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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서 스스로 굳세라 (학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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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스스로 굳세라 (학 2:4)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미국은 큰 위기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때 미국의 제 3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트루먼 대통령은 취임 연설 끝머리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는 솔로몬의 기도에서 인용한 기도였습니다. 그는 매사에 이렇게 기도하며 대통령직을 훌륭하게 수행하였습니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인기도 많고, 늘 반장만 하셨겠지요?”
그러자 트루먼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 그 반대란다. 나는 어렸을 때 재주도 없었고, 운동도 못했고, 누가 조금만 큰 소리를 쳐도 겁을 잔뜩 집어먹는 겁쟁이였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요?”
“나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못할 것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꼭 믿었단다. 그래서 난 아무런 재능도 없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모든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항상 노력했단다. 하나님께서 옆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단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실망하고 좌절한 채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힘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곳을 봐도 전혀 나아갈 길이 없는 것처럼 캄캄한 어둠으로 가득한 그런 절망의 순간도 있습니다. 허우적대면 댈수록 더욱 깊이 빠져만 들어가는 늪처럼 그렇게 하루를 더 지탱하기조차 힘든 그런 때가 우리 앞을 가로 막기도 합니다. 그래도 환경의 어두움은 그래도 낫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실망과 좌절은 정말 극복하기 힘든 어려움입니다. 어떤 때는 진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좀 불러 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소원하던 그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마음도 몸도 너무도 아프고 힘들고 지쳐서 이제 그만 하고 싶은 때, 그래서 “하나님 이제 그만 죽기를 소원합니다” 하고 누워 있을 때 빵과 물을 준비해 놓으시고 “자 일어나 먹고 힘내라”고 하시던 주님의 음성이 얼마나 감사하고 큰 은혜인지요? 

어쩔 수없이 우리 인생은 작은 일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주의 여건 때문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기대만큼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위로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데 모든 것이 그 반대로만 느껴질 때 또한 속상합니다. 나름대로는 모든 것이 나아지겠지 하고 기대를 하지만 여전히 그런 일이 계속될 때 힘이 다 빠지고 맙니다. “이제 더 이상 몸부림치기도 싫어, 이제 더 이상 실망하기도 싫어. 이제 더는 못해. 아니 하고 싶지 않아.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단 말야.” 너무도 속상해서 울부짖을 때 아니 울다 울다 지쳐 쓰러졌을 때 누군가가 조용히 나를 어루만지며 이야기합니다. “자 힘내 내가 있잖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쳐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 되어 끌려간 지 70년 너희들 가운데 돌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다 돌아가도 좋다는 다리오 왕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나쁜 놈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계속해서 성전을 짓지 못하도록 훼방을 합니다. 그나마 가진 것도 많지 않습니다. 성전을 짓기에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총독 스룹바벨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책임지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도 다 힘이 빠져 버렸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돌아왔어.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어.”
“처음부터 시작이나 하지 말 것을. 괜히 힘만 들고 되는 것도 없고, 이제 더는 못해, 아니 안 해, 나는 그만 둘 거야”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이 말씀보다 더 큰 은혜로운 말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스스로 굳세게 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힘들다고요?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어할 때마다 우리를 찾아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이름이 그래서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분이 따뜻한 위로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정말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은 아는데요 결과적으로는 다 잘 될 거라는 것 저도 잘 아는데요 그래도 섭섭한 마음이 드네요. 왜 꼭 이래야 되는 건가요?”

“다윗을 생각해 보렴. 사무엘 선지자가 그 집을 찾아서 함께 잔치를 벌일 때 막내 다윗이 어디에 있었니? 형들은 다 그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면서 다윗에게는 양을 지키도록 했지. 그 때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렴. 다윗은 너무도 속이 상했더라. 그래서 나 안 해 그러면서 나가 버렸더라 그런 말이 어디 있던?”
그렇습니다. 다윗은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어도 그 일 때문에 하던 일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런 다윗이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다 잘 압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길이 남는 가장 위대한 왕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그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래서 골리앗과 싸울 때도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하며 달려 나가며 물매에 돌을 감아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모스 선지자는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하셨던 것이요 역대 하 15:2에서도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스스로 굳세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은혜 안에서 스스로 굳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기독교 작가 가운데 한사람인 보함은 자기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다음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직 청년이었을 때에 나는 친구의 집에서 그 친구와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집에 처음 갔었고, 그 친구는 나에게 응접실 건너편에 있는 방은 출입금지의 방이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아무도 그 방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그의 말을 따라서 나는 그 방에는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중에 나는 잠이 깨었는데 그때 출입금지의 방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래서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내다보니 그 방의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침대 위에 한 어린 소년이 누워 있었다. 그 소년은 정신병으로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는 소년이었다. 그 소년이 누운 침대 앞에 친구의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침대에 누워 있는 소년을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그때 흐느끼면서 정신이상인 자기 아들에게 속삭이던 그 어머니의 말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너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고 너에게 생명을 주었다. 나는 너에게 먹을 것도 주며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지켜주고 있단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 그 어머니의 고민은 사랑 없음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오는 고민이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었으나 자식은 아직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일방적인 사랑의 고민을 그 어머니는 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고민도 사랑의 고민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계약관계를 맺은 백성 이상이었다. 계약대로 한다면. 하나님과의 약속을 포기하고 우상과 음행으로 얼룩진 이스라엘이 온전할 리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손을 벌리고 계신다. 이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고민이다. 당신은 진정 하나님의 고민을 함께 느껴 본 적이 있는가. ‘그런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 하는 하나님의 탄식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보함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자주 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 한 번도 하나님은 나를 떠나 다른 데로 가신 적이 없으십니다. 단 한 번도 나에게서 눈길을 거두신 적도 없으십니다. 단지 나 혼자 버려진 것처럼 생각한 것은 그저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냥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보십니다. 나는 내 마음에 안 드는 일 나를 속상하게 만들고 내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들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나를 그 일을 통해서 더욱 아름다운 보물로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도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들 속상해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니. 그러니 너희 마음을 굳세게 하렴. 모든 것을 편안하게 생각하도록 하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 마음이 자꾸 드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을 바로 잡기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마음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네 마음은 환경과 주위 여건에 따라 많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계산을 합니다. 이건 이렇게 하면 될 것 같고 이건 이래서 안 될 것 같고 뭐 어쩌고저쩌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서 한 가지 빠진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뿐입니다. 내가 잘 나서 믿은 것 아닙니다. 내가 남달라서 하나님이 나를 자녀 삼아주신 것도 아닙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자기를 가리켜서 내가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했을까요? 그랬던 나를 하나님이 자녀 삼아주셨는데 이제 새삼스럽게 내가 이러고저러고 했다고 해서 나를 모른 척 하실 것 같습니까? 아니죠. 사람들은 나를 따돌리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모른 척 하신 적이 없으세요. 아니 단 한 번도 하나님은 내 손을 놓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내 손을 꼭 잡고 계셔요. 그러기에 바울 사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고 주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은혜라는 말 자체가 내 영향력이나 내 수고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까? 아니 내 모습이 아무리 아닌 것처럼 생각이 되어도 그런 나를 지금도 하나님은 붙잡아 주시고 여전히 함께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자리에 있을 수가 있어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고 다를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나를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데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다거나 아니면 나는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 아니면 내가 하고 있는 것이나 하지 못하는 것 또는 내가 알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것 또는 내게 힘이 있고 없고 하는 것이 그 판단 기준이 아닙니까? 
그래서 은혜입니다. 은혜는 이 모든 것을 다 뛰어넘는 것입니다. 내가할 수 없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는 다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날마다 담대함을 얻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사랑 안에서입니다.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랑을 청춘 남녀의 사랑에 국한하지 않고 부부애라는 말로 바꾸어도 좋을 듯싶습니다. 원앙새 같은 부부라고 하면 항상 얼굴을 마주보며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진짜 금슬 좋은 부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던 두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어서 한 마음으로 한 목표를 향해 나란히 걸어가는 부부야말로 이상적인 부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은 한 발 양보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이해하면서 공통의 목적을 향해 호흡을 맞춘다면 부부 사이의 문제는 해소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는데 나는 사랑한만한 사람만 찾고 내가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것은 결코 사랑을 받을만한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라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 누구가 내가 되기도 하고 남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부터가 우리가 속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은 주고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사랑은 받기 전에 먼저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기만 하고 받지는 않는 그런 사랑도 이상하겠죠? 자식에게 대한 부모의 사랑은 끊임없이 주고 또 줍니다. 그런데도 자녀들은 말합니다. 부모가 돼서 내게 해 준 일이 무엇이냐고. 하지만 나를 낳아준 것만도 큰 사랑이고 지금까지 있게 된 것이 다 부모의 사랑 때문이 아닙니까? 누가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막가파와 같은 이야기를 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사람들 가운데는 전혀 사람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 그런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나는 어떤가요? 그래도 나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도 똑같은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나는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님 나는 도무지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앞에서 은혜라는 말이 무슨 뜻이었습니까? 그럴 가치조차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베풀어지는 사랑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기적인 사랑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위한 그리고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주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을 속상하게 만들지만 그런 우리를 여전히 안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같으면 벌써 내팽개치고 가버렸을 텐데 그런 나를 지금도 붙잡아주십니다. 그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이 사랑을 기억하고 조금도 흔들림 없이 2011년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생각할 것은 진리 안에서입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아느냐 입니다. 아무리 세상 지식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다면 그건 헛똑똑에 불과합니다. 온갖 재료를 다 넣어서 음식을 만들어도 이것 하나가 안 들어가면 말짱 꽝입니다. 아무리 좋은 양념이 다 들어가도 이것이 안 들어가면 아무 맛도 없습니다. 그게 뭡니까? 소금입니다. 우리는 소금의 가치는 몰라도 됩니다. 소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소금의 값은 얼마나 되는지 소금의 화학 기호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도 돼요. 

하지만 음식을 만들 때 소금이 꼭 필요하다는 것과 반드시 적당량을 넣어야 된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소금이 꼭 들어가기는 해야 하지만 나무 많아도 안 되고 너무 적어도 안 됩니다. 반드시 적당량이 들어가야 합니다. 문제는 그 적당량이 얼마냐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고 묻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먼저 묻습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분입니까? 아니면 나쁜 분이십니까? 그러면 그 하나님이 보잘 것 없으신 분입니까? 아니면 아주 귀한 분이십니까? 그러면 그 하나님이 능력이 많으신 분입니까 아니면 무능하신 분이십니까? 그 하나님이 못하실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가요? 그럼 언제 사랑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로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또한 우리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주십니다. 진리는 단지 알고 있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안다면 이제 실천해야죠. 소금을 적당량을 넣어야 된다고 하는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넣어야죠. 소금은 이렇게 귀한 것이니까 하고 선반 위에다 잘 모셔만 두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습니까? 연필은 왜 있습니까? 쓰라고 있죠. 그러면 책은? 보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책은? 적어도 한 권 이상 성경책을 다 가지고 계실 줄로 압니다. 그런데 성경책을 왜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진리라는 것은 단지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그렇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됩니까? 믿어야죠.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을 믿고 그 하나님께 나의 모든 문제를 아뢰어야죠. 하나님이 해결해주시도록 요청하는 것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나 혼자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도 주님의 도우심으로는 다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는 들지 못하는 것도 여럿이 함께 하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게차를 가지면 엄청난 것도 들어 옮기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필요에 따라 하나님이 나를 돕도록 나를 맡기는 것이요 이를 위해 우리에게 깨우쳐 주신대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 되신 말씀은 그냥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그대로 따르도록 주신 것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실 때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저와 우리 모두를 통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는 역사의 산 증인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같은 회색이라도 검은 바탕에 있을 때가 흰 바탕에 있을 때보다 더 밝아 보이는 착시현상은 우리의 눈이 있는 그대로를 보지 않고 주변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전세를 살다가 내 집을 갖게 되면 더 큰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이 보입니다. 자가용을 처음 사서 행복해하다가도 더 좋은 차를 산 친구를 보면 만족감은 줄어듭니다.
“마치 착시현상처럼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불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여유가 있어도 작은 집에 만족하고, 유행이 지나가도 깨끗한 옷이면 족한 것으로 생각하고, 손가락질을 당해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언제나 미소 짓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전히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들로 하여금 진리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결코 하나님을 떠나서 나 혼자서 하라고 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으십니다. 나 혼자 끙끙거리고 힘들어하고 속상해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그 때도 여전히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결국 나 혼자만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주머니 속에 넣어 놓고 잊어버리고 있는 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손을 잡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주 안에서입니다. 주님과 함께입니다. 그러니까 나 혼자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나를 혼자 두신 적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그 주님 안에서 당당하게 올 한 해를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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