 세 단원으로 구분되어 집니다. 첫째는 1장에서 3장까지로「호세아 선지자가 겪었던 가정의 비극적 사건」이요, 둘째는 4장에서 10장까지로「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의 현장에 대한 고발」입니다. 그리고 11장에서 14장까지는「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될 수 있었던 것, 타락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하나님의 사랑」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 어떻게 간섭하시는가를 11장에서부터 일종의 역사적 서술 방법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11장부터는 특별히 과거형 동사들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절에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하는 말씀 가운데「사랑하다」와「불러내다」라는 단어가 모두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3절에 보면『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하는 말씀 중에「가르치다」라는 말이 과거형으로 등장합니다. 
4절에도『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라는 말씀 중에「이끌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사랑하다」,「불러내다」,「가르치다」,「이끌다」와 같은 동사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어떻게 간섭하셔서 이 민족으로 하여금 여기까지 오게 하셨는가를 잘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치고 가르치사 여기까지 이끌고 오셨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본래 어디에서 출발했으며, 지금어디에 서있는지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은총의 과거가 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어렸을 때』는『젖먹이 때』를 말하는 것으로「무경험」 혹은「무능력」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애굽에 살고 있던 히브리인 부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의 영아 살해령이 내려져 있던 때라 이를 피하여 3개월 동안 숨겨 기르다가 결국은 나일강에 버렸습니다. 3개월 된 영아는 자기 힘으로는 자기를 구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의 딸을 그때 나일강에 보내 그 영아를 건져내게 하셨습니다. 그가 곧「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쓰시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부르시고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사사기 13장에 보면 블레셋의 잦은 침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해「삼손」을 택하셨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성별되어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어렸을 때부터 택하시고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로 낳은「사무엘」을 어렸을 때부터 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전에서 자랐고,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철없고 힘없고 분별력이 없을 때부터『선택』하여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리고 무능할 때에 사랑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보호 능력이 없는 아기를 더 사랑하는 부모의 심정과도 같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불러 내셨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에 의해 맺어진 부자 관계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자가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430년간 종 되어 살던 하나님의 아들을 모세를 통해 불러내셨습니다. 이유는 사랑하는 아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구속받은 백성들을 애굽 같은 세상에서 불러내어 영원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서 잠시 우리들의 과거를 돌이켜 봅시다. 내가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내셨습니까? 죄의 길을 거닐고 있을 때, 낙심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병고로 신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를 불러내셨습니다. 그것은 곧 나의 출애굽인 셈입니다. 은총의 과거입니다. 이 은총이 없었더라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없었습니다. 천국도, 영생도 없었습니다.

복음송『세상에서 방황할 때』
1.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2. 많은 사람 찾아와서 나의 친구가 되어도 병든몸과 상한마음 위로 받지 못했다오.
3. 이 죄인의 애통함을 예수께서 드으셨네 못자욱난 사랑의 손 나를 어루 만지셨네.
4. 내 모든죄 무거운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함께 계신다오.


󰊲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재 반역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부를수록 점점 멀리했습니다. 바알들을 섬기고 우상앞에 분향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를수록 멀리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를수록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역입니다.

배신은 누가합니까? 은혜를 입고 사랑을 입은 사람이 배신합니다. 은혜도 없고 사랑도 없었다면 배신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입고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혹시나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지 않나 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목회에서나 사업에서나 친구지간이나 누구든지 배신할 경우에는,
① 내가 은혜를 베풀고 도와주었는데 그가 배신했다는 것입니다.
② 도저히 생각지 못한 시람이 배신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믿는 사람이 배신합니다.
③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이 배신합니다.

로마의 시저가 부르트스에게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때 시저의 마지막 말이 있습니다. 「오 부르트스!  네가!  네가!  네가!」이것이 시저의 마지막 말입니다. 부르트스는 시저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릇된 결심을 했습니다.

첫째, 갈 수 없는 애굽으로 다시 가겠다는 결심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할 당시부터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1절에 보면 그들은 홍해 앞에서『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라고 하며 모세에게 항의했고, 이어 12절에서는『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뜻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3절을 보면 그들은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이르러『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여기서 주려 죽게 한다고 원망했습니다. 

또 민수기 11장 4-9절에서는 매일 만나만 준다면서 정력이 쇠약해가니 고기도 먹고 싶다고 투정했습니다. 
14장에 보면 바란 광야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포함, 가나안에 밀파되었던 12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백성들은 원망했습니다.『애굽 땅에서……죽었더면 좋았을 것을』(2절).『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라』(3절)고 했습니다.

16장 13절에서는 고라의 반역에 동조한 다단과 아비람이『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한다』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20장 5절에 보면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는 파종할 곳도, 무화과도, 석류도 마실 물도 없는 곳으로 인도했다면서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21장에서는 에돔땅 통과시『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5절)라고 하며 애굽에서 인도하여 여기서 죽게 한다고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마다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31장 3절에 보면『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려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고 했습니다. 
애굽은 갈 수도 없고, 가서도 안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끌어 내신 것인데 그들은 다시 가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애굽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결심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물러나 애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셋째,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본문 5절은 앗수르 사람이 왕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즉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싫어서 그 왕국으로부터 탈출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부터 사탄의 왕국으로 이민 가서 그의 통치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단의 통치는 권모 술수와 포악에 의한 통치입니다. 

어느 통치를 받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왕국 통치를 벗어나면 사탄의 왕국 통치를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왕국 통치와 사탄의 통치 그 중간지점은 없습니다. 
사탄의 통치를 받으면 어떻습니까? 사탄의 통치는 심히 사납습니다. 주님께서 가다라지방에서 귀신들린 자 둘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덤 사이에 있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이 사람들이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마 8:28)고 했습니다. 또 주님께서 거라사지방에 이르매 귀신들린 사람이 나왔는데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막 5:1-9). 

주님께서『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군대』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군대 귀신이 들렸습니다. 군대 귀신이 그 사람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쇠사슬로 묶어 놔도 끊어 버립니다. 귀신의 세계는 더럽다고 했습니다. 귀신의 통치를 받으면 영적으로 더럽습니다. 도덕적으로도 추하여 집니다. 자기를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9장 18절에 보면 귀신 들린 아이를 아비가 데리고 왔는데『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하여 가는지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통치를 받으면 거꾸러집니다. 분한 마음이 생깁니다. 이를 가는 것은 분한 것의 표현입니다. 파리하여 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면 사탄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사탄의 통치는 난폭하고, 더럽고, 일이 안되니 분하고 거꾸러집니다. 이에 비해서 하나님의 통치는 자비와 사랑과 인자가 풍성합니다. 거룩하고 깨끗합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일이 형통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회복의 미래가 있습니다.

본문 3-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관용입니다. 

첫째,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셨습니다.
한걸음씩 바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리니까 걸음마부터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즉 이것은 어렸을 때부터 자상한 보살핌과 사랑을 베풀었음을 뜻합니다.

둘째, 팔로 안아 주셨습니다.
신명기 1장 31절을 보면『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전한 보호자이시며 안내자이십니다. 그래서 눈동자같이, 적자같이 보호하시고 지키십니다.

아이들 몇이 호기심에 끌려 숲 속 깊이 들어갔다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무서워진 아이들이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다가 한 아이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떠보니 예쁜 새 한 마리가 그들 앞에 날아와 앉아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그 새를 잡으려고 하면 새는 조금씩 조금씩 날아가 다시 앉았습니다. 이렇게 하는 동안 아이들은 새를 따라 숲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의 기둥으로, 말씀과 사랑의 기둥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찬송가 221장)『 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
그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내 가는 길이 형통하겠네 그 요단 강을 내가 지금 건넌 후에는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셋째, 저희를 고치셨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는『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뱀에 물렸을 때 고치셨고, 마라의 쓴 물도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고치십니다. 성격을 고치십니다. 육신의 질병을 치료해 주십니다.

넷째, 사람의 줄, 사랑의 줄로 이끄셨습니다.
이 말은 짐승을 이끄는 줄이 아닌 사람을 이끄는 줄, 즉 사랑의 줄, 은혜의 줄로 이끄셨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주님은『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줄로 이끌지 아니하시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목에서 멍에를 벗겨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서 주님은『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거운 죄와 근심의 멍에를 벗겨 주시고 대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의 멍에(메달)를 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간에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가나안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명기 8장 12-14절에서 모세가 걱정한 대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우양이 번성하고 소유가 풍부하게 되자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하고,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린 영혼에게 만나를 주십니다. 믿음으로 먹기만 하면 풍요로운 삶의 주인공이 됩니다.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게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고 했습니다.

일곱째, 포기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 손에 너를 두고 타인에게 너를 넘겨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고 했습니다.
너를 포기할 수 없다는 뜻이며 너를 원수에게 넘겨 줄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고 했습니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 소알 등 다섯 성으로 유명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불로 멸망했고, 다른 성 역시 다 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들처럼 내 팽겨쳐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즉, 방관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특히 8절 하반절에서는『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했습니다. 견딜 수 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건 마치 집 나간 자식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내 마음이 돌고, 내 마음이 움직이고, 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너희들의 망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끈끈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너는 나에게 등을 돌려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인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 예배는 긍휼이 풍성한 회복 미래가 있습니다. 이것이 회복의 미래입니다.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찬송가 317장)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하나님은 다릅니다.

사람
하나님
감정에 좌우된다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하신다
사랑이 제한적이다
사랑이 무제한적이다
쉽게 화낸다
함부로 진노하지 않으신다.
속되다
거룩하다
상대편을 상해한다
진도의 방법으로 예수그리스도
의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결국 독생자에게 진노하시고 공의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피는 진노와 공의의 완성이었습니다. 

(복음송) 그 때 그 무리들이 

1. 그 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박았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 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2.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주님 눈물로 기도했네
정결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3. 비웃는 그 무리들 주의 옷 벗긴 후에 주님 몸 깊이 찔렀네
귀중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4. 주여 나의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그때 구원을 이루셨네
마지막 피 한 방울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여덟째, 회복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0절에 보면『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라고 했는데, 그 뜻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신가 하면 사자처럼 무섭게 진노하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비둘기처럼 부드럽게 사랑하시는가 하면 사자처럼 소리지르고 공의를 발하십니다. 

그래서 10절 하반절을 보면『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애굽에서부터 새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같이 떨며 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는 회복시키고 그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그리고 11절 하반절에서는『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평안과 쉼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주께로 나온 자들은 모두가 안식과 평안을 얻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고침 받았고, 죄 많은 여인도 죄 사함 받고 평안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모두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로 말미암은 회복의 미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고침과 평안과 안식의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의 피로 속량해 낸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회복의 미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의 줄로 매었습니다. 그 사랑의 줄은 짐승처럼 비인격적으로 끌고 가지 않고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에서 무거운 멍에를 벗겨 주었습니다. 죄의 멍에를 벗겨 주겠습니다. 고통의 멍에를 벗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을 주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29)고 했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어렵지 않습니다. 쉽고 가볍습니다. 주님의 멍에 아래 있으면 쉼을 얻습니다. 안식을 얻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팔로 안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우리 목에 무거운 멍에를 벗겨 주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목자 같은 사랑입니다. 남편 되시는 신랑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번 진노하시면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십니다. 야곱의 환도뼈를 꺾어서 회개시킨 하나님입니다. 죄지은 사람은 사탄에게까지 내어 주면서까지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한 부분이 징계의 사랑입니다. 징계가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사람이 참 성도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인내하면서 기다리십니다.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만홀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 중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 매인 삶입니다.

 나의 생명의 주(찬송가 424장)

1. 나의 생명되신 주 주님앞에 나아갑니다  주의 흘린 보혈로 정케하사 받아 주소서
  날마다 날마다 주를 찬송하겠네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 매소서.
2. 괴론 세상 지날 때 나를 인도하여 주소서 주를 믿고 나가면 나의 길을 잃지 않겠네
   날마다 날마다 주를 찬송하겠네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 매소서.
3. 세상 살아 갈 때에 주를 더욱 사랑합니다 밝고 빛난 천국에 나의 영혼 들어 가겠네  
  날마다 날마다 주를 찬송하겠네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 매소서.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