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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능력있는 그리스도인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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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있는 그리스도인 (고후 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7-10)

2011년 새해를 맞이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새 한해도 하나님 우리와 함께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힘주시며, 치유하시고, 풍성케 하시며, 은혜주실 것을 믿습니다. 믿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성도여러분, 오늘 저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제가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너무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으시죠? 그냥 그런 그리스도인, 아무 능력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싶지는 않으시지요?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는 스승의 임종을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왕하2;9)“..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엘리사의 소원이 ‘스승님에게 역사하신 성령의 역사의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원합니다.’ 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 ‘갑절의 역사’의 소원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 소원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소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하나님 2010년의 성령의 역사의 갑절이 2011년에 저와 저의 가정, 우리 교회에 있기를 원합니다.’ 라고 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능력과 축복을 사모하는 이런 기도를 하기를 우리보다 더 원하십니다.  자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우리도 원하고 하나님도 원하니 아무 문제가 없지요?  성도여러분,  아이도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기를 원하고, 부모도 아이가 서울대 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다 끝난 것입니까? 아니면 이제 시작입니까?  사업이 성공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하나님도 사랑하는 자녀에게 사업의 축복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끝난 것인가요? 아니지요. 시작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방법(方法)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정해진 방법이 있습니다. 카드도 통장도 없이 은행에 가서 돈을 달라고 하면 돈을 줍니까? 잘 아는 동네 친구 딸이 은행 창구에 앉아있어도 돈 안 내줍니다. 카드나 통장과 도장을 가져와야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이 있는 것이고, 우리가 그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갑절의 능력, 갑절의 축복’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이고,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적인 방법’이라고 합니다.    2011년은 영적인 방법을 많이 알아 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사도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다. 보통 병이 아닙니다.  ‘가시’ 또는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 할 수 밖에 없는 육체의 고통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치는 바울이지만 자기 몸에 있는 사단의 가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육체의 가시, 즉 사단의 사자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지극히 큰 여러 가지 계시를 주셨는데..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런 사단의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봉사를 하는 데 돈이 있는 쪽과 없는 쪽 중에서 둘 다 똑같은 신앙이라면 어느 쪽이 봉사를 더 많이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돈이 있는 쪽이 봉사를 더 많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같은 신앙이라도 돈을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 더 잘 봉사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실수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십시다. 사도 바울이 건강한 쪽과 병든 쪽 중에, 어느 쪽이 복음 전파에 이익이었습니까? 뜻밖에 병든 쪽이 더 이익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기왕에 동일한 복음의 열심을 가지고 있을 바에야 건강이 안 좋고 몸이 아픈 것 보다는, 병이 없고 건강한 것이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더 좋다. '하면서 3번씩이나 건강을 위하여 기도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표현상 한 번 기도했다는 표현은 대게 40일 정도의 작정기도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 병을 고쳐주세요. 건강하면 복음에도 좋을 것 아닙니까. 몸이 아프니 복음에 방해가 됩니다.’ 하고서 40일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 응답이 없으십니다. 다시 40일 작정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내 육체에 사단의 가시가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걸림이 많습니다. 방해가 됩니다. 건강을 주시옵소서. 건강해야 더 복음전하기에 좋습니다.’ 그러나 또 아무 응답이 없으십니다. 3번째 40일 작정기도를 드립니다. 그만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싶은 것입니다. 복음의 방해가 되는 이 질병을 정말 치우고 싶은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응답이 바울의 생각과 너무 다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무슨 말씀인가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질병이, 사단의 가시라고 불리는 이 병이 오히려 복음에 도움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건강해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아파야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 말씀은 바울이 약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 진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런 부분이 우리가 가장 잘 틀리는 상식이요, 생각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 영적인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깨달은 바울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노라’ 하였습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이 진리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사역자가 자기 힘으로 나서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자리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하고, 자기를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약한 그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은 우리의 잘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한 것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합니다. 이 말은 내가 약할 그때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강함을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내가 약할 때 나는 강하다’  사실 성경의 교훈은 세상의 교훈과 너무 많이 다릅니다. 아니 세상의 교훈은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처럼 보이지만 거짓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언제 어디서나 진리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기독교에다가 세상적인 교훈을 끌어와서 옷 입히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봉사를 많이 할 것 같으냐’ 고 물으면 우리는 으례히 '부자다!' 고 생각해 버립니다. 많이 배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중에서 어느 쪽이 하나님을 위해서 더 할 일이 있을 것이냐?  물으면, '당연히 많이 배운 사람, 똑똑한 사람'이라고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가장 똑똑한 솔로몬의 끝은 우상숭배였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왕이라는 솔로몬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왕이 아니라 나라를 둘로 나누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똑똑한 자를 쓰지 않는다고 여러 번 그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러라도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을 쓰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시나요? 하나님께서는 겸손(謙遜)한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溫柔)한 사람, 순종(順從)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즉 자기를 약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육(肉)이요 하나님은 영(靈)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의 능력은 육(肉)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능력은 영(靈)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요6;6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또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6;6-7)하셨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내가 갖고 있는 것,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육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네 씨가 큰 민족이 되어 내가 주는 땅을 소유하리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그 약속을 이룰까요?  당연히 말씀하신 하나님이 자기가 하신 약속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10년 기다려도 아들 소식이 없어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하갈을 통해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은 누구에게서 나온 아들인가요?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육(肉)에서 난 것은 육(肉)입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안심을 합니다. 자기 몸에서 씨가 났으니 이제 되었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가 않습니다. ‘그래 네가 너의 능력으로 아들 낳는다구? 약속은 내가 했는데.. 이루기는 인간인 네가 이루겠다고? 네가 하나님이야? 네가 아직 힘이 많구나 힘 빠질 때까지 내가 좀 기다려야겠다!’ 그리고는 아브라함 99세 될 때까지 13년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이 13년을 기다리신 후에 100세에 하나님이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십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능력으로 낳은 아들이 아닙니다. 남자 나이 100세요, 사라는 90세로 부부가 다 생식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요, 죽은 것 같은 몸입니다. 이 나이에, 이런 죽은 것 같은 몸으로 무슨 자식을 낳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죽은 것 같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영(靈)이신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구원의 족보가 될 수 없고, 이삭만이 구원의 족보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내가 한 약속은 내가 이룹니다. 손해가 되어도 약속은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 할 수도 없고, 대신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구원(救援)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하심도 아닙니다.  肉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肉은 싸움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우리 생각대로, 우리 능력대로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요 은혜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쓰지 않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사람이 자기의 재주를 드러내는 곳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재주가 순종을 통해서 쓰여지는 것이 교회입니다. 재주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재주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할 때, 자기를 약하다고 고백하는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교육은 선생님이 학식이 높고, 언변이 좋은 반 보다, 선생님이 사랑을 갖고 학생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한 반이 잘 되도록 되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재정적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재정은 주판을 잘 놓고 계산을 잘 하는 사람이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늘 기도하는 사람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몇 사람이 돈을 내서 일이 되게 하는 것보다 모든 교인이 그 일을 위해 기도하고 한마음이 되어서 그 일을 완성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합니다. 만약에 교회 일이 몇몇 사람에 의해서 행하여진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일에서 제외되고 말 것입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본 것이 아니라 돈 있는 사람이 돈을 내는 것을 보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도여러분, 교회일 만큼 기적이 요구되는 곳도 없습니다. 도무지 못 할 것 같고 안 될 것 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는 이루어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일이 내 손에 쥔 것이나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되어 지는 것이 아닌 곳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도여러분들은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신앙생활의 핵심을 잘 알고 계십니다. 많이 가르침 받으셨고, 무수한 체험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핵심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핵심을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고민 할 것도 없이 성경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천하보다 귀한 것이 목숨이라고 하십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아무 쓸데 없는 일이 맞습니다.    

이제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가장 귀한 것이 생명인데... 이제는 슬쩍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왕으로 살 것인가, 거지로 살 것인가 선택하시오’ 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모두 다 왕으로 살기를 선택하지, 거지로 살기를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왕(王)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 제일 부자가 왕이니까, 온갖 귀한 것은 다 왕궁에 있습니다. 왕은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이 호화롭게 살 수 있지요. 그리고 옛날부터 왕은 귀한 존재입니다. 일반 사람들과 다른 매우 고귀한 사람이 왕가의 사람들입니다. 즉 아예 핏줄이 다르다고 하는 사람이 왕입니다. 그러나 왕의 특징은 물질의 부유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있습니다. 왕이 명령을 하면 모든 사람들은 다 왕의 말을 순종해야만 하는 절대 권력을 가진 것이 왕입니다. 
 
하지만 거지는 어떤 사람이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 가진 것이 없는 거지는 부와 귀와 능력에서 왕과 비교가 안 됩니다.  무슨 말인가요?  결국 ‘목숨의 가치는 소유로 결정이 나는구나. 많이 소유해야 귀한 목숨이고 아무것도 없으면 천한 목숨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결론이 납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왕으로 살 것인가, 거지로 살 것인가 선택하시오’ 이런 질문은 잘 생각해보면 왕과 거지의 목숨의 무게를 다르게 보는 생각입니다. 다 같이 귀한 목숨이라고 말은 했지만 결국은 왕과 거지의 목숨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묘하게 바꾸는 질문입니다. 사람이 왕처럼 강해야지 거지처럼 약하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입니다. 마귀가 이렇게 예수님에게 제안을 합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8-9)  마귀의 이 말은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니 마귀는 제 마음대로 예수님을 죽일 수도 없습니다. 

지금 마귀는 예수님에게 ‘왕(王)으로서 사십시오. 부유하게, 귀한 몸으로, 말 한마디로 모든 사람들을 부리는 높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라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마귀의 제안을 거절하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마귀의 이런 제안을 받아들여서 왕으로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다 누리면서 살기로 하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했을 것입니다.  이제 마귀는 우리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결심하며 사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합니다. ‘왕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부와 귀와 모든 영광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길이 있는데 그런 길을 선택하시지요?’ 합니다.
 
그러면 성도여러분 ‘거지 보다는 왕으로 살고 싶다’는 이런 생각이 나쁜 생각인가요?  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곰곰이 묵상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참 많이 다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왕으로서 사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벧전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문제는 왕으로서 사는 방법 입니다. 마귀에게 무릎을 꿇는 육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영적인 방법입니다. 

그 방법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또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한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길, 풍성하고 부요하면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왕 같은 삶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을 때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이 영생하도록 보존합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십자가를 진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재주대로 교회일을 하는 것은 십자가를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자아가 죽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을 때.. 나는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때 많은 열매가,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빌3:9절을 보십시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바울 사도가 갖고 있었던 좋은 점, 즉 바울의 ‘의(義)’는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든지, 이스라엘 민족이라거나, 베냐민 지파와 바리새인이라는 義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율법에서 난 義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율법(律法)은 기준이나 규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내세우고 자랑하는 나의 ‘의(義)’가 나의 소유와 지식과 능력으로 만들어진 나의 方法이라면 그것은 ‘율법’입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해가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의(義)’가 이익이 됩니까?  믿음으로 받은 '의'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義입니다.     

예를 들면, 목사가 '신앙생활을 이렇게 저렇게 하셔야 됩니다.'하고 이야기 하면, 요즘 교인들은 앞에서는 다 감동스런 얼굴을 하고 아멘합니다. 그러나 돌아서기만 하면 마음에 이미 판정을 내립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그렇게 사십시오. 제가 그래서 목사님을 좋아하고 목사님 교회에 나갑니다. 그러나 내가 목사님처럼 산다면 저는 사흘도 못 가서 굶어 죽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왜 말씀대로 안 사느냐?  왜 이렇게 내 생각대로 사느냐?  우리가 현실 생활을 더 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현실 생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신앙생활(信仰生活)이 오히려 해(害)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힘든 신앙생활은 목사님께서 좀 대표로 살아 주시고 우리는 여기서 현실을 인정하면서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기로 결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80% 쯤은 현실에다 발을 디디고 있고, 20%만 신앙에다 발을 넣고 있습니다. 왜 20%는 그래도 신앙에 넣고 있을까요? 죽으면 내세(來世)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가야겠고 그래서 보험이라고 생각하고 20%를 해 놓고, 현실 80%는 여기서 사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정말 성경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현실 생활에 해가 될까요? 정말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자기 생각을 죽이고 살면 더 가난하고, 더 빈곤하게 될까요?  30배, 60배, 100배로 거둘 것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다 거짓말일까요?  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십자가를 안지는 것이 더 힘듭니다. 말씀대로 순종 안 하고 사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삶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다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을 책임지시는 하나님, 천하보다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못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꺼꾸로 사는 것입니다. 현실중심으로 살고, 솔직히 현실생활을 위해 신앙생활을 합니다. 사실 이것은 똑똑한 것이 아니라 두려운 일입니다. 나 혼자서 어떻게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나 혼자서 어떻게 이 거대한 현실에서 작은 행복이라도 차지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생각이 바뀌어 질 것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어려운 그 말을 안 하게 되었고, 그 말을 안 듣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육은 육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며, 말씀대로 사는 것이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런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아마 알아서 돌이킬 날이 있을 것입니다. 맞아서 돌이키든지, 고생고생한 후에 돌이키든지, 부흥회 때 은혜 받아 돌이키든지, 어느 날 정말 기적 속에서 돌이키든지,  어째든 현재 중심의 삶에서 돌이키실 때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새삼스레 새사람이 되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새사람이 되어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문제는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영적으로 안 살고, 육적인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불행인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앞장서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계획하고, 고민하고, 설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양입니다. 양은 계획하고, 고민하고,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를 따라가는 것이 양입니다.  목자의 인도함을 받아서 목자를 따라 갈 때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갈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모든 책임을 지십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맞습니다. 원래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태에서 적신으로, 맨 몸뚱이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지금 내가 가진 것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이 모든 것이 어찌 내게 있을 수 있습니까? 나의가족, 나의 건강, 나의생명, 나의 지식,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 하십시오. 그리고 내 자신도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냥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내 인생을 그분께서 인도하시도록 맡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하는 것, 내 마음대로 안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살면 참 편하고 행복하고 좋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순종하는 삶에 있습니다.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의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1년은 이렇게 사시는 분들이 많아져서 우리교회가 크게 부흥할 것입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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