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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다음 세대와 함께 가는 교회 (신 6:4-9, 마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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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와 함께 가는 교회 (신 6:4-9, 마 18:1-3)


1월을 이전에는 정월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새해 첫날을 신정이라고 했습니다. 새해 들어 첫 달인 1월은 바르게 살려고 결심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2011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바르게 살고 힘차게 살기를 바랍니다. 1월을 영어로는 January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야누스’라는 그리스의 신화 이름에서 왔다고 합니다. 새해 들어 신에게 제물을 드릴 때 제일 먼저 야누스에게 바친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야누스는 눈이 양면에 있어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신입니다. 양면을 동시에 보니까 먼저 줘서 달래는지 모릅니다. 
  
2011년 목회 주제는 총회의 주제에 맞추어 ‘다음세대와 함께 가는 교회’라고 정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물러설 데 없이 벼랑에 서 있습니다. 벼랑 끝에서 다음 세대를 품고 함께 가야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입니다. 다음세대는 우리 교회의 미래이며 희망입니다. 다음 세대와 함께 가지 못하면 교회는 어려워지게 됩니다. 다음세대는 우리와 함께 가야할 세대입니다. 우리 세대를 이어받아야할 세대입니다. 우리의 후대를 책임져야 할 세대입니다. 
  
젊은이들이 잘 가는 페밀리 레스토랑에 가보면 고객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점원이 무릎을 꿇고 손님에게 주문을 받습니다. 기성세대가 자세를 낮추고 무릎을 꿇는 자세를 가져야 다음세대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다음세대라고 하는 신세대와 함께 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음세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음세대를 품는 것입니다. 
  
마셜 맥루한(Marshall Mcluan)은 역사의 세 시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원시시대로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살던 친밀한 시대입니다. 둘째는 쿠텐베르크 시대로 인쇄물이 구두전달을 대신하여 지배하던 시대입니다. 셋째는 전자시대로서 오늘날의 대중매체가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최첨단 전자시대로 다음세대들은 ‘디지털 네이티브’ 즉 디지털에 본토민들입니다. 
  
어른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녀가 필요해서 가지고 다닙니다. 예배시간에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면 끌줄 몰라서 갖고 얼른 밖으로 나가는 세대입니다. 신세대들에게 핸드폰은 가장 유용한 삶의 필수품입니다. 학교에 가다가 교과서가 없으면 그냥 학교로 가지만 핸드폰이 없으면 불안하여 다시 집으로 가서 가지고 학교에 갑니다. 이들에게 핸드폰은 전달수단입니다. 단말기를 그냥 들여다보면 기능을 다 압니다. 
  
가정에서 자녀교육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출산과 고령화 때문에 가정에서의 자녀교육은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출산율이 최저수준입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1.1명입니다. 현재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출산율은 2.1명입니다. 요즘같은 환경에서 한 가정에 둘, 셋을 낳으면 부모가 고생입니다. 그런데 한 가정에 하나를 낳으면 자녀가 고생입니다. 하나를 낳게 되면 다음세대는 양육부담이 엄청나게 많아집니다. 하나 만 낳는 것은 큰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혼자서 모두를 먹여 살려야 합니다. 많이 낳아서 부모가 고생할래요? 그 고생을 자녀에게 물려줄래요? 아무래도 부모 입장에서 좋은 걸 물려 줘야한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이라고 하셨는데 요즘은 ‘모르거든’입니다. 악한 것을 물려줍니다. 
  
신명기 4:10에는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주어 그들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를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리라”고 합니다. 신명기를 기록한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쳐 신앙적으로 동행하는 것입니다. 

  
첫째, 먼저 우리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신명기 6:6에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합니다.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내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자녀에게 물려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새길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시니”(4절)입니다. 둘째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5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마음에 새겨야 할 내용입니다. 이것만 잘 새기면 세상을 사는데 문제가 없습니다. 
  
홀로 한 분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은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을 섬길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할 것을 아셨습니다. 이방의 신을 들여와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그들에게 알게 하고 마음에 새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 형식적으로 사랑하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랑이 아니라 전적인 헌신과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마음에 새기고”라는 말씀은 자신의 의지를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시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지만 새기지 않으면 곧 사라지고 잃고 마는 것입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양의 격언에는 “상처는 모래에 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Write your hurts in the sand, carve your blessings in stone)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거꾸로 시행합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고 하십니다. 마음에 새기라는 말씀은 절대로 까먹지 말라는 말입니다. 잊지도 말고, 잃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 석자입니다. 
  
자녀교육의 잣대가 분명해야 합니다. 잣대가 분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때로는 이렇게 가르치고 때로는 저렇게 가르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모르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없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다 알고 있고 가지고 있지만 자꾸 잃어버립니다. 가지고 있지만 두고 다닙니다. 은혜 받는 족족 다 까먹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에 새기지 않고 내 것이 되지 않으면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에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가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새기라고 하시지 가지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25에는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합니다.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내 것을 만들어야 오래 간직하고 물려줄 수 있습니다. 
  
마음에 새기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지킵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렇게 하고 다닙니다. 
  
말씀을 순종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이 삶이 되게 하는 말씀대로 살려는 자세가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삶입니다. 말씀을 새기는 일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가능합니다. 새기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비석에 글을 새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옛 사람들은 산에, 바위에, 자기 이름을 새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옛날에 새겼지만 지금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북한에는 구호나 찬양하는 문구들이 돌에 깊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깊이 새긴 것은 글씨의 깊이가 1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새긴 글들은 절대 안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구호나 이름을 새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돌에 새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잠언 3:3에는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고 합니다. 잠언 7:3에는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 판에 새기라”고 합니다. 얼마나 단단히 간직해야 하는 것이기에 이렇게 간절히 말하겠습니까? 단단히 마음 판에 새겨 절대로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한 문제를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그 것을 걱정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그 것이 묵상입니다. 걱정하는 방법을 알면 묵상하는 방법도 이미 터득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걱정을 마음에 새기면 가슴앓이가 됩니다.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기쁨 충만이 됩니다. 내가 먼저 마음에 새겨야 전할 수 있습니다. 다음세대는 지금 우리 세대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둘째, 그리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신명기 6:7에는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라고 합니다. 먼저 우리 마음에 새긴 것을 다음에 자녀들에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마음에 새기지 않은 것을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되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 있으면 부지런히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봉독할 때 유다서가 본문인데 자녀들 앞에서 창세기부터 찾지 말고, 유다서 몇 장이냐고 묻지 말고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유다서는 요한계시록 바로 앞에 있는 책이고 한 장밖에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준비되지 않으면 가르치지 못합니다. 
  
어른들의 삶, 부모의 삶을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자녀들이 세상에서 만나는 첫 교사가 부모입니다. 자녀가 세상에서 만나는 첫 교과서가 부모의 삶입니다. 탈무드에는 “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두 종류의 교육을 받는다. 그 하나는 스승으로부터 받는 교육이며, 또 하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받는 교육이다”라고 합니다. 부모는 가장 좋은 스승입니다. 부모를 롤 모델로 자녀들은 스스로 아주 자연스럽게 배웁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교육법령에는 ‘교사는 곧 부모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 말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동양에서는 이미 옛날부터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했습니다. 부모는 가장 좋은 스승이고, 스승은 내 부모만큼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참 안타깝습니다. 
  
어떤 이가 ‘어떻게 정직해질 수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첫째는 약속은 반드시 지켜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당신이 옳다고 믿는 것은 거리낌 없이 말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항상 공평하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당신이 가르치는 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당신이 하겠다고 말한 것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대로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가르침입니다. 가르치는 대로 사는 사람이 가장 좋은 스승입니다. 부모의 삶은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의 목적이 바로 그렇습니다.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집에 있을 때, 길에 있을 때, 일어날 때, 누울 때 자녀들이 부모의 삶을 통하여 배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UNESCO 보고서에는 ‘왜 교육하느냐?’는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to know). 둘째는 ‘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to do). 셋째는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to live together). 넷째는 ‘잘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to be). 그리스도인의 자녀교육, 말씀교육은 이 모두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배움은 평생 과제입니다. 요즘은 평생교육원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테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사람은 미완성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배움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가르쳐야 하고, 끝없이 배워야 합니다. 
  
‘교실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희롱하고, 초등학생이 선생님을 때리고 폭언을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부모가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을 그렇게 대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겁 없이 키웠습니다. 아마 집에서 “니네 선생 게 니한테 잘해?” 이런 식으로 말했을지 모릅니다. 부모가 존경하지 않는 선생님을 아이가 존경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들도 스승답게 권위를 세워야 합니다. 
  
어느 여성잡지에 ‘꼴지 아들 1등 만든 비결’이란 글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첫째 습관은 부모와 함께 하는 아침식사입니다.
둘째 습관은 부모가 먼저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습관은 TV와 인연을 끊으라는 것입니다. 
넷째 습관은 책 읽는 재미를 알리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습관은 함께 책을 고른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습관은 매일 신문 사설 읽기입니다. 
일곱째 습관은 아이와 자주 대화하기입니다.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팁이 있습니다. 첫째는 티칭이 아닌 코칭하는 엄마 되기라고 합니다. 둘째는 옆집 아줌마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고, 좋은 스승이 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고대 영성가 히페리우스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진정한 교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부모 행동은 곧 가르침입니다. 유대인들이 매일 드리는 ‘비르카트 하드’ 기도문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인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교사’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신명기 32:46에는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합니다. 부모가 토라 교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말씀을 잘 가르칠 때 다음세대는 부모와 함께 한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결론 

노나라 대부 맹손이 사냥을 나가 살찐 새끼사슴을 생포하였습니다. 맹손은 신하 진서파에게 새끼사슴을 데리고 먼저 궁중에 돌아가 요리를 하고 술과 안주를 준비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진서파가 궁중으로 가는 길에 어미사슴이 따라오며 계속 슬프게 울었습니다. 진서파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새끼사슴 놓아 주었습니다. 맹손이 돌아와 진서파가 새끼사슴을 놓아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내며 진서파를 궁중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1년이 지나 맹손의 두 아들이 책을 읽을 나이가 되어 많은 선생을 물색하였지만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진서파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즉시 진서파를 불러 스승의 예를 갖추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여 맹손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진서파는 당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인데 스승으로 모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진서파가 새끼 사슴한테까지 그렇게 어진 마음으로 대했는데 내 아들한테는 오죽 잘하겠소?” 
  
학문이나 삶의 스승을 멘토라고 합니다. 원래 멘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름입니다. 기원전 1,200년경 고대 그리스 이타이카 왕국 왕의 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게 되어 아들 텔레마코스를 자신이 가장 믿을만한 친구 멘토에게 맡기고 갑니다. 오디세이가 전쟁에 나가 있는 10년 동안 멘토는 왕자의 스승이며 친구이며 상담자이며 아버지로 훌륭하게 텔레마코스를 좋은 인재로 키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자녀의 멘토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지식과 삶이 그들에게 가르침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뜻에 따라 자녀를 잘 가르쳐 다음세대가 우리와 함께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을 잘 새기고 그리고 잘 가르쳐 다음세대와 함께 가는 가정, 다음세대와 함께 가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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