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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사 43: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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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사 43:18-28)


I. 1월 첫주

우리가 자동차 운전을 할 때 백밀러로 뒤를 보면서 운전합니다. 백밀러를 보는 것은 뒤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잘 가려는 것입니다.

1월을 영어로 'January'라고 합니다. 'Janus'의 달이라는 뜻입니다. 야누스는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이지요. 이 야누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누스의 한 얼굴은 뒤를 바라보고 한 얼굴은 앞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의 한 얼굴로는 과거를 지켜보면서, 다른 얼굴로는 미래를 바라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새해의 문턱인 1월에는 지나간 묵은 해를 보내면서 과거를 반성하고 결산하는 동시에, 새로운 한 해를 바라보며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희망 가운데 맞으라는 교훈이 담겨진 신화입니다. 

제3의 파도의 저자 엘빈 토플러는 그의 책 서문에서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암울하기에 이것이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나는 이 책을 씁니다.”

II. 시작은 곧 끝이다

시작점에서는 언제든지 과거를 잘 정리하고 또 지금 시작하는 이 끝을 헤아려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한 과학자는 지구에 만약 원자폭탄이 터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깜짝 놀랄만한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구 표면의 85%를 차지하는 바닷물 즉 수소원자들이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전 세계가 한 장의 종이를 말아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 속에 집어 던져 놓은 것처럼 순식간에 불타버리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느날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벧후3:10에서 이런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지구촌이 폭발한 주유소에 종이 한장을 집어 넣는 것처럼 될 수 있다”고.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강남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남녀신사들이 깨끗하게 단장된 사무실에 모여 앉아있습니다. 참으로 긴 시간동안 진지하게 그들은 엎드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마쳐진 다음에 저마다 펜을 끄집어내 유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유서를 써놓고 자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유서쓰기공동체’ 멤버들이었습니다. 유서를 써서 변호사에게 정중히 맡깁니다. 그리고 일년 후 다시 그 시간에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끔은 지난해 썼던 유서가 그대로 효력을 발생할 때도 있고 또 그 자리에 모이게 되면 작년에 있었던 유서는 받아서 찢습니다. 그리고 다시 유서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유서에는 재산의 처리 방법, 유산물림에 대한 언급들이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자녀에게는 한푼의 유산도 물려지지 않습니다. 어린자녀에게는 대학을 마칠 때까지 소요되어지는 최소한의 유산이 약속되어집니다. 그렇게 했더니 자녀들의 자세가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유서를 써 놓으셨으니 이제 나에게 돌아올 몫은 없다.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진지해 지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인생입니다. 한해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인생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생일이 있으면 장례식이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환자를 앞에 놓고 임종을 알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환자에게 임종의 시간을 알려야 할 것인가? 아니면 편안하게 그대로 죽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토의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남은 시간 죽음을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끝을 아는 것은 지혜요 축복입니다. 종말은 하나님이 주신 시간입니다. 지혜롭게 정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시작을 멋지게 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에 끝날이 있다! 여기서 삶의 지혜가 옵니다. 땅의 축복이 영혼을 흐리게 만들면 아니됩니다. 땅의 보물로 하늘의 부요를 빼앗기면 아니됩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칭찬 듣고 살았다 할지라도 주님 재림하시는 날 일어나지 못하면 망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하늘에 내 집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그는 천국의 거지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종교입니다. 신앙은 종말 승리의 약속입니다. 교회는 종말로 나아가는 구원공동체입니다. 성경은 종말로 나아가는 지침서입니다. 예수는 종말 구원의 표징입니다. 

그래서 헤겔은 “지금 인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나아간다”고 말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는 “지금 세계 역사는 성경을 증명하는 역사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키에르 케고르의 종말 비유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초만원을 이룬 극장 밖에서 불이 났습니다. 이들 중 누군가 “불이야~” 소리를 지른다면 아비규환, 수많은 사람들이 발에 밟히고 또 불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여 헤매게 될 것이다 생각하고 한 배우가 연극을 중단하고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차분하고 진지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밖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갑자기 서둘러 뛰어나가다 보면 우리 모두 죽습니다. 출입구는 뒤에 있고 좌우에 하나씩 있습니다. 

출입구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차례대로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내려가시면 어디에 불결이 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주로 어느 방향으로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것 조차도 연극인 줄 알고 박수를 치고 좋아하고 웃고 떠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라고 아무리 몸부림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연기가 스며들어 오기 시작했습니다. 불길이 확~ 순식간에 극장 안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때는 늦고 만 것이지요.

여러분 종말 종말 말세 말세 하니까 위기감을 조성하기 위해서, 좀더 충성하라고 재미있으라고 연극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롯의 친구들은 심판의 메시지를 농담으로 여기다 망했습니다. 노아 시대에 방주를 짓는 노아를 향하여 세상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다가 망했습니다. 한날의 끝인 밤중이 되면 한해의 끝날, 또 한해의 새날이 될 때마다 우리는 내 인생의 종말을 기억해 보아야 합니다. 

III. 보라, 내가 새일을 행하리라

진정한 종말론은 그 종말의 빛에서 오늘 내가 사는 이 시간을 희망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43장입니다. 공포와 불안, 절망과 한숨으로 얼룩진 땅에 희망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19절)

여기서 하나님이 행하신 새 일이 무엇입니까? 그 대답이 25절에 나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일은 저주의 백성을 축복의 백성으로, 비방거리들을 영광과 칭송의 자식으로, 공포에 시달리는 백성을 희망의 자녀로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에 간섭하시고 그것을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시는가? 그 이유가 대단히 놀랍습니다. 내가 잘났기 때문에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향기로워서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소중하고 귀하고 귀해서 용서하시겠다고 오늘 본문에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용서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그 분에게 용서의 원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자식이 벌거벗고 길거리에 뛰어 다니면 내가 수치스럽지요. 내 자식들이 더러운 옷을 입고 더러운 행동을 하고 이 골목 저 골목 헤매고 다니면 어머니에게 수치가 되겠지요. 그래서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새 옷을 갈아 입히고 단정하게 만들어 세상에 내어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치의 옷을 입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맞아 피 흘리고, 울고 실패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행복하고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너희를 용서하노라.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내 허물을 도말하리라”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이유도 놀랍습니다만 그 방법 또한 놀랍습니다. 

“도말하고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여기 “도말”은 기록된 죄를 지워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기억지 않겠다는 것은 녹음된 테이프를 불태워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완전한 사죄의 은총이 있습니다. 이것만이 완전한 용서가 됩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새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용서보다도 더 큰 새 일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보다 더 큰 새 일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영원히 멸망받을 수 없는 저 지옥의 백성들을 건져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삼으시는 구원의 역사보다도 더 큰 새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적 중 최고의 기적은 내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마귀에겐 용서도 사랑도 구원도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구원을 얻도록 힘을 썼다면 적어도 나는 마귀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입니다. 

IV.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마라

때문에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18절) 내가 잊어버린 너의 죄를 너도 기억하지 말라는 겁니다.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세상의 재미있는 일들 기억하지 않아야지요. 포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왔으면 포로의 근성을 버려야지요. 우상 앞에 죄 짓던 일을 씻어 버려야지요. 잘못된 과거, 집착증 환자들, 과거 회상주의 자들은 하나님의 새 일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18절 본문은 시작하면서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내가 새 일을 시작했는데 너는 왜 과거로 돌아가려 하느냐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작년에 있었던 실패의 경험을 기억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번 실패했다고 영원한 실패자 인양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10년전에 저지른 허물과 실수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용서받았으면 하나님도 잊어 버렸으면 여러분도 믿으시고 잊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 너의 죄 사해 주사 기억 아니 하신다. 너의 죄 사해 주사 기억 아니 하신다. 
   불쌍한 사람들아 오라 하신다. 너의 죄 사해 주사 기억 아니 하신다. 
   할렐루야!

사랑이 무엇입니까?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용서해 버리는 것입니다. 실수와 허물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용서의 복음이요 속죄의 기쁨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 안에서 우리는 과거로부터 해방 받았으며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실패의 쓰라린 경험, 지난 날 내 기쁨과 행복과 평강을 빼앗아 갔던 모든 죄책감, 이 시간 십자가 밑에 다 묻어 버리고 새해를 힘있게 출발하시기를 부탁합니다. 

영국에 어느 정신병원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의 95%가 하나님의 용서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까지도 이용하셔서 새 일을 만들어 가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실수까지도 이용하여서 하나님의 새 역사를 감당하게 해 주십니다. 

마귀는 우리 과거의 실패를 자꾸 들춰냅니다. 처녀시절에 실수를 들춰냅니다. 어린시절에 상처받은 것을 자꾸 생각나게 만듭니다. 이전에 쓰라린 경험이 자꾸 나를 꽁꽁 묶어서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은 과거를 잊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미래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희망을 약속해 주십니다. 성령이 오면 환상을 보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연필 끝에 지우개가 달린 것은 실수한 자국들을 지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둘베는 말하기를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이다”고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를 성공으로 바꿔갈 수 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갈 수 있습니다.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꿔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송구영신을 전후하여 제가 야곱 얘기를 자주 합니다. 야곱은 형을 속였습니다. 눈먼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리고 축복을 가로채고 하란으로 도망가다가 루스라는 광야에 이르자 해가 서산에 져서 더 이상 여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을 지붕 삼고, 이불 삼아서, 돌멩이 하나를 베개 삼아서, 잠을 청하는데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나는 이제 내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구나. 고향 땅에서도 버림을 받았구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이제는 될 수가 없구나. 나는 어디 가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인생에 나 홀로 떨어진 고아가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그밤 꿈을 꾸었습니다. 고독한 그 밤에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좍 내려온 것 아니겠습니까?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그를 감싸더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겠다. 네 뜻을 이루고 돌아올 때까지, 네가 성공하고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내가 너를 지켜 줄 것이니라.” 

잠에서 벌떡 깨어나 하나님을 향하여 울며 찬송했습니다. 나 혼자 도망가는 줄 알았는데 이 길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동행하고 계셨구나. 이 빈 들판에 나 혼자 누워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이 자리에 함께 계셨구나. 여기가 빈들이 아니로다. 성전이로다.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로다. 돌 베개를 세워놓고 하나님 앞에 찬송하고 경배하게 된 것입니다. 실패의 자리가 도약대가 돼 버리고 만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실수까지도 이용하시고 나의 허물까지도 들어 쓰실 때에 우리는 새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안경에 먼지가 묻었다고 나는 버리지 않습니다. 안경에 때가 끼었다고 나는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사랑 많으신 우리 하나님, 우리 인생에 먼지 묻었다고 우리 인생을 폐기처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실수가 있고 허물이 있고 약점이 있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모자라는 것 채우시고 약한 것 강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용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예수님이 함께 계시고, 
   성령님이 능력 주시니,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 

이 한해동안 거룩한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며, 승리의 행진을 계속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V. 위대한 생각 위대한 새해

“이전 일을 생각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18절) 

여기 “생각”이란 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미움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가 먼저 상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를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가슴이 먼저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열매를 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내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나님이 2011년동안 함께 계시면 나는 새 일을 맛볼 수 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 당신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마음껏 2011년도에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당신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내 믿음에 능력을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태산을 옮기는 능력을 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의 은사를 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새 일을 내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의 한계가 없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제한이 없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능력을 제한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와주시겠다고 찾아오실 때 그 손길을 제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새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작은 믿음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조그마한 비전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작은 기도를 크게 하시기 바랍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할렐루야. 비전을 크게 세워라 내가 채우리라. 할렐루야. 믿음을 높이 세워라. 희망을 높이 두어라. 내가 이루게 하리라. 할렐루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한 마을에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폐쇄된 철길을 건너야 했습니다. 마을 아이들이 철길을 건너가다가 중간쯤 가서는 밑을 내려다 보고 그냥 어지럼증이 있어서 빠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리에 통통하게 생기고 배가 볼록 나온 아이는 끄떡없이 철길을 두벅두벅 잘 걸어간단 말이예요. 원인을 알아보았더니 아이들은 철길을 건너가다 밑을 내려다 봐서 무서움증 때문에 밑으로 빠지는데 이 아이는 배가 볼록하게 나와서 밑을 내려다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앞만 보고 똑바로 걸어가다 보니까 절대로 떨어지지 않고 철길을 잘 건너게 되었다고 합니다.

파도를 보면 파도 속에 빠지지요. 그러나 예수를 보고 걸으면 파도를 밟고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날 삼키려고 찾아왔던 악한 사탄을 밟을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시련의 파도를 밟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앞에 넘실대는 홍해를 가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게 될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힘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할렐루야. 

VI. 찬송을 부르게 하리라

새 역사를 이루는 사람들의 결국이 무엇입니까? 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죄책감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축복의 잔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수치와 비방대신 감사와 찬송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잃어버리고 낙심과 절망가운데 있던 백성들, 강가에 모여서 녹슨 거문고를 닦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원망하고 상처를 주고 받던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격려했습니다. 서로 축복했습니다. 서로 기도했습니다. 감사와 찬양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공포와 불안에 떨던 백성들이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찬양은 능력이 있습니다. 감사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한해동안 불평대신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원망의 지난날을 묻어버리고 찬송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개울 창을 내려다보던 눈을 열어 저 높은 곳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은 아름다운 자리를 바라보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때 성령이 우리에게 오면 환상을 보고 꿈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예방제가 됩니다. 해독제가 됩니다. 방부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세상이 썩고 오염되었다 할지라도 여러분을 유혹하는 시험의 불길이 강하고 거세다 할지라도 감사와 찬송은 이 모든 것을 물리쳐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21절)

여러분 우리의 환경과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크리스챤이 절망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나에게 힘이 없다고 낙심하는 것은 힘의 원천인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나에게 과거의 죄가 있다고 포기하는 것은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 다 씻어 주시고, 다 용서 하시고, 다 덮어 주시고, 감춰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이 신년 첫주일 선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나의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여 주님과 함께 새 일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멋진 일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보지 못했던 일들을 보기 원합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기를 원합니다. 보지 못했던 일들의 증거를 보기 원합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18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내 허물을 도말하리라. 기억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19절)

그 다음 이어지는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20절)

1.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 사막이 꽃동산 되리 /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2.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 사막이 낙원 되리라 /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않는 /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 이제 속히 오리라

이 노래 가사는 이사야 11:6-9 말씀과 이사야 43:18-21 말씀을 중심으로 쓴 것입니다. 두 말씀 모두 메시야 시대를 노래한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면, 더 이상 서로 물고 뜯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사나운 성질들이 다 없어지고 온순하게 되어 서로 평화롭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이 흐르게 할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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