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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예수님 이외로는 얻을 수 없는 진리 (갈 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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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이외로는 얻을 수 없는 진리 (갈 2:15-16)


몇 년 전 뉴스위크 기자가 달라이 라마를 인터뷰하는 자리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삶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 대신 카르마, 즉 업이라는 것을 믿는다.’ 

기자가 또 질문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인류 역사에 가장 이바지 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랬더니 달라이 라마가 대답하기를 ‘복지 ․ 교육 ․ 구제 이 면이라고 생각한다.’ 달라이 라마가 후한 평가를 해 준 것이지요. 

여러분은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 독특하게 기여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없었다면 인류가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신학교 교수님 중에도 이 질문에 대해서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성도들도 그렇고. 그러나 그건 질문이 어렵기 때문이 아닙니다. 질문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가 그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을 때가 많고 우리의 편견이 하도 깊어서 진리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 햇볕이 쥐구멍에 드는 것처럼 어렵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내 자신입니다. 내 자신의 자격지심 ․ 내 자신의 불신 ․ 내 자신의 율법주의적인 생각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 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 중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화목 하라, 약한 자를 배려하라, 이런 것은 굳이 예수님이 아니더라도 다른 데에서라도 들을 수 있는 것이고 또 다른 데서 듣지 않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지요.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인류가 결코 스스로 발견할 수 없었던 진리가 있는데 이 진리는 기독교가 유일하게 인류 역사에 이바지한 것이고 기독교 신앙에 가장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궁금하시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행위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은혜의 개념입니다. 

은혜. 그러나 은혜라는 말만 가지고는 그것을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은혜라는 말처럼 인플레현상을 겪은 단어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경우에 은혜라는 말을 씁니다. 마치 티벳 사람들이 모든 일에 yak butter를사용하는 것처럼. 우리는 교회에 가서 기분이 좋아도 은혜 받았다고 하고 딸을 낳으면 은혜 아니면 지혜라고 이름을 짓고, 모든 것이 은혜, 은혜가 충만하고 은혜로 합시다, 이러다 보니까 정작 은혜라는 아주 중요한 이 개념을 상실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 이 부분이 기독교의 독특한 면이라고 하느냐. 그 이유는 타종교뿐만이 아니라 타종교는 물론이고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은 행위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행위 중심적으로 판단합니다. 즉 사람은 하기 나름이라는 것입니다. 하기 나름이다, 인과응보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이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잘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못하는 사람에게는 벌을 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보다 더 공평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대로 사느냐. 그대로 살지는 못하면서 적어도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다보니까 예수님을 믿을 때에도 이 생각대로 믿습니다. 우리의 보편적인, 본능적인 사상을 신앙생활에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그게 바로 율법주의요 보상주의입니다. 보상심리.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대로 갚아주신다는 생각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사람이 정성을 많이 기울이면 하늘도 감동을 받는다, 우리에게 어필하는 면이 있지요. 그러나 그건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우리의 정성을 보시고 하나님이 감동받으신다는 면은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의 행위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의 행위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고 인류는 스스로 구원할 수 있었을 것이고 자력구원이 가능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불필요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하셨다는 사실은 사람이 자기의 행위로 자기의 노력으로 자기의 의지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결국 사람이 행위로 하나님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버는 것이 아니고 거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저 사람이 예쁘기 때문에, 저 사람이 착하기 때문에, 나에게 잘해주기 때문에, 그래서 사랑합니다. 물론 무조건적인 사랑도 있지요. 자식 사랑. 그러나 그 사랑이 늘 기쁜 것만은 아니지요. 그래서 많은 부모가 자식을 뭐라고 부릅니까. 에이, 저 웬수. 안 사랑할 수는 없고, 자기 혈육이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스스로부터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아주 귀중한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부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유일하게, 기독교만이 인류 역사에 기여한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가 어디 있느냐. 그 사람이 죄인이든 의인이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서 비롯되느냐. 그 사람의 소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사회적인 위치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공로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고 행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가치는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것인데 이 가치는 행위에 좌우되지 않고 이것은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심은 대로 거둔 것이 아닙니다. 심은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그에게 사랑을 베풀고 귀중하게 여기고 지극히 작은 자를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시고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진리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를 우리가 깨닫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이론적으로 어려워서가 아니고 우리의 보편적인 편견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은 율법적입니다. 사랑할만한 것이 있어야 사랑하고, 저 사람이 행한 것이 있어야 상을 주고, 못하면 벌을 주고, 심은 대로 거두고 그게 공평한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이 우리 마음속 저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때도 그대로 믿습니다. 

개털모자 설교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주로 천국을 갔다 왔다, 천국의 환상을 봤다는 데에서 이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을 봤더니 면류관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더랍니다. 화려한 면류관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서 물어봤답니다. 어떻게 면류관을 받게 되었느냐. 그랬더니 그 사람은 세상에 살 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하나님을 잘 섬겨서 그 상급으로 면류관을 쓰고 다닙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면류관이 없어요. 그래서 당신은 왜 면류관이 없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세상에서 한 일이 없어서,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쓸 수는 없고 그래서 개털모자를 쓰고 다닌다, 이런 설교입니다. 

저는 개털모자가 뭔지 모르겠지만 천국까지 가서 머리에 뭘 쓰고 다녀야겠습니까. 천국까지 가서 남들 앞에 으쓱거리고 다니고 싶습니까. 천국에도 귀족이 있습니까. 천국에도 VIP가 있습니까. 천국에도 계급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계급만으로도 식상한데 천국에 가서도 계급이 있고 천국에 가서도 등급이 있고 천국에 가서도 VIP석이 있고 일반석이 있고 비행기에 일등석 ․ 이등석 ․ 삼등석이 있는 것처럼, 타이타닉 호에 부자들이 타는 칸과 가난한 사람들이 타는 칸이 나눠져 있었던 것처럼 천국에도 이와 같은 계층이 있고 계급이 있고 차별이 있다면 그건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고 그건 천국답지 않은 것이고 과연 그런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건 성경의 진리보다는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으로 천국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계급을 누리고 많은 것을 누리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는 질서가 바뀌고 순서가 바뀌고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된 것을 발견하는 그 놀라움이 천국에 대한 인간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놀랍다 ․ 다르다 ․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지 않다….

개털모자 설교는 못 들어보셨더라도 이런 설교는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상급은 행함으로 받는다.’ 아주 귀에 익숙한 가르침입니다. 상급, 축복은 행함으로 받는다. 그래서 아무개는 이 세상에 있을 때 헌금을 정성껏 하고 교회를 열심히 섬겼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부동산 값도 올라가게 해 주시고 복권도 당첨되게 해 주시고 뭐도 어떻게 해 주시고 아무개는 헌금도 안하고 교회도 안 섬기고 말썽만 부렸더니 쫄딱 망했다더라, 그런 설교 많이 들어보셨지요. 

그런데 사실 그 내용만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 내용만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큰 위험이 있는데 우리를 도로 행위 위주로 돌려놓는다는 사실입니다. 은혜는 벌써 잊어버렸고 은혜는 물 건너갔고 행위 위주의 신앙생활로 돌아가게 한다는 데에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고 행위를 장려하고 행위가 있는 사람을 인정해주고 행위가 없는 사람을 정죄하는 율법주의로 복귀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소위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무서운 말을 했습니다. 다른 복음이라는 말은 변질된 복음 ․ 거짓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소위 개털모자라든가 축복은 행위로 받는다는 그 생각이 무엇을 낳느냐면 기복신앙을 낳습니다. 기복신앙이 왜 잘못됐느냐. 기복신앙은 그 동기가 잘못된 것도 있지만 사람의 욕심, 사람의 축복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정성, 동기가 잘못된 면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복신앙은 우리의 신앙을 행위 위주로 바꿔 놓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행위 위주로 바꿔 놓습니다. 은혜는 물 건너가고 인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춥니다. 행위가 많은 사람은 VIP가 되고 교회에서 귀족이 되고 의인 대우를 받고 행위가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도 찬밥이고 죄인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사람을 대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에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인한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잘 이해하려면 율법이라는 말을 잠시 떼놓고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행함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구원을 말하는 것인데 좀 더 넓게 해석하면 하나님의 사랑 ․ 은총 ․ 축복 ․ 은사 이런 모든 것을 통틀어서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게 아니라는 얘기에요. 내가 행함이 많아서 하나님이 더 사랑하고 행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덜 사랑한다든가 미워한다든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게 하나님의 사랑의 조건이라면 하나님이 애초에 세상을 어떻게 사랑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는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는데 그 사랑은 무슨 조건이 있어서 주신 것입니까. 우리가 뭘 잘했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겠습니까. 행위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애초에 인간을 사랑할 수 없다는 얘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끼리는 사랑의 이유가 있습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고, 저 사람이 나의 친구고, 저 사람이 나에게 예뻐 보이고 그래서 사랑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그 사람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그 가치를 창출하십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이런 말을 했지요. ‘지렛대의 원리를 사용하면, 나에게 큰 지렛대와 지구 밖에 설 장소만 주면 내가 지렛대를 가지고 지구라도 움직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자기 밖에서 봐야 됩니다. 자기 안에서는 자기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밖으로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자기의 참 모습과 참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은혜의 원리입니다. 

아마 여기에 대해서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예측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도원 비유를 말씀하셨지요. 포도원의 비유는 포도원의 주인이 일당을 주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얘기입니다. 아침 아홉시부터 일한 사람, 열두시부터 일한 사람, 오후 세시부터 일한 사람, 해지기 전부터 한 시간 일한 사람이 있는데 주인이 다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 불평했다고 했어요. 나에게 더 줘야 되는 게 아니냐. 그 말은 저 사람에게는 덜 줘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말하기를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후하게 주는 것을 왜 네가 불평하냐.’ 

여기에서 하나님의 공평의 원리와 우리의 공평의 원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아침부터 일한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그만큼 한 일이 많고 내가 그만큼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리새인이에요. 그게 자기 의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은혜의 원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요. 예수님도 그것을 내다보셨습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가서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내다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여 주었는데 큰아들이 그 사실을 알고 안색이 변했어요. 화를 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큰아들을 달래기 위해서 나옵니다. 그 아들이 하는 말이, 나는 아버지를 떠난 적도 없고 착실하게 열심히 일했는데 나를 위해서는 송아지를 잡아준 적이 없는데 저 동생은 돈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리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를 위하여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행한 것이 없는 죄인을 영접하는 것에 대해서 그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얘기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탕자와 같은 면이 있고 그 형과 같은 면이 공존합니다. 우리 모두는 탕자처럼 죄인인 면도 있고 형처럼 바리새인 같은 면이 공존합니다. 탕자와 형 그들의 생각에 공통적인 면이 있는데 그건 행위 위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탕자는 탕자대로 내가 행한 것이 없기 때문에 아버지 뵙기가 부끄럽다, 내가 아들로 대우받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형은 형대로 내가 행한 것이 많은데 나는 안 해주고 행한 것이 없는 동생을 맞아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의 생각의 공통점은 행위 위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은 죄인대로 아 나는 자격이 없고 어떻고 ,어떻고, 낙심한다, 반대로 오래 믿은 사람은 오래 믿은 사람대로 나같이 믿어야 되고 내가 복을 받아야 되고 저 사람은 죄인이고 이런 식으로 남을 정죄하려고 한다든가, 결국은 둘 다 같은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둘 다 행위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행한 것이 없는 탕자라도 받아주시고 기뻐하시고 행한 것이 많다고 해서 더 의롭다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결국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만이 인류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수요, 기쁜 소식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행한 것이 있든 없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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