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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히 2:14 - 히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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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히 2:14 - 히 3:1)

 
내가 상처 입은 만큼 다른 사람의 상처를 싸매줄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쉬아 벤 레비라는 랍비가 시메론 벤 요하이 랍비의 동굴 앞에 서있는 예언자 엘리야를 만났습니다. 그가 엘리야에게 질문합니다. 
“메시야가 언제 오십니까?”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가서 그분에게 직접 물어 보십시오.” 랍비가 깜짝 놀라서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그분이 어디에 계십니까?”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성문에 앉아계십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그는 온 몸에 상처투성이인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계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한꺼번에 다 풀었다가 다시 한꺼번에 싸매지만 그분은 한 번에 한군데씩 상처를 풀었다 다시 싸매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이들에게 내가 필요하게 될 거야. 그때 잠시도 지체하지 않기 위해 나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만 해.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메시야의 사역은 치유와 회복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야는 고통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앉아계신다는 것입니다. 한 번에 하나씩 그분의 상처를 싸매며 자신이 필요하게 될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하나하나 싸매면서 남의 상처를 싸매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내가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것만큼 남을 치유하고 남의 아픔을 싸매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상처를 입으셨기에 우리의 어떤 상처도 치유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이가 위로받는 것만큼 멋진 삶은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하면서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은 아픔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상처는 더 깊고 예리합니다. 우리의 육체도 상처를 받지만 육체의 상처보다 더 오래가는 것이 영혼의 상처입니다. 육체의 상처는 잠깐 아프다가 금방 잊혀 집니다. 그러나 영혼에 상처를 입으면 오래 오래갑니다. 그것은 무기를 통해서 받는 상처나 주먹을 통해서 받는 상처가 아니라 사람의 혀와 입으로 받는 상처이기도 합니다.

구약 외경에 집회서가 있습니다. 지혜의 책입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매에 맞아 죽으면 매 자국이 남을 뿐이지만, 혀에 맞아 죽으면 뼈가 부러진다.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지만 혀에 맞아 죽은 사람은 더 많다.” 집회서는 인간사를 되돌아보면서 인간이 혀를 통해서 상처를 받는 것처럼 치명타가 없다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인생살이는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탈무드에 나오는 메시야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이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를 치유하고 누군가로부터 치유를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고 나는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상처를 주고받은 것만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은 쪼그라듭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미움과 분노가 생깁니다. 그런데 나를 통해 누군가가 위로를 받고, 나 역시 누군가에 의해서 위로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넓어지기 시작합니다.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이라는 시인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한 가슴에 난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한 인생의 아픔을 달래줄 수 있다면 
한 고통을 위로해줄 수 있다면 
기운을 잃은 한 마리의 개똥지빠귀를 둥지에 데려다줄 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리라. 

우리가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 내가 상처를 받은 것들,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것들이 주마등같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었던 것, 내가 누군가를 격려해주었던 것, 내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랑을 보여주었던 것들이 떠오릅니까? 그렇다면 올 한해를 잘 보낸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로 인해서 격려와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면 많은 풍파가 있었을지라도 우리의 삶은 축복받은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격려와 배려를 받고 기쁨을 얻게 되는 것만큼 멋진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작은 생명이라도 나를 통해서 새로운 축복의 역사가 있었다면 인생을 잘 살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상처를 많이 받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땅에서 가장 상처를 많이 받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는 마구간에 오시면서부터 고통 받으셨고 버림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만날 때에도 연약한 자, 외로운 자, 병든 자, 힘든 자, 세상에서 조롱당하는 자들을 거침없이 만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최고의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가장 비참한 십자가에 당신의 두 손이 묶인 채 못에 박히고 가장 큰 고통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향기가 넘치는 것입니다. 상처가 너무나 크기에 그 상처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아름답게 향기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적셔지는 것입니다. 정호승이 쓴 시가 있습니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아름답게 보이는 꽃잎 속에 상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상처가 있기에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 인생에 상처가 있다는 것은 그 상처를 통해 우리의 인생이 참으로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가장 어렵고 힘든 길을 걸어가시며 상처받으셨습니다. 모든 아픔을 그가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상처받은 자가 다른 상처받은 자를 치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고통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고통 받음으로 너의 아픔을 대신 당하고 있다. 나는 모욕을 당함으로 네가 당할 모욕을 함께 당하고 있다. 나는 수치를 당함으로 너의 수치를 대신 담당하고 있다. 내가 죽음의 비참한 자리까지 내려감으로 너를 죽음에서 다시 일으키는 생명의 역사를 선물하겠다.” 이것을 구약의 이사야 53장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4~5)

기독교는 참 신비한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종교와는 다른 하나님의 계시의 종교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심으로 우리에게 회복과 생명의 역사가 새롭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우리들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과 죽음의 문제를 그냥 용서하셨으면 더 쉬우셨을 텐데 왜 굳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왜냐하면 우리의 상처는 또 다른 이의 상처에 의해서 치유되기 때문입니다. 

인격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 인격의 대가를 치루기 위해 하나님의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가를 치룬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함께 당하셨습니다. 죽음의 쓰라린 맛을 보셨습니다. 상처 입은 가슴을 그분도 껴안고 계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멸하시고 우리를 자유케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첫 번째로 예수님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 하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히브리서 2:14) 

마귀를 멸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죽음의 세력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위협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삶의 축복을 다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의 세력 앞에 자기를 내어놓으셨습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히브리서 2:15) 

예수님께서는 죽음과 고통과 이 세상의 상처로 인해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들을 풀어주시기 위해,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기위해서, 두려워하는 자에게 희망과 담대함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마귀는 너무 다릅니다. 마귀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마귀는 자신이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입니다. 마귀는 서로를 이간질시키고 헐뜯게 합니다. 마귀는 죽음의 권세를 붙잡고 사람을 위협하고 협박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탄의 협박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귀가 상처로 대항하면 예수님께서 상처를 받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수치로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면 예수님께서 수치를 당하겠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죽음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랬습니다. 마귀가 위협하고 찌르는 모든 것들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죽음에까지 내려가겠다고 작정하심으로 사탄이 우리에게 흠집 낸 상처들을 싸매고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비로운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17) 

그는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갖고 계시면서 동시에 인간의 모든 고통과 외로움과 탄식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중보기도를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근처에 조금 다가서는 것일 뿐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 가진 모든 부끄러움과 위험을 끌어안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하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브리서 2:18) 

예수님께서는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시험을 받을 때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우리가 상처 때문에 무너질 때 다시 상처를 싸매고 일으켜주시기 위해, 먼저 고난 받으시고 시험당하시면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자비로운 대제사장이십니다. 이번 한해를 되돌아봅시다.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당했던 육체적인 고난, 정신적인 고뇌, 영적인 공허는 무엇이었습니까? 가족에게 일어났던 일, 직장과 사회에서 일어났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지금도 생각만하면 잠을 못 잘 정도로 내 마음을 억누르고 가슴 아프게 하는 상처들은 무엇입니까? 시험에 실패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직장을 잃고 쫓겨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질병 때문에 심한 육체의 고통을 앓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서 떠나 보내야했던 고통을 경험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요 어느 누구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비통하게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G20세계 정상회의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품격과 국격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크게 국민들의 마음에 상처를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북한의 잇단 군사도발과 공격이 있었습니다.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 3월 26일 백령도 천안함 초계함 함정이 어뢰정을 맞고 침몰해서 국군장병 46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가족들이 오열했고 온 국민들의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지난 11월 23일에는 연평도 무력도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해병 2명과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국민들은 이 사건을 통해 이 땅에 전쟁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근심과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개인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 사회, 민족의 문제에 있어서도 깊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의 현장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다시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다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다시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를 향해서 달려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른 곳에서 위로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보다 더 큰 고통, 나보다 더 외롭고 힘든 탄식을 이 세상에 살면서 겪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다시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위로자가 되시고, 내 가정의 위로자가 되시고, 이 민족과 이 나라의 위로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올 한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던 경험을 기억하면서 내년 한해에 다시 새롭게 일어서기를 결단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한 번 왔다가 가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누군가가 위로받고 힘을 얻고 치유를 받는다면 그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주님이 먼저 나를 위로하시고 치료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주신 사랑의 치료를 받고 주위에 고통 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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