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 요셉, 마리아의 임마누엘 (마 1:18-25)

첨부 1


예수님, 요셉, 마리아의 임마누엘 (마 1:18-25)

 
내 용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낱말의 뜻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고 오늘 말씀에 해석까지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계시기 위해 오셨다는 뜻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들과 함께 계시려 하셨는가? 우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거부한 존재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는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린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에덴동산의 비극을 한번 그림으로 그려보면 처음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나서 인간은 큰 불행이 왔습니다. 모든 관계가 다 깨어졌습니다. 지금 에덴동산에 사람이 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에 바라보면서 한 말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예뻤으면 그런 표현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작품이니까 그렇게 감탄할 만큼 사랑스럽고 너무나 예뻤습니다. 그러던 인간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나니까 그 관계도 깨졌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야단치셨습니다. “왜 내가 하지 말라는 일을 했느냐? 그렇게 하면 내가 정녕 죽으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럴 때 아담이 남자라면 하와를 감싸주고 나서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와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죽이시려면 저를 죽이시고 하와는 살려주십시오.” 그래야 남자입니다. 그런데 비겁하게 하와를 가리키면서 “하나님! 하와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하와 죄 짓고 나까지 끌고 들어갔습니다.” 하와를 고발하면서 “죽이려면 하와를 죽이세요.” 이처럼 인간관계를 깼습니다. 어떤 남자가 집안을 청소하다가 어떤 편지봉투 하나가 툭 떨어졌는데 좀 낯이 익은 거 같아서 들어보니까 자기가 수십 년 전에 지금의 자기 아내에게 연애할 때 보낸 편지였답니다. 

“와! 이걸 아직도 안 버리고 가지고 있었구나. 그때 내가 뭐라고 썼나?” 호기심이 생겨서 다 읽어보고 나서 뭐라고 했느냐? “그때는 내가 치매가 걸렸었는가 보다.” 다 깨지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동물과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저 뱀이 나를 유혹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 뱀을 죽이세요.” 그 이후 인간들은 극도의 이기주의자로 변했습니다. 날마다 서로를 고발합니다. 개인적인 일도, 국가적인 일도 서로가 “너희 때문에 망하는 거야! 너희가 잘못해서 나라가 이 꼴이야.” 부부간에도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서로 이기주의의 극한 대립만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없으면 나도 못사는 애와 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동물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과 동물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서로 죽이게 되었습니다. 모든 관계가 다 깨어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어떻게 하시는가?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의 성격은 회복입니다. 보십시오. 창세기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쫓겨납니다. 요한계시록에 와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주겠다.” 창세기에서 선악과 열매를 인간이 따먹어서 인간에게 죄가 되었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선악과 열매를 따먹으라고 합니다.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사망이 주어졌는데 요한계시록에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영원히 죽지 않고 영생을 누리리라.” 회복이 옵니다.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회복에 대한 가장 좋은 설교는 “탕자 비유”입니다. 본래는 멋있는 부잣집 아들이었는데 만신창이 거지가 되어 먹을 것이 없으니까 돼지들이 먹는 것을 빼앗아 먹었다고 했습니다. 신발 한 켤레도 없어서 맨발로 돌아다녔다고 했습니다. 완전 만신창이 거지꼴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합니까? 신속하게 “빨리 목욕시켜! 발에 신을 신기고 비단 옷을 입혀! 손에 가락지를 끼워!” 순식간에 옛날 모습으로 회복시킵니다. “너는 본래 이랬어.” 하나님이 그러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세상의 인간들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만신창이로 살았든지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 과거는 기억치 않고 죄의 옷을 벗겨버리고 의의 옷을 입혀서 “그게 본래 너의 모습이야. 괜찮아. 이제 나와 살아.” 이것이 하나님의 성격입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 회복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될 게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 회복의 사역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값을 지불해야만 됐습니다. 그 값을 누가, 어떻게 지불했는지 오늘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신학적 용어로 ‘삼위일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을 ‘로고스’라고 우리가 말하는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예수가 곧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일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고통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가장 낮은 곳을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역사에 이런 일이 많았습니다. 우리 조선 역사 가운데 문종의 부인이었던 휘빈이 세자빈으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 좀 잘못해서 궁중에서 쫓겨납니다. 하루아침에 서인이 되어서 낙향을 하는데 왕비였던 사람이 서인으로 돌아가는 날 그 일이 얼마나 비참하고 슬픈지 고향 집에 돌아서자마자 휘빈의 아버지 김오문과 어머니, 휘빈 자신 세 사람이 자살해서 죽었습니다. “죽는 게 낫다. 왕비가 이게 뭐냐?” 높은 사람이 낮은 곳에 가기가 너무 힘듭니다. 우리가 다 이렇게 성탄을 즐거워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고통이 이미 값을 지불해 주었기 때문에 온 영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영광의 자리를 향하여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가기를 소원합니다. 죽음이 기다리고 고통이 기다리는 그런 곳에 누가 가고 싶어 합니까? 창조주께서 피조물이 되시고 절대신이 인간 고난 역사 속에 죄인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거기에는 하나님만이 겪으신 고통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고통은 탄생부터 십자가에서 잘 나타났잖아요? 이렇게 해야 내가 인간과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임마누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고통은 마리아의 고통입니다. 마리아는 유대 땅 나사렛 동네 시골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순박한 시골 처녀입니다.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너무나도 끔찍한 고통을 안겨줍니다. “너는 이제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지금은 윤리관이 좀 변해서 남녀의 사랑 만남의 윤리관이 개방 문화(Open Culture)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2천 년 전 유대 나라의 성윤리관 문화는 생명과 똑같습니다. 

마리아 같은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이 발견된다는 그 아기를 낳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확인되는 즉시 끌어다가 죽여 버리는데 이것을 ‘명예살인’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때부터 나옵니다. 다말이 혼자 사는 여자였는데 임신이 확인되니까 시아버지 유다가 거침없이 동네 사람들에게 “네 며느리를 끌어다가 불살라 죽여라!” 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시대 성윤리관, 유대 나라 성윤리관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사회에서 지금까지 있어왔던 그러한 문화와 개념을 다 알고 있는 처녀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하나님 때문에 큰일 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천사에게 그 부당성을 지적했습니다.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자연 과학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을 우리가 한번 현실감 있게 이해해 봅시다. 여러분이 여러분 주변에 있는 잘 아는 처녀에게 느닷없이 질문 한번 해보십시오. “너 아기 가졌냐?” 그 처녀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아마 그 충격 평생 사라지지 않을 거 같습니다. 요즘 같으면 성 폭력입니다. 바로 동정녀 처녀에게 아기 낳을 것이라는 이 예언을 가장 치욕스럽게 고통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마리아의 그 고통 감수가 우리에게 성탄의 기쁨을 선물해 준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요셉의 고통입니다.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기는 요셉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정신적 피해가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아직 결혼하지 아니한 믿음 좋은 총각들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결혼하려고 열심히 사랑하고 있는 아가씨가 여러분이 알 수 없는 어린 아기를 임신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결혼하시겠습니까? 지금 요셉은 별 생각을 다 했을 것입니다. 우리들과 똑같은 삶을 살았으니까 아마 마리아에게 괘씸한 생각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봤더니 이게 아주 불여우 같은 존재였구나!’ 아마 분노가 참을 수 없는 증오가 되었을 것입니다.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괘씸죄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요셉은 지금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첫째는 마리아를 사회에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의는 살아남고 마리아는 사회 전통법에 의해서 쉽게 처리됩니다. 바로 죽는 일입니다. 남자 최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니까 마리아를 처벌해 버리고 속 시원하게 원수를 갚는 것을 선택하느냐? 

두 번째, 죽이는 일은 너무하니까 내버려 두고 꼴 보기 싫으니까 ‘잘 먹고 잘 살아라’ 도망가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요셉에게도 위험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요셉은 아기가 출생한 후에 마을 사람들에게 영원한 죄인이 됩니다. “이 나쁜 놈! 처녀를 망가지게 해 놓고 책임지기 싫으니 도망갔다.” 오히려 더 불리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온 세 번째 선택이 있습니다. 바로 가만히 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방법은 과연 온전한가? 요셉이 마리아를 찾아가서 “이렇게 된 이상 너와 나는 살 수 없다. 조용히 헤어지자.” 정리를 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아기가 안 나옵니까? 아기가 출생하게 되면 마리아는 요셉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죽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요셉이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리아가 출생을 했을 때 마리아가 자기 보호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나가서 “여보시오! 이 아기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요. 나는 죄가 없소이다.”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이 지구상에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을 누구더러 믿으라는 것입니까? 또, 이 마리아는 요셉에게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우리가 경험한 대로 애정 관계는 아무리 깨끗하게 자기 보호를 열심히 해도 불필요한 오해가 항상 생깁니다. 여러분도 다 경험했지 않습니까? 저는 제 일생 중에서 지금이 목회하기 제일 편합니다. 어떤 의미이냐? 나이가 많아져서 너무 좋습니다. 여러분도 20대, 30대는 누구나 다 예쁘지 않습니까? 저도 그때는 얼마나 예뻤는지 모릅니다. 너무 예쁜 사람이 목회를 하다 보니까 불필요한 일이 날마다 생겨서 권사님과 심방만 갔다 와도 소문이 나서 날마다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지니까 그런 저런 소리가 하나도 없으니까 너무나 좋습니다. ‘70세 이후가 제일 좋겠구나!’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다 경험하지만 불필요한 수없이 생기는 것이 남녀 관계입니다. 아마 이때 마리아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 나 하나 죽으면 동네 사람들도, 하나님도, 요셉도 괜찮을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자연히 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지금 하나님 때문에 죽을 지경의 고통이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해결 방법이 있는가? 있습니다. 그것을 천사가 지금 말해 주는 것입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마리아를 너희 집에 데려오라. 두려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 마리아를 빨리 사람들이 알기 전에 자기 집에 데려다 놓으면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 결혼하지 아니한 상태의 마리아를 빨리 너희 집에 데려오라고 천사가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30세가 되었을 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기적 사건을 보고 놀라면서 하는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다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형제 누이들이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30년이 넘도록 이 사실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유아 시절에 요셉이 동네 친구들에게 “사실 말이야, 저 녀석은 내 아들이 아니야.” 한 마디만 해도 문제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말하고 싶은 것도 마음에 두는 마리아와 요셉을 예수님의 선택하셨습니다. 의롭지 못한 말이 빠른 사람을 하나님이 쓰시는 법을 보셨습니까? 안 쓰십니다. “내가 너를 써야 되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아무 문제없이 의로운 요셉과 말이 없는 마리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예화는 미국의 목사님들이 많이 쓰십니다. 저도 거기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굉장히 돈이 많은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한 가지 취미를 가지고 삽니다. 미술품을 수집하는 겁니다. 돈이 많으니까 좋은 미술품이 있다고 하면 어디든지 찾아갑니다. 미술품 좋은 것은 한 장에 수십억씩 가는 것도 있습니다. 저는 미술 구경 많이 하러 다니는 사람인데 세계적인 미술품은 그림 하나에 경비원 한 명씩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만찬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봐서 색깔이 변한다고 관람시간을 제한합니다. 

미술품의 귀중성을 모르는 사람은 “그림이 밥 먹여 주냐?” 그러는데 애호가들은 밥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 사람은 그렇게 미술품 수집에 취미를 두며 살았는데 더 고마운 것은 자기 아들이 자기 취미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죽었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온 세계 여행을 같이 하면서 작품 구입을 해서 아주 행복하게 그림과 함께 예술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아들이 똑같이 좋아하는 것을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 같은 사람은 제 아들이 목사가 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늘 섭섭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에게 목사 하라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둘이 재미나게 살다가 아들이 군대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전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 부자 영감은 아들을 잃어버린 슬픔으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해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똑똑똑” 누가 문을 두들겼습니다. 나가서 문을 열어보니까 군인들이 커다란 보따리 하나를 들고 왔습니다. “당신들 누구요?” “네, 저희들은 당신의 아들 친구들입니다.” “왜 왔소?” “네, 우리들은 군대에서 전투 훈련을 하다가 사고가 생겼는데 당신 아들 때문에 우리가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혼자 죽음으로 우리를 살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 크리스마스 날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은 사랑하는 친구의 아버지에게 무슨 크리스마스 선물을 드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 친구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아들과 그림이니까 아들의 얼굴 초상화를 저희들이 그렸습니다. 

그림은 잘 그리지 못했지만 아버지가 그림을 좋아하시니까, 그리고 아들을 좋아하시니까 그 두 가지 의미로 이 선물을 드리려고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이렇게 온 것입니다.” “아! 그럽니까? 고맙습니다.” 열어보니까 그림은 못 그렸지만 아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아들과 그림이 함께 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잘 볼 수 있는 벽난로 위에 올려놓고 보면서 위로를 받았는데 이분도 이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장의 유서를 써놓고 돌아가셨습니다. 

유서를 맡은 변호사가 유서대로 진행을 합니다. “이 세계적은 모든 수준의 그림을 그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경매하겠다.” 경매는 값이 싸잖아요? 반값에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문을 듣고 그림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경매에 참여하려고 사람들이 수 없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돈 보따리를 가지고 온 그 사람들에게 변호사는 “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대로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그 유서에는『내 아들의 초상화를 팔아 주십시오.』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자, 이 초상화 사실 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데 그것을 누가 사겠습니까?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도 대답을 안 합니다

“그것은 그냥 넘어가고 빨리 세계적인 그림을 내놓고 값을 부르시오.” “아닙니다. 이것부터 팔아달라고 유서에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값을 낮추어도 아무도 안 사는 겁니다. 거추장스럽기만 할 텐데 그것을 사서 뭐합니까?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나섰습니다. “저는 그림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돈은 없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오늘 와서 그림은 사지 못하고 그 그림들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겠다 생각하고 구경 왔습니다. 제 주머니에 보니까 지금 돈이 10불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낼 테니 그 그림을 저한테 파시겠습니까?” “그러십시오.” 그래서 10불에 그림을 팔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다음 유서를 읽었습니다. “오늘 경매는 다 끝났습니다.” “뭐라고요? 우리를 불러놓고 이게 무슨 일입니까?” “네, 다 끝났다는 것은 이 그림 주인의 유서 때문입니다. 여기에 유서에『누구든지 내 아들 그림을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 나의 모든 그림을 다 주십시오.』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10달러 내고 아들 그림을 가져가는 사람이 모든 그림을 다 가졌습니다. 

“나는 유서대로 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죽는 사람이 돈은 가져서 뭐합니까?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것이 아들과 그림이었는데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을 사람을 찾은 겁니다.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내 아들과 이 그림을 함께 가지고 있을 그 사람에게 다 주자.’ 여러분!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 성육신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하나님은 똑같습니다. “내 아들과 함께 있을 사람!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주겠노라.” 이것이 성탄입니다. 이런 성탄의 의미를 기억하시면서 이번 2010년 성탄절을 맞이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지금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값싸게 성탄을 맞이하지 말게 하옵소서. 성탄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깨닫고 이 성탄절을 보낼 때 너무나도 감격하여 견딜 수 없는 기쁨이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기억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맞이하는 성탄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