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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오직 예수, 오직 믿음 (롬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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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 오직 믿음 (롬 1:16-17) 


2011년 새해 첫날 하나님 전에 나아와 예배하는 사랑하는 높은 뜻 정의 교회 교인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정 그리고 여러분이 경영하시는 모든 일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입니다. 사람들은 새해가 복되기를 기대하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들의 삶도 복되기를 위하여 축원을 합니다. 그래서 새해의 인사는 언제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입니다.

복에는 큰 복과 작은 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큰 복과 작은 복을 잘 구별할 줄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큰 복을 놓치고 작을 복을 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큰 복을 작은 복으로 알고 작은 복을 큰 복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크고 좋은 복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무슨 복을 제일로 받고 싶으신가요? 우리가 대부분 받고 싶어 하는 복은 건강, 사업의 형통, 부요함, 가정의 평안과 평화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복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는 복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아닙니다.

최고의 복은 상투적으로 들리실는지 모르겠으나 예수님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은 사도라고 언제나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건 삶을 살았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큰 은혜와 감동을 받은 것 중에 하나가 사도바울이 전도를 위하여 넘었던 산을 넘어 본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걸어서 넘었고 우리는 버스로 넘었습니다. 아주 높고 험한 산이었습니다. 그 산을 걸어서 넘었다는 것은 당시 생명을 걸지 않고는 결단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산만 넘은 것이 아닙니다. 바다도 건넜고 강도 건넜습니다. 당시는 그 모든 것이 다 생명을 걸어야만 하는 위험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일들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 생명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는 자신의 고백과 같이 바울은 정말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토록 전하려고 하였던 복음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로마서 1장 1절에서 4절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아멘.

바울이 생명을 걸고 전하고 싶었던 복음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이 복음이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복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자체가 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시고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 복을 누림으로 행복하고 계십니까?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지혜와 능력의 차이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다른 피조물 특히 동물에 비해 더 훌륭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요? 사람들은 대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동물들이 우리 인간들 보다 더 훌륭하고 지혜롭고 더 행복하게 사는 것 같아 보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두꺼비 중에는 사람 50명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독을 가진 독 두꺼비가 있답니다. 그런데 그 독 두꺼비들은 자기 동족들과 싸울 때 절대로 그 독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독을 가진 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동족과 싸울 때는 힘으로 레슬링만 하지 독으로 상대방을 제어하려고 하지 않는답니다.

인간은 독 두꺼비나 독 뱀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50명 정도를 한 꺼번에 죽일 수 있는 독이 아니라 온 인류를 몇 번 씩이나 죽일 수 있는 엄청난 무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무기들을 동족인 인간들과 싸울 때 사용합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더니 금새 입장을 바꾸어 남한을 핵으로 공격하겠다고 매일 엄포를 놓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 인간들을 보고 그 두꺼비와 뱀이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설교중에 표현하기는 좀 불편하지만 아마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겁니다. <미친 놈들.>

동물의 세계는 약육강식입니다. 약한 동물을 강한 동물이 잡아 먹는 것이 저들 세계의 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한 동물이 멸절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강한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서만 사냥을 하기 때문입니다. 배가 부르면 절대로 약한 동물을 쓸데 없이 공격하여 죽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자와 같은 강한 동물들이 우리 인간들과 같이 욕심이 많고 그 욕심 때문에 어리석어서 생존을 위하여 사냥을 하지 않고 욕심을 위하여,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사냥을 한다면 강한 동물과 약한 동물 모두가 다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약한 동물은 강한 동물들의 욕심 때문에 씨가 마르게 될 것이고, 강한 동물들은 약한 동물들이 다 씨가 말라 버렸기 때문에 굶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세계에도 개인차가 있을 겁니다. 어떤 놈은 힘이 세고 어떤 놈은 힘이 약하고, 어떤 놈은 많이 지혜롭고, 어떤 놈은 그만 못하고 하는 식의 차이 말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 능력의 차이는 엄청나서 시간이 가면 갈 수록 둘 사이는 벌어지게 됩니다.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빌게이츠와 아프리카에서 굶어 죽어가는 부족민의 차이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물의 세계에는 그와 같은 차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욕심 때문에 다 쓰지도 못할 돈을 벌어 모아 놓고 어떤 사람들은 먹을 것 조차 없어 굶어 죽어가는 꼴을 보면서 동물들이 우리 인간에 대하여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역시 설교 중에 표현하기는 좀 불편하지만 아마 틀림없이 ‘바보 같은 놈들’이라고 말할게 틀림없습니다.

동물의 세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능 중에 하나는 종족번식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동물들은 그 종족번식의 본능까지도 경우에 따라서는 절제할 줄 압니다. 자기 종족이 번식이 너무 많아져서 개체수가 많아지게 되면 스스로 절제하여 그 수를 언제나 조절합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나름대로 적절한 개체수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잘 할 줄 모릅니다. 성은 오락이 되었고, 그 문란함으로 가정과 세계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절제할 줄 모르는 욕심 때문에 어느 곳은 필요 이상으로 인구가 많아져서 어려움을 격고, 또 어떤 곳은 욕심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인구를 조절하여 어려움을 격습니다. 동물들 세계와는 정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들은 수도 없이 많이 들 수 있습니다. 이 몇 가지 예만 보더라도 오히려 동물들이 우리 인간보다 더 훌륭하고 지혜롭고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능력과 지혜는 동물들보다 인간이 더 뛰어난데 왜 실제의 삶은 그와 비례하지 않는 것일까요? 동물들이 우리 인간들보다 더 지혜롭고 더 훌륭하기 때문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들보다 비교도 되지 않게 열등한 동물들이 어떤 면에서 보면 인간들 보다 더 지혜로워 보이고 훌륭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물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연법칙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법을 벗어나거나 어기는 동물들은 세상에 없습니다.

동물들 속에 심어져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법이 동물들의 삶을 질서 있게 하고 균형 잡히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법과 식을 거절하고 벗어납니다. 자기 욕심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막으려고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였습니다. 우리에게서 행복을 빼앗기 위하여 사탄이 한 일은 여러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지혜도 뺏지 않았고, 능력도 뺏지 않았고, 에덴 동산의 그 풍요함도 빼앗지 않았습니다. 단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서 그 하나만 빼앗으면 모든 것을 다 빼앗은 것과 같다는 것을 사탄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탄이 옳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탄에게 속아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대로만 살지는 않겠다는 어리석은 하나님께 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법과 식대로 살지 않고 먹고 싶으면 먹고 따고 싶으면 따며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겠다는 도전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함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잃었습니다. 하나님 하나를 잃은 것은 하나를 잃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선악과 그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럼으로 모든 것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좇아 다녀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만 회복하면 모든 것이 다 회복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만 회복하면,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말씀과 식과 법을 따라 사는 것을 선택하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직 사람은 믿음으로 산다.’

대형언론사가 조사기관을 통하여 한국 사람들의 행복지수를 조사하여 발표하였습니다. 우리 한국을 포함하여 10개 나라 사람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조사한 것입니다. 10개 중 우리나라가 꼴등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매우 행복하다고 대답한 수가 일등이 브라질은 57.2%이고 4등을 한 베트남이 49.1% 였는데 우리나라는 7.1%로 꼴등이었습니다. 

돈과 행복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퍼센테이지도 조사되었는데 덴마크 사람들은 47%가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인도네시아 사람들도 44%가 무관하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면에서도 꼴등인 우리나라는 7.1%만이 무관하다고 대답을 함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돈과 행복을 얼마나 밀접한 것으로 생각하는가가 나타났습니다. 다른 9개 나라 사람들은 대개가 가장 행복한 사람을 자기 자신이라고 답을 했는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돈이 많은 빌게이츠를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꼽았습니다.

이 조사를 잘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돈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고,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1960년대와 비교했을 때 국민소득이 250배나 늘어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경제로 보았을 때 우리 한국은 세계 제 13위 국가이고 세계 각 나라에서 한강의 기적을 배우겠다고 몰려오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행복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이 옳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제일 높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꼴찌였습니다. 그것은 돈은 우리의 행복과 생각만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2011년에는 돈 보다, 세상 보다 하나님께 더 집중하는 한 해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1년 새해 첫날을 맞아 하나님 전에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이 한해의 키워드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 더 가까이’입니다.

주께 더 가까이 가시는 한 해가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주와 점점 더 가까워지시는 한 해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를 점점 닮아가는 한 해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락교회 협동목사로 고등부 설교를 할 때 설교만 끝나면 2층 예배당에서 몇 십 명의 아이들이 내려가곤 했었습니다. 선생님 한 분을 보내어 그 아이들이 누구인지, 왜 그러는지를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알아 본 결과 그 아이들은 고등부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에 실패하여 재수를 하고 있는 아이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위하여 선생을 배치하고 반을 만들었습니다. 베드로 반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반에 안수현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재수를 한 후 다음 해에 고대 의대에 합격하였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후 ‘스티그마’라고 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을 하였습니다. ‘스티그마’란 ‘흔적’이라는 뜻의 헬라어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고 고백했을 때 썼던 단어입니다. 스티그마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예수를 그냥 믿지 말고 잘 그리고 열심히 믿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몸에 지니고 살자며 젊은 청년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수현이는 정말 예수 믿는 사람답게 의사생활을 하려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의사들이 파업을 할 때에도 의사는 환자 곁에 있어야 한다며 파업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의사 사회에서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는지는 여러분들도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러나 수현이는 언제나 옳고 그름의 판단을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에 따라서 했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군의관 시절 사병들과 함께 풀밭에서 식사를 하다가 유행성 출혈병에 감염이 되어 33살의 나이에 요절하였습니다. 33살 젊은 청년의 장례식에 수 천 명의 조문객들이 몰려왔습니다. 대부분의 그의 진료를 받은 환자들이었습니다. 그의 짦은 인생을 정리한 책이 얼마 전 발간 되었습니다. 그 책이 바로 ‘그 청년 바보 의사’입니다. 그 책을 읽으면 그 젊은 청년에 몸과 삶에 나타난 스티그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수현이보다 똑똑한 사람, 잘 난 사람은 세상에 많습니다. 젊은 청년 수현이의 보물은 믿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를 그렇게 훌륭하게, 아름답게 하였습니다. 제 설교를 좋아하던 아이가 예수를 나보다 더 잘 믿어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하나님 앞에 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2011년 새해 첫날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느닷없이 수현이가 생각났습니다. 전에는 제가 그 아이의 선생이었지만 이제는 그 아이가 저의 선생이 되었습니다. 쓸데 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그냥 예수 열심히 믿어 나의 온 몸과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남아 내 삶의 뒤를 따르는 많은 자손들과 후배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살다가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가고 싶습니다.

지혜롭고 아름답고 훌륭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데 많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50년 전보다 250배나 부요해 진 나라입니다만 그렇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250배나 행복해 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증인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지금보다 두 배 정도만 부요해지면 아주 행복해 질 것 같은 환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예수를 붙잡으십시오. 예수님께 좀 더 욕심을 내시고 집착하십시오. 우리 몸에 예수의 흔적이 남으리만큼 한번 열심히 살아보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왜 복음이라고 바울이 외쳤는지, 왜 바울이 그것을 위하여 생명을 걸었었는지를 몸으로 느껴보고 삶으로 체험해 보시는 한해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간증할 수 있는 한해가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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