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년] 기초를 다시 쌓는 사람들 (사 58:9-12)

첨부 1


기초를 다시 쌓는 사람들 (사 58:9-12)


하나님께 참된 복을 받아야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신년 예배 때 저는 내가 밟는 땅을 축복하고, 내가 하는 일을 축복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을 축복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을 축복하는 삶을 살려면 먼저 내가 복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만큼, 내가 느끼는 것만큼,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남을 위로해주고 복을 빌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복이 남에게 주기에는 너무 작다고 느끼거나 자신의 복을 챙기기에도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면 남을 축복해줄 수 없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나는 늘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불평이 나올 뿐입니다. 어떻게 그런 마음으로 남을 향해 진심으로 복을 빌어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참된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향해서 복을 빌어 줄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58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민족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형식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종종 금식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형식화되었습니다. 속에는 불평과 원망이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왜 우리를 돌보지 않느냐며 하나님을 향해서 항의했습니다. 

그때 이사야가 등장합니다. 이사야는 형식화된 종교성만 남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꾸짖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꾸짖는 와중에도 하나님의 희망을 약속을 전달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그런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혼의 만족을 주십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이사야 58:11) 

여기에는 우선 세 가지의 축복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영혼의 만족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영혼과 정신세계가 만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메마른 곳, 말라비틀어진 척박한 곳에서도 우리의 영혼에 기쁨과 만족함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영혼에 만족을 느끼는 인생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인생은 없습니다. 

종종 우리는 이 시대의 영웅이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취미로, 때로는 술과 담배로, 때로는 성적인 쾌락으로, 때로는 도박과 마약으로 인생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다보면 인생의 피폐함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인기 많고 잘나가던 사람도 영혼이 답답해지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즐거움이란 인간을 마취시키는 마취제와 같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즐거움들은 인간을 잠시 기쁘게 할지는 모르지만 실상은 영혼 속의 내 소리를 망각하게 하는 마취제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은 마취제가 아니라 각성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해줍니다. 내가 스스로는 만족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면서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고 하는 근본적인 실존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깨달음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압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만드시고 우리의 영에 성령을 부어주시면 우리의 영이 만족함을 얻으면서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제공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영혼이 낙담하는지를 아시기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생의 짐을 뛰어넘는 하늘로부터 오는 영혼의 쉼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체의 강건함을 주십니다

두 번째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뼈를 견고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뼈는 몸의 틀입니다. 몸의 기둥과도 같은 것입니다. 뼈가 튼튼해야 온 몸이 건강합니다. 육체의 고통은 몸 전체의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만족은 육체적인 건강과 함께 가야 합니다. 

서양 의학의 아버지라고 알려져 있는 히포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질병을 스스로 치료할 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에 치유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라 치유를 돕는 사람입니다. 병을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평안해야 우리의 육체가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연약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먼저 구해야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내 영혼이 주님의 말씀과 은혜로 강건하게 하옵소서. 내 영혼에 기쁨을 주옵소서. 내 영혼에 감사를 먼저 허락해주옵소서." 그 후에 내 육체의 질병들을 하나님 앞에 고하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이사야 58:8)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혼의 만족감을 달라고, 그리고 내 연약한 육체를 고쳐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축복들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를 주십니다

세 번째 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과 경제적인 복입니다. 11절을 보면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겨울에 잠깐 눈이 오고 4월부터 9월까지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사막으로 변합니다. 그 메마른 땅에서 물이라는 것은 생명이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은 재산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것을 쟁탈하기 위해서 서로 싸웠던 곳이 바로 팔레스타인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물댄 동산같이 네 삶에 풍족한 것을 허락해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적인 부분도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복 있는 사람을 이야기할 때도 종종 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 1:3)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23:2) 

여기서 물이란 우리의 삶의 전부인 동시에 우리의 육체를 만족하게 하는 삶의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적인 축복도 허락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녀들의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 4번째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들의 복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의 복이기도 합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이사야 58:12上)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제일 먼저 드리는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 첫 번째로 자녀를 위해 기도합니다. “내 자녀를 건강하게 해주세요. 내 자녀가 복 받게 해주세요. 내 자녀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나게 해주세요.” 부모라면 누구나 그 마음속에 자녀들이 먼저 떠오르나 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받는 복은 어떤 복일까요? 우리는 영혼이 만족하는 복, 육체적 건강의 복, 물질의 복을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여기서는 더 큰 복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황폐된 곳,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그저 돈만 많이 벌고 혼자 떵떵 거리면서 사는 것만이 복이 아닐 것입니다. 남을 세울 줄 알고 치유할 줄 알며 복을 빌어줄 줄 아는, 그래서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우는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일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의 황폐된 곳을 다시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황폐된 곳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시대가 얼마나 황폐해지고 있습니까? 인간성이 고갈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가치판단이 허물어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기강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1930년대 중반 자신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었던 마하트마 간디는 사회적인 7가지 치명적인 악에 대해서 설파한 적이 있습니다. 벌써 85년이나 흘렀는데 그 시대의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 속에도 여전히 반영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원칙 없는 정치입니다. 간디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라면 이리저리 이합집산하며 자신의 야망만을 향해서 달려가는 정치가들을 비판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노동이 결여된 부입니다. 간디는 수고하고 땀흘리는 것을 조소하고 불로소득을 꿈꾸며 남을 속이고 나도 속임을 당하는 노동이 결여된 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죄악은 양심이 없는 쾌락입니다. 진정한 즐거움이 아니라 돈으로 매매하는 성적인 쾌락, 순결과 정조를 가볍게 여기는 사회, 이것은 무너져 가는 사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것의 결과물은 뻔합니다. 가정파탄입니다. 사랑해야하는 가정이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죄악은 도덕성 없는 상거래행위입니다. 돈의 이익만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돈보다 더 큰 목표, 돈보다 더 큰 꿈이 없기 때문에 도덕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비즈니스맨들 중에서 진정한 거상들이 나와야 합니다. 

「거상 김만덕」이라는 드라마에서 김만덕이 한 말이 있습니다. “돈은 뜬구름과 같아서 잡는다고 기뻐할 것도 없고 잃는다고 슬퍼할 것도 없다. 그러나 돈을 두려워해라. 그러나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상인이 되라. 상인은 이익이 아닌 진심을 팔고, 사람을 남겨야한다.” 

거상 김만덕은 이것이 기업가의 자세이고 돈을 거래 하는 자세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익만 남기는 장사를 하려고 하면 얼마나 인간성이 파괴됩니까? 사람이 다 돈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사람을 살리는 길이 되겠습니까? 

간디는 다섯 번째로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교육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의 교육 현장이 그렇습니다. 획일화된 교육, 가슴을 따뜻하게 하지 않는 지식만 있는 교육이 되었습니다. 공교육의 현장이 서서히 피폐한 현장이 되고 있습니다. 교사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때로 엄한 권위가 필요합니다. 체벌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아이들이 자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방종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가 교육의 이상과 목표를 무언가 잘못 정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로 인간성이 사라진 과학을 말합니다. 기술과 과학은 발달했는데 오히려 도덕성과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되었습니다. 모든 악들이 과학문명 속에서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는 희생 없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종교인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신앙이 습관화가 되어서 이기적인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현상입니다. 남을 위해서 사랑을 베푸는 종교가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따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는 종교는 종교도 아닙니다. 신앙도 아닙니다. 그것은 없느니만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초가 무너지고 황폐화된 사회를 네게서 날 자들이 다시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네게서 날 자들이란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요? 바로 교회를 뜻합니다. 성도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워나가는 역사를 이루어달라고 약속하시면서 부탁하신 것입니다. 이 일을 할 사람이 바로 너라는 것입니다. 아니,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남을 무너뜨리려는 것들을 버리고 연약한 자들을 사랑으로 품으십시오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이사야 58:12下 )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건설하는 자, 상처 난 곳을 싸매는 자, 새롭게 하는 자, 창조자가 되게 하겠다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있는 자리가 따뜻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가 밝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가 사람을 살리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 조건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조건이 무엇일까요?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이사야 58:9) 

버려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저절로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멍에는 무엇입니까? 남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손가락질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남을 조롱하고 조소하는 것입니다. 허망한 말이란 무엇입니까? 거짓된 말로 남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지 않고 축복만 받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교회에 열심히 나와도, 자기의 잘못은 보지 않고 남의 잘못만 손가락질 하고, 거짓된 것으로 남을 무너뜨리는 이런 것들을 네 안에서 지워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런 축복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이사야 58:10) 

두 번째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연약한 자, 고통 받는 자들을 너그럽게 사랑으로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웃이 아파할 때 아파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이웃이 고통 받을 때 위로하고 싸맬 줄 알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있어야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합니다. 우리가 버려야할 것이 무엇인지, 남을 긍휼이 여길 것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확인하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 내가 세상을 축복하겠습니다. 내가 시간을 축복하고, 공간을 축복하고, 내가 만나는 사람을 복주겠습니다. 내 속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제하여 주옵소서.”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만족을 주시고, 육체에 강건함을 주시고, 삶에 풍요로움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올 한해가 하나님과 함께 이 축복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한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