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라(왕상 18:30-40)

첨부 1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라』
▶성경본문: 왕상18:30-40  

여러분, 동가식 서가숙이란 말을 아시나요?
옛날 중국 제(齊)나라에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처녀에게 두 집에서 청혼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동쪽집의 총각은 인물은 볼 것이 없으나 부잣집 아들이었고, 서쪽집 총각은 인물은 뛰어나지만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 어려워진 처녀의 부모는 본인의 생각을 알아보자며 처녀에게 물었습니다. “어느 쪽으로 정하기가 쉽지 않구나. 네 뜻은 어떠하냐? 만일 동쪽집으로 시집가고 싶으면 오른손을 들고, 서쪽집으로 시집가고 싶으면 왼손을 들어라.” 그러자 딸은 망설이지도 않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깜짝 놀란 부모가 그 이유를 묻자, 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밥은 동쪽집에서 먹고 잠은 서쪽집에서 자고 싶어요.” 동가식서가숙이란 말은 여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이 집도, 저 집도 포기 못하는 제 나라 처녀처럼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게 됩니다. 

21절입니다. 다함께 읽어보시죠.. 
아합 왕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바알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었고 그 결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3년 6개월 동안 비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엘리야는 머뭇 거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갈멜산으로 불러 모아 그 곳에서 누가 참 하나님이신지를 직접 보라고 말합니다.  
결국 38절처럼 여호와의 불이 내렸고 39절처럼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심이 밝히 드러났고 모든 백성들은 여호와 앞에 엎드려 그가 참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 천년전 엘리야 시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우리 가운데 누가 당당하게 그게 뭐야?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 자신을 깊이 되돌아볼 때 우리 역시 사실은 동가식 서가숙하기 원했던 그 제 나라 처녀처럼, 또 수 천년전 엘리야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있긴 하지만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머뭇머뭇하고 있을 때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가 아니라 지금부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지금부터 머뭇머뭇하던 우리의 발걸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온전하지 못했던 우리의 신앙이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이 아침 저와 여러분 모두가 지금까지와 지금부터가 달라지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지금까지와 지금부터가 다른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머뭇거리는 신앙에서 하나님만이 하나님으로 여겨질 수 있는 참된 신앙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첫째로, 방향 - 머뭇거리는 신앙에서 하나님만을 따르는 신앙으로 방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21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동가식 서가숙 식으로 그렇게 우리가 편한 대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섬기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긴다고 하였을 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며 고백하는 일편단심의 신앙임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사람도 사람을 향하여 나에게만 집중해주기 바라고 나만 바라봐주기 바라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친하게 지내고 다른 여자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가정해봅시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전문용어로 바람이라고 하죠. 이랬을 때 기분이 어떠실 거 같습니까? 유쾌하고 행복한 분 계십니까? 왜 불쾌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까? 내 남편이라 그런 것 아닙니까? 내가 사랑하는 내 남편이라 그런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다른 것은 안 되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전념하기 원하는 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누구보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우리 역시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다른 것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럼 나머지는요? 다 덤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면 나머지는 덤으로 따라옵니다. 왜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없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사랑하고 그 무엇인가도 사랑하면 하나님도 그것도 다 가질 수 없습니다. 다 놓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도 저도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도저도 아무것도 안 되는 세상 살기 원하는 성도님들 계십니까? 그럼 하나님도 사랑하고 다른 것도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이도 저도 다 잘 되는 인생 살기 원하십니까? 그럼 하나님만 사랑하십시오. 
오늘 이 아침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만을 사랑함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방향에서 오직 하나님께로만 방향을 정하는 성도님들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 거리 - 멀리의 신앙에서 가까이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30절 함께 봉독합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처럼 무조건 불을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떼를 쓰고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무엇이 먼저인지 그 순서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보기 위해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야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백성들로 하여금 실제로 제단 가까이 오라는 의미도 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진 거리를 좁히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여러분, 날씨가 엄청나게 더울 때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에어컨으로 선풍기곁으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날씨가 추울 때 따뜻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난로곁으로 히터 곁으로 가까이가는 것입니다. 

에어컨의 위력은 에어컨이 없는 곳에서는 느낄 수 없습니다. 히터의 위력은 히터가 없는 곳에서는 느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력과 은혜를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는 누릴 수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과의 거리를 멀리하면 하나님의 그 은혜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보여 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졌을 때 이들은 3년 6개월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는 비참한 삶의 현실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목격한 이후 그들에게는 45절에 보니 큰 비가 내리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메마름과 곤고함과 가뭄이 해갈되는 역사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함께 말씀을 찾아볼까요? 시73:27-28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복 인줄로 믿습니다. 그럼 그 반대도 성립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화라는 것입니다. 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셔서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저주의 길, 화의 길을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으로 축복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 수축-무너진 제단을 수축해야 합니다. 

30절 다시 한번 봉독합니다.  
여기서 제단을 수축했다는 것은 없는 제단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제단을 새롭게 회복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에 제단을 하나님께 쌓았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단이 무너진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아 올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무너진 제단은 어디입니까? 여러분의 무너진 제단은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간 다시 한번 여러분의 무너진 제단을 쌓아올리길 바랍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제단이 무너진 성도님들이 계십니까? 
이사야 56장 2절에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의 제단을 지키는 성도 그 성도를 하나님이 지켜주심을 믿으십니까? 

솔로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천번제를 드림으로 전무후무한 놀라운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전무후무한 축복의 인생으로 살기 원한다면 하나님을 감동시킬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려서부터 주일 성수, 주일 성수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옛 어르신들은 주일이면 외식도 금하고 필요한 것을 다 주일 전에 미리 사며 심지어 하나님께 드릴 헌금도 다리미로 빳빳이 다려서 준비된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는 동일하게 같은 단어 주일 성수를 외치지만 그러나 우리의 주일 성수는 어르신들의 주일성수와는 너무 많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요즘의 우리 주일 성수는 정확히 말하면 솔직히 주일반수에 가깝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전에는 주일 오전 예배와 주일 저녁예배 이렇게 두 번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하루 종일 예배 드리는 삶을 살았던 것이죠. 

그러나 오늘날 사회가 복잡 다양해짐에 따라 저녁예배는 점차로 오후예배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실 편의를 위하여 저녁 예배를 오후예배로 변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저녁예배 드렸을 때의 그 예배의 열정이 오후예배에 있는가 하면 그렇다고 당당하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사실입니다. 
우리 교회 뿐 아니라 한국 교회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미 오후예배는 중직자 예배가 된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후예배는 중직자용예배가 아닙니다. 
주일오후예배는 선택이 아니라 아직까지 필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는 것입니다. 낮 예배 드렸으니 그것으로 자기는 주일 성수했다고 생각하는 그 착각이 오늘날 한국교회 성도들의 영적 영향력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10:25절에 보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가 되어갈수록 사단은 모이기를 폐하게 합니다. 
많이 모이지 못하게 합니다. 길게 모이지 못하게 합니다. 자주 모이지 못하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모이면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죠. 모이면 응답이 나타나기 때문이죠. 모이면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안디옥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반수하지 말고 온전히 성수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요예배와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정해진 공예배의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고 지킬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무너진 예배의 제단이 회복되면 반드시 우리의 삶도 회복될 것입니다. 무너진 예배의 단이 수축되는만큼 우리의 삶도 수축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배의 제단을 회복하는 성도들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것은 단순히 참여하지 않던 예배에 참여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32절에 보니 도랑을 만들고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위에 놓고 통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사이에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부으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물이 제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 찼더라고 35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무너진 단을 수축하였다면 이제 불의 응답을 기다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준비

엘리야는 그냥 단순히 무너진 단을 대충 쌓아올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불을 내리실 모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였습니다. 
여러분, 32절에 도랑을 만드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나무를 벌여놓고 송아지의 각을 뜨는 것은 쉬운 일입니까? 통넷에 물을 채워다가 세 번이나 반복하여 붓는 일은요? 3년6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아 온통 가뭄인데 어디서 물을 구해다가 12통을 부어야 한단 말입니까? 결국 제단과 도랑에 물이 가득 넘치도록 준비한 후에야 엘리야는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너진 예배의 제단을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불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나오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각양각색입니다. 예배에 10분전 20분전에 와 간절히 기도하며 예배를 준비하는 성도가 있는가하면 헐레벌떡 정해진 시간에 달려들어오는 성도, 또 예배 중간쯤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될까봐 어찌할바 모르며 미안해하면서 들어오는 성도, 심지어 끝날 때 다 되어서도 아무렇지 않게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오는 성도 과연 어떤 성도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요? 분명 다함께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모든 사람이 동일한 분량의 은혜를 받지 않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각자가 준비한만큼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희생한만큼 은혜를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네 준비하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 준비하는 하나님은 성경 어디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이십니까? 네 창22장 어떤 사건입니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에서 그것도 중간쯤이 아니라 마지막 아들을 단위에 결박시켜 놓고 칼을 들어 내리치는 순간에 일어났던 사건임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미리 수양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 나타나셨을때는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포기하고 드리기로 결단하고 헌신한 이후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제단의 준비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호와의 불이 내릴만큼 준비되지 못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없습니까? 
여호와의 불이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준비되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을 우리가 준비되지 못해서입니다. 

오늘 이 아침, 우리가 더 준비해야 할 예배의 모습, 헌신의 모습, 기도의 모습, 섬김의 모습은 없는지 돌아보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불을 내려주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제단을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따라해봅시다. 기도 

마지막으로 머뭇거리는 신앙에서 하나님께만의 신앙으로 가기위해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36절과 37절에 보면 엘리야의 기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셔서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돌아서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엘리야의 기도에 하나님은 불을 내려 응답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엘리야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을 위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기적이 임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이렇게 해달라고 말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우리가운데 보여주시길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가장 나를 위한 기도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엘리야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불을 내려 응답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머뭇거리는 신앙에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따르는 신앙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당신을 분명히 보여주시도록 엘리야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보다 더 좋은 기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자녀들의 모습속에서 우리의 남편의 모습속에서 우리의 직장과 사업장에서 우리 교회가운데 우리 부서가운데 우리 목장가운데 하나님이 보여진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있겠으며 그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기도는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달라는 기도여야 합니다. 나의 나 됨이 보여지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이 보여지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머뭇거렸던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하나님께만 섬기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그를 위해 다섯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방향을 하나님만을 섬기는 방향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입니다.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것입니다. 불의 응답을 받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이 보여지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다섯 가지를 통하여 여러분 모두 더 이상 머뭇거리는 신앙이 아닌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는 신앙으로 변화되어짐으로 여러분의 생애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변화의 역사, 회복의 역사, 축복의 역사가 지금부터 시작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장, 여러분과 관련된 사람들속에 분명히 보여져 나타나게 되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