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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어렸을 때 (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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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렸을 때 (갈 4:1-11)


제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진리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진리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사시는 동안에 두고두고 생각하셔야 될 부분인데 만일 못 들으셨거나 들으셨는데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면 CD를 구해서 다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치를 그의 행위에서 찾지 않으시고 당신의 은혜에서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를 사랑하실만한 이유를 우리의 행위에서 찾으시는 게 아니고 당신 스스로로부터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하는 게 아니고 믿음으로, 당신의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복음의 진리는 곧바로 오해와 반발에 부딪히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옛날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복음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첫 번째 의문은 그건 너무 쉽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이 천국에 간다면 누군들 천국을 가지 못하겠느냐. 너무 쉬워도 문제에요. 

두 번째 질문은 그것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일평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나 적당히 대충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나 아니면 안 믿다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면 내가 뭣 하러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나도 적당히 해도 되지 않느냐. 아니면 더 성실하게 산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많은 상을 줘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반발이고 

세 번째는 그건 위험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도덕적인 해이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부실 금융기관을 세금으로 구해주면 금융기관이든 업체가 책임 있는 경영을 하지 않고 또 국가가 구해주겠지 라고 방만한 경영에 빠지는 유혹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 행함이 아닌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면 행함을 소홀히 할 수 있는 도덕적인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불미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우려 섞인 반발이고 그리고 

네 번째는 그것이 정확한 성경해석이 맞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 어찌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씀만 있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성경구절도 있고 내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다는 말씀도 있지 아니하냐. 

이와 같은 모든 반발과 반문은 오늘날만 있는 게 아니고 옛날부터 있어 온 것이고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말은 복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질문한다는 얘기입니다. 반대로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복음이 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질문을 너무 빨리 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목사가 모처럼 시간을 내서 휴가를 갔는데 가자마자 교회 생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휴가를 갔으면 쉬어야지요. 가자마자 교회는 잘 있을까, 예배는 잘 진행될까, 언제 내가 돌아갈까 이런 생각만 한다면 뭣 하러 휴가를 가겠습니까. 휴가의 의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무엇과 같으냐면 누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때 자식 생각에 음식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음식을 싸 가든가 아니면 다음 기회에 자식을 데리고 오면 될 텐데 지금 자식을 먹이지도 못하면서 나도 즐기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때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혜택을 감사하고 즐길 줄 알아야 됩니다. 만끽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혜택을 만끽하는 데 서툽니다.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죄의식을 느끼고 자격지심을 갖고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가 아닌 은혜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들을 때 감사하고 아멘, 받아들이고 그것을 즐기고 만끽할 수 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몸을 비비 틀면서 나는 자격이 없는데요, 나는 그럴 사람이 못됩니다, 공짜는 없다던데 하나님이 뭔가 내게 요구하는 거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칭찬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니에요. 오해에요, 

이런 식으로 민망하게 생각하는데 누가 칭찬을 할 때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정말 겸손이지 그럴 때마다 아닌데요, 저 생각한 거 맞아요? 이런 식으로 대답하는 게 겸손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왜 이걸 힘들게 생각하느냐. 우리 의식 속에 율법주의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라 함은 행위 위주의 생각입니다. 행위 위주의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것이 잘 빠져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주의적으로 믿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가 돌아온 탕자라는 극을 썼지요. 그 내용은 탕자가 돌아온 다음 날부터의 일을 가정한 작품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탕자가 돌아온 날로 끝납니다. 아버지가 그를 맞아주고 잔치를 벌여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런데 앙드레 지드는 그 다음날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상상해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탕자가 원래 아버지를 떠난 이유는 아버지 밑에서 일하기 싫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배가 고파서 아버지에게 돌아왔고 아버지가 그를 맞아주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날부터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버지 밑에서 순종하고 일할 것이냐, 그럴 마음이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리고 만일 다시 아버지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면 아버지가 그를 쫓아낼 것이냐, 그에 대한 대우가 달라질 것이냐, 이 문제에 대한 작품을 쓴 것입니다. 

이것은 재미있는 상상이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음 날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았어요. 만일 이게 중요하다고 판단하셨다면 다음 날에 대해서 언급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맞아주었다는 것으로 끝나지 그 다음날 탕자의 의무라든가 아버지가 그를 어떻게 대해 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았어요.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이고 그 말은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말씀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가 이런 상상 저런 상상을 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든 무슨 잘못을 했든 돌아오면 하나님이 맞아주신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일에 대해서 염려하는 것은 적어도 주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걸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걸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사람은 도로 행위 위주로 돌아갑니다. 다시 율법주의로 회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사람의 의무 ․ 책임 ․ 도리 ․ 명분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도로아미타불이 돼 버립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하셨는데 우리가 그 이외의 일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람에 다시 행위 위주로 돌아올 수 있는 위험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걸 생각하지 않으신 건 아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신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누가 우리를 사랑할 때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고 감사하고 그 사랑을 즐기고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을 만끽할 수 있어야지 그게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하다가 이 사랑을 받았을까. 내가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저 사람이 실수로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나의 참모습을 보면 안 좋아할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what if, 이러면 어떡하지 이런 질문에 속히 뛰어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의무라든가 나의 자격이라든가 이런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에 좀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모든 다른 의문에 대한 답변은 자연스럽게 깨달아집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의무와 책임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좀 더 깊이 알고 좀 더 깊이 누리다보면 당연히 그 답을 얻습니다. 

어느 교인이 목사님에게 찾아와서 하소연을 하더랍니다. 신앙생활을 해 보니까 너무 어렵다고 하라고 하는 게 너무 많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게 너무 많고 내가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지키면서 살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너무 부담되고 힘들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성도님, 다른 것 하나도 염려하지 마시고 한 가지만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돌려보냈는데 

얼마 후에 그 분이 다시 돌아와서 ‘목사님 말씀대로 했더니 정말로 내 신앙이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까 만을 생각했더니 자연스럽게 기도하게 되지요, 자연스럽게 교회를 열심히 나오게 되지요, 전도하게 되지요,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싶지요,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지요, 이 모든 것이 주님을 더 사랑하려고 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 뿐만이 아니고 이전에는 마지못해서 하라고 하기 때문에 안하면 벌 받을 것 같아서 억지로 했는데 이제는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하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만끽하다보면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도로서의 사명을 맡기시기 전에 한 가지만을 물어보셨어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 가지만 물으셨어요. 

이제 베드로가 교회의 지도자가 되고 많은 수고를 하고 순교를 할 텐데 그에게 만 가지 주의사항을 얘기해도 부족하지요, 사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췄어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표현이 아니고 우리가 알아듣기 쉬운 실존적인 방법으로 똑같은 진리를 말씀하셨어요. 

또 예수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우리를 종처럼 부리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종은 하라고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 않으면 벌 받을까봐 종은 억지로 하는 것이 많아요. 

주님은 우리를 종처럼 부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친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이루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주님의 뜻이 나에게 기쁨이 되고 나의 소원이 되고 내가 그것을 바라는 바가 돼서 함께 동행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그게 아니고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 벌 받을까봐 뭔가 나쁜 일이 생길까봐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이건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아니지요.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신학적인 문제를 여러 가지 면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한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건 은혜가 율법보다 나은 것이라면 왜 하나님이 애초부터 은혜로 사람들을 다루지 않았느냐 왜 처음에는 율법을 주셨다가 그 다음에 은혜로 갈아타게 하셨느냐는 질문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으로 당신의 백성을 다스리시다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바꿔 타게 하셨는데 은혜가 더 나은 것이면 애초부터 은혜로 하던가 아니면 율법으로 시작했으면 율법으로 일관하든가 하지 않았느냐 이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이 뭐라고 대답하느냐면 은혜를 감당하기에는 인간이 너무 어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감당하지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이 어릴 때는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애들은 야단을 맞아야 뭘 합니다. 야단맞아야 공부하고 손 씻고 또 때로는 매를 들고 이래야 애들이 말을 듣지요, 어리기 때문에. 그러나 아이가 성인이 되면 더 이상 그게 통하지 않습니다. 

마흔 살 된 자식에게 매를 드는 부모 보셨습니까. 매를 들더라도 별로 효과가 없지요. 그때는 설득해야 되고 대화해야 되고 방법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예를 드는 것이 왕자가 어릴 때에는 선생이 붙습니다. 그래서 선생에게 깍듯이 복종해야 되고 선생이 하라는 대로 해야 됩니다. 

아직 배워야 되는 입장이고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렇지만 왕자가 어른이 되고 임금이 되면 이제는 더 이상 선생의 규제를 받지 않고 자기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2절을 보면 인간이 어렸을 때 율법이 후견인과 청지기 역할을 했다. 사람이 어렸을 때 여기에서 어렸을 때라는 말이 역사적으로 어느 한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인류가 어리고 그 이후에는 성숙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이 통과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사람이 어리고 성숙한가를 말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모두도 그런 과정을 통과합니다. 우리 모두도 자유라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고 그것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 때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숙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신앙이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 면도 있지만 성숙한 사람이 신앙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에서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 정권들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말을 쓸 때가 있었지요. 그 말은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일리가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민주주의가 성공하려면 성숙한 시민의식이 있어야 됩니다. 서구의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완성된 게 아니고 수백 년 걸렸어요. 왜냐하면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수준이 성숙해서 책임을 질줄 알고 자유를 감당할 줄 알고 자기의 역할을 알고 이런 이것이 잘 박자를 맞춰주어야 민주주의가 성공하지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혼동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성숙한 인간을 전제로 합니다. 만약에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용하고 이용합니다. 어차피 용서해 주실 텐데 이용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하면서 그것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절에 바울이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그 말은 성숙해졌다는 얘기지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이십세기 이십일 세기의 인간은 일 세기의 인간보다 성숙 하냐?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적게 받은 사람보다 더 성숙 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숙한 인간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고 그것을 오용하는 사람은 어린아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도박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귀한 독생자를 보내주심으로써 하나님도 리스크를 감당하신 것입니다.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리스크가 많아요. 다른 것에 대해서는 리스크가 없어요. 사람에 관계된 거의 모든 일에는 리스크가 있어요. 결혼 생활에도 리스크가 있고 민주주의에도 리스크가 있고 사람을 고용하는 데에도 리스크가 있어요. 사람을 믿는 데에도 리스크가 있습니다. 

사람에 관계된 모든 일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 사실을 아세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로 사람을 의롭다 하신 데에는 리스크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성공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공하실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성공할 줄 믿어야 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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