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년] 요단에 들어서라 (수 3:1-17)

첨부 1


요단에 들어서라 (수 3:1-17)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든지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첫발을 내디디는 것이 어렵지 일단 한 발짝만 내디디고 나면 나머지 행보는 자동적, 가속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의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정탐까지 성공적으로 마친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가나안 정복을 향한 본격적인 걸음을 내디디는 장면인데 그 첫 발짝이 참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요단강이라는 천연장애물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시기가 공교롭게도 요단강물이 가장 범람하는 때였으니, 그것을 2백만 명이나 되는 백성이 다 안전하게 도하한다는 것은 정말 난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첫걸음은 곧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 행보에 가속이 붙느냐 아니면 브레이크가 잡히느냐 하는 갈림길인 동시에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의 리더십에 대한 백성들의 신임 여부를 결정짓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어떻게 요단강에 들어서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까?
이제 드디어 2011년의 첫 주일을 맞이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 중에 아무도 가보지 못한 이 새해의 행진을 과연 어떻게 자신 있고도 힘차게 시작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하고자 합니다.

1. '교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개인의 경건생활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본문 1절부터 6절에 "1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2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3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4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5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6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정탐꾼들이 여리고성으로부터 돌아온 바로 그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요단강 도하를 위한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그동안 유숙해 왔던 "싯딤"을 떠나 백성들과 함께 요단강가에 "이르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즉시 요단을 "건너지 아니하고" 일단은 "거기서 유숙"을 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최종 점검과 준비를 할 시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삼일 후"에 여호수아는 "유사들을 진중으로" 보내어서 이제 요단강 도하 작전에 대한 구체적인 요령과 숙지 사항을 전달하도록 했습니다.
이 '유사'란 일종의 행정직 공무원과 같은 사람들로서, 여호수아는 이들을 통하여 그 큰 이스라엘 공동체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유사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지시한 내용은 바로 여호수아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었는데, 그 첫째 요지는 "언약궤의 뒤를 좇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언약궤를 "이천 규빗"의 거리를 두고 따라가라고 한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백성들이 동시에 그 언약궤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즉 언약궤만 주시하고 있다가 그것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같이 출발하고 그 언약궤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면 되는 것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기억하고 실행하기에 실로 간단명료한 요령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스스로 성결케 하라"는 지시를 연이어 내렸습니다.
'성결'이란 통상 '의복을 세탁하고 갈아입는 것'이나 '여인을 멀리하는 것' 등 외부적으로 나타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지금 요단강 도하를 막 시작하려는 시점에 그런 시간적 여유는 없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내면적인 성결 즉 자신을 스스로 돌이켜 보고 회개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고 의지하는 심령을 새롭게 하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함께 나아가려는 큰 도약은 그 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한 각 개인이 바로 그처럼 자신의 영적 성결부터 갖춤으로써 시작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유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지시만 따르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고 덧붙여 일러 주었습니다.
요단강 도하로부터 시작해서 계속 이어질 여리고성을 향한 진군이나 나머지 가나안 정복의 길 모두가 다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그야말로 '초행'이었습니다.
즉 인간적으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는 '새 출발'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 어떻게 '첫걸음'을 내디뎌야 할지에 대하여 스스로 연구하거나 개인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 앞에서 각자의 각오와 서원을 새롭게 다짐한 후에 언약궤를 중심으로 전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 움직이는 대로만 같이 가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군대에서 각개 병사는 전투에 돌입하기 위해 자기가 어디로 이동해야 할지, 언제 출발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염려는커녕 사실 알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그것은 위에 있는 사령관이 다 결정하는 것이고 자신은 직속상관을 통해 내려오는 지시만 따르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병사는 그 속한 부대에서 탈영을 하지 않고 낙오만 하지 않으면 자기가 가야 할 곳을 향하여 언제나 정확하게 출발하고 틀림없이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각 성도의 경건생활' 역시 반드시 '교회중심의 공동체적 삶'과 늘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개인의 신앙 행진이 혼자 곁길로 가거나 마귀의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을 방지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처럼 신앙고백을 한 개인 신자'들을 따로따로 흩어두지 않으시고 함께 모으셔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새해에도 우리 각자가 철저하게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와 모든 행보를 같이 함으로써 자신이 가야 할 '바른길'을 향하여 힘찬 첫걸음을 함께 내딛고 또한 끝까지 낙오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경 말씀'을 통하여 앞길을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7절로부터 13절까지의 말씀에 "7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 8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9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10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11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 12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십이 명을 택하라 13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시기 직전에 다시 한 번 여호수아를 통하여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크게 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요단강 도하가 바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사용하시는 첫 역사이며 바로 그 첫걸음부터 동행해 주시겠다고 확약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 역시 이스라엘의 신참 지도자로서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부터 확실히 믿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할 것이라"고 다짐해 주시는 이 말씀이 그에게 있어서는 다른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격려요 힘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대한 선배 지도자 모세 역시 오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해 주셨던 말씀 하나만 붙잡고서 그 막막하게만 보였던 40년의 광야 여정을 인도해 내는 과업을 훌륭히 완수했으니, 여호수아 역시 그대로만 하면 아무 어려울 일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는 이리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불렀습니다.
즉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재확인해 주신 약속의 말씀을 그들에게 그대로 전해 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여호수아의 설교의 요지는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정복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가나안 족속, 헷 족속, 히위, 아모리, 여부스 등 실로 쟁쟁한, 그 싸움 잘하는 족속들을 맞이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보다도 그들과 맞서 싸울 용기와 자신감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그런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수아는 '그 강한 민족들을 내가 아니고 너희 자신의 힘도 아니라 오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너희들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것이다.'라고 확신을 심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가운데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물 위로 첫발을 내디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는" 놀라운 기적이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처럼 지도자와 백성 사이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우선 공유되면 정말 다된 일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먼저 목사는 늘 자신은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사환'에 불과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원로목사님의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습니까?
교회의 어려운 일을 위해 기도하시다가도 '원태야, 이 교회가 니 교회가? 주님의 교회이지.'라고 당신 스스로 되새겨 보시게 되는 순간 모든 염려를 한순간에 벗어버리게 되셨다는 간증 말입니다.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가야 할 것에 대해서 목사는 아무 걱정이나 고민할 것 없이 그저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의 뜻대로, 그 말씀대로 성도들을 가르치고 인도해 가면 되는 것입니다.

교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목사'를 통해 인도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인과 목사가 선포하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음을 깨달을 줄 아는 교인 사이는 천양지차입니다.
전자는 '저 목사를 믿다가 내가 망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당연히 따르게 됩니다.
목사 역시 사람인 이상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성경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인 줄로 깨닫는 성도는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철두철미하게 성경중심으로만 설교를 하고 목회를 하는 목사는 바로 그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인간적인 연약이나 오류를 다 걸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1년을 향하여 출발하는 이 첫 주일부터 '너희는 이리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주의 사자를 통하여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실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듣고 믿고 의지함으로써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담대하게 출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영적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하는 신행일치의 본을 따라가야 합니다.

14절 이하 17절에 기록하기를 "14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15(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16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요단강에 진입하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대로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제일 선두에 선 가운데, 백성들은 요단강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그때가 마침 "모맥 거두는 시기" 즉 봄철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도하하려던 4월경은 상류에 있는 헤르몬 산의 눈이 녹아내려서 강의 수위가 최고에 달하게 되는 때였음을 가리킵니다.
즉 곧 있을 요단강 도하가 결코 '얕은 개울물'을 건너가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는 바로 그 순간 그처럼 노도와 같이 흐르던 요단강 물이 순식간에 "그쳐서" 벽처럼 "쌓이게" 되었습니다.
"아담 읍"이란 여리고 북쪽으로 약 30km 지점에 있던 동네인데, 요단강의 물이 원래 흐르던 방향에서 막히게 되자 그쪽까지 넘쳐흐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실재로 1267년에도 요단강의 물 흐름이 막혀 그 주변지역에 범람했다는 기록이 아랍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하여튼 자연 현상을 어떻게 이용하시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정확한 시간과 정확한 장소에서 마음대로 일어나게 하시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초자연적 기적입니다. 
  
그처럼 요단강물이 "온전히 끊어지는" 기적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을 밟으며 강을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과거 홍해의 기적을 분명히 상기하게 되었을 것이며, 그들의 아버지 대에서 체험했다고 전해 들었던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을 이제 자기네들도 직접 체험하게 된 것에 대하여 감격에 겨웠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신나는 요단강 도하가 진행되던 내내 한 가지 특이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그 제사장들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도하를 끝낼 때까지 요단강 한가운데에 요지부동으로 서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제일 먼저 강물을 밟았고 그로 인하여 물이 갈라졌으니 제일 먼저 건너갈 특권도 그들에게 있음직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제사장들은 오히려 제일 마지막까지 기다렸을 뿐 아니라 그것도 강의 정중앙 위치에 '굳게' 서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제사장들의 믿음을 통하여 백성들을 안심시켜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강물이 끊겨지기는 했지만 그 '물벽'이 언제 다시 터질지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제일 먼저 건너편으로 건너가 버렸더라면 나머지 백성들은 자기네가 건너가는 도중에 그 끊겼던 요단강물이 자기들 머리 위를 덮치면서 다시 흐르게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어찌하든지 빨리 건너가려고 서둘다가 큰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멘 채로 그 요단강의 마른 땅 한가운데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사장들을 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얼마나 듬직했겠습니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거기에 서 있는 한 지금 강을 건너가고 있는 그들은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만약 강물이 다시 터져 흐른다면 제일 먼저 제사장들이 빠져 죽고 언약궤가 유실될 것인데, 하나님께서 결코 그러실 리가 없으니 모든 백성들은 마음 푹 놓고 건너갈 수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제사장들은 요단강 도하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끝까지 안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확신을 '입'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백성들에게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수많은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갈 때 한 사람 한 사람 다 그런 제사장들의 모습을 직접 보고 지나가면서 그들 역시 똑같은 확신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고 육영수 여사의 피살 사건 때에 그 저격 장면이 신문지상에 큰 사진으로 나왔었습니다.
그런데 그 암살범이 단상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순간 그 자리에 동석하고 있던 모든 고위직 관리들은 다 좌우로 날쌔게 도망치고 있었고 오직 육 여사만 정자세로 똑바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 밑에는 '목숨을 내놓을 각오 없이는 그 자리에 앉지 말라'는 제호가 붙어 있었습니다.
대통령을 모시고 국가의 대사를 돌보기 위해 그런 높은 관직을 받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자기 목숨 하나쯤은 그 어느 순간에라도 바칠 각오를 가지고 있어야 마땅하다는 날카로운 비판이었습니다.

하물며 교회의 지도자 된 자들은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혼자 꽁무니를 빼고 자기 보신부터 먼저 하고 보자는 식으로 교회를 섬기겠다고 한다면 정말이지 목사나 장로가 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혼자 얼른 '요단강'을 건너간 후에 다른 교인들이 뒤따라 건너오기만을 기다린다든지, 혹은 다른 교인들이 먼저 건너가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고 뒤따라가는 자세로서는 결코 교회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사와 장로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굳게 서 있는 모습' - 이것은 정말이지 백 마디의 말보다 훨씬 더 강력한 용기와 힘을 교인들에게 전해 주게 됩니다.
교회의 지도자 된 자들은 자기 자신이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당회나 제직회 석상에서가 아니라 바로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생애 최고와 전부를 다 바치면서 죽도록 충성하는 몸'을 통하여 보여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새해에도 우리 경향교회의 교역자들과 당회원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물을 막아서면서' 늠름하게 자기 직분의 자리에 굳게 서 있고, 우리 경향의 성도들은 그런 지도자들의 신행일치의 본을 따라서 한 명도 흔들림 없이 '2011년의 요단강'을 완벽하게 건너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전히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유한한 존재인 상태로 또 하나의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2011년을 어떻게 출발해야 할지에 대하여 혼자 고민하거나 무슨 도를 닦아야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 방향을 찾기 위하여 오랫동안 묵상을 하고 어떤 개인적인 특별계시를 받아야 할 필요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교회'와 보조를 같이 하고 '성경'의 약속을 믿고 '영적 지도자'들을 본받아 따라가기만 하면 정말 '요단강물' 속을 향해서라도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요단에 들어서라' - 우리도 이제 이 첫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2011년 역시 주일마다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모든 공예배와 기도회에 부지런히 참석하면 우리의 걸음은 결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인 저나 평신도인 여러분이나 다 똑같이 시행착오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오직 '들은 말씀을 생활에서 실제로 체험'하면서 살아가면 우리의 미래는 틀림없이 '사시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축복의 길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리고 경향의 교역자들이 더욱 기도처와 전도의 현장을 눈물과 땀으로써 지키고 경향의 감독들이 우리 교회의 이 많고도 중한 일들을 위하여 곳곳에서 기둥처럼 힘들게 떠받치고 있으면서도 요지부동으로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지킬 때에, 우리 모든 경향의 성도들도 이 '요단강' 같은 한 해도 '마른 땅'처럼 힘차게 통과해 나갈 수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2011년이라는 '아무도 지나보지 못한' 새해를 맞이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와 '약속의 말씀'과 '앞장 선 지도자'들을 통하여 이끌어 주시는 인도를 따라서 큰 확신 중에 첫걸음을 내디딤으로써, 끝내 '때가 이르매 열매를 거두는' 축복의 땅을 정복해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