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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는 사람 (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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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 (시 1:1-6)


요즘 연초가 되다 보니까 신년 하례에 참석을 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가보면 성격이 다른 모임들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새해를 맞이하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희망찬 한 해를 소망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새해 둘째 주일을 맞으면서 과연 새해에는 희망을 가져도 좋은가? 아니면 지금 누리고 있는 분복마져도 무너지지나 않을까? 염려가 교차되고 있습니다. 어느 외국인 선교사 한 사람이 한국에 온지 1년이 채 되지 못했습니다. 송구영신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한국말은 서툴지요. 정성껏 준비한 노트를 보고 더듬거리며 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마 1년 2년 3년 하는 것은 배웠지만 한해 두해를 배우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친애하는 교우여러분! 오늘 우리는 송구영신예배를 드립니다. 이 밤이 지나면 이년이 가고 새년이 옵니다. 새년은 어떤 년일까? 기대를 해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이년도 저년도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년을 맞아도 잘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새년과 함께 잘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 새해에는 우리가 참으로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왜 없겠습니까? 자! 옆에 분들과 인사를 나누시길 바랍니다. “당신을 보니 참 복이 많게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참 복이 많습니다!'라고 말씀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혹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복이 많다‘는 말을 들으십니까?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복이 많다’는 이야기 합니까? 제가 관찰해 보았더니 주로 연세 많고 건강하여 병원에 가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복이 많다고 합니다. 

자녀 교육에 매달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자녀가 잘 되거나 또는 불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사업이 잘 되어 자금사정이 좋은 사람들을 보고 그렇게 말합니다. 혹은 높은 지위에 앉게 되거나, 미모가 뛰어나거나 몸매가 예쁜 분, 공부를 잘해서 좋은 성적을 얻은 사람에게도 말합니다. 제 경우에는 많이 먹어도 살이 안찌는 사람들을 보고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인생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바로 주어진 좋은 조건 때문에 불행과 파멸로 끝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한 때 박대통령의 아들 지만 군을 보고 장래가 보장된 사람이라 했지만, 오히려 대통령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마음에 심한 좌절과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들을 겪고 지금은 사람들로부터 잊혀진 존재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또 어떤 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불행한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분들이 많습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날 때가 있습니다. 가난한 부모를 만나 공부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잘 생긴 얼굴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유전자를 받아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조건이 불행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불행한 조건이 더 복되고 활기찬 인생을 살아가도록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복이나 소유의 기준도 행위의 기준에 따름이 아니라 어떤 존재로 살아가느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은 선택에 따라 달라집니다. 

여러분, 복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단어는 2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라는 단어로 구약에만 415번 정도 쓰였습니다. [바라크]는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축복하시거나, 신적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줄 때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사람들의 선행, 즉 착하고 복되게 살든 말든 상관없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인해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나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다음 [아시와르]가 구약성경에만 44번 정도 사용되었습니다. 이 [아시와르]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가진 삶의 자세와 태도로 인해 복된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얻을 수도 혹은 얻지 못할 수도 있는 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 함께 생각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복, [아시와르]입니다. 여기 1절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여기 이 복이 [아시와르]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복(바라크)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얻을 수도 혹은 얻지 못할 수도 있는 복입니다. 오늘 말씀은 어떤 환경에 처해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시편기자의 고백이면서 시편 전체의 서문이 되기도 하는 오늘 말씀을 살펴봅시다. 1. 복 있는 인생은, 첫째 복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본문 1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은 복을 만들어 가고, 복을 받을 수 있고, 복을 창조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는 세 가지의 동사가 있습니다. ‘좇다’와 ‘서다’와 ‘앉다’입니다. 이 세 가지 동사는 사람이 악에 빠져드는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따르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거기에 멈춰 서는 겁니다. 그리고 그냥 주저앉아 버립니다. 

타락의 시작은 ‘악인의 꾀’를 좇기 시작함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어떤 것을 좇아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인의 꾀를 좇아가면 결국은 파멸입니다. 처음은 넓은 길이지만 갈수록 협착한 길이 나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처음 넓다고 편하다고 좋아하지만 결코 그 길이 복된 길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의 길’이란 푯대에 어긋나게 나아가는 길입니다. 목표점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생각과 방법대로 살아가는 자의 행로를 말합니다. 

그리고 ‘오만한 자’란 자기를 절대화시키는 자요, 자기보다 못한 자들을 업신여기거나 멸시하는 자를 말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타인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부정하고 업신여기는 행동이야 말로 오만한 자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에서 '앉는다'는 말은 아주 절망적인 죄악의 생활습관이 완고함으로 굳어져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인생에 물들지 않고 복있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2.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2절을 보십시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아멘.  금년에 우리 교회의 표어는 “말씀과 기도로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아닙니까?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데 성경보다 더 중요한 도구는 없습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데 성경이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기는 하는데 깊이 읽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은 채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한국교회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한미준)과 한국갤럽이 그리스도인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1주일에 성경을 얼마나 읽는지 묻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그 응답 결과를 보니까 51.9%가 성경을 읽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시간 이하는 24.5%로 나왔습니다. 4/3 이상이 성경을 거의 읽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예전과 비교해 볼 때, 성경 읽는 열기가 식어지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밥 한 끼만 안 먹어도 어떻습니까? 난리가 나잖아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참기 힘듭니다. 먹을 것만 찾게 됩니다. 그런데 영혼의 양식인 성경 말씀을 안 먹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지냅니다. 사실은 영혼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사실은 이게 더 심각한 겁니다. 질병도 자각증상이 없는 게 더 큰 문제 아닙니까? 

암 같은 무서운 질병이 왜 우리에게 치명적이냐 하면 자각 증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초기에 증세가 나타나면 쉽게 고칠 수가 있는데, 다 퍼진 다음에야 알게 되니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도 마친가지입니다. 이 말씀을 읽거나 듣거나 암송을 포기하고 살 때 처음엔 몰라요. 그러나 나중엔 엄청난 손해를 봅니다. 영혼이 피폐해지고, 인생도 망가져 갑니다. 복된 인생을 위해서는 성경을 많이 섭취해야 됩니다. 

아름다운 한 여성이 친구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 받았습니다. 그녀는 호기심을 가지고 조금 읽어보다가 별로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방구석에다가 처박아 두었습니다. 며칠 후에 어떤 모임에서 그녀는 우드라는 잘생기고 매력적인 청년을 소개받았습니다. 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녀가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읽기 시작했는데, 그 책의 저자 이름이 우드예요. 당신 이름과 똑같지요. 우연치고는 정말 큰 우연인 것 같아요." 

그러자 그 청년이 말했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제가 그 책의 저자입니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그 아가씨는 방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우드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자신이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 가장 흥분을 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재미가 있던지, 밤을 새워 다 읽고야 말았습니다. 그런 후에 그 아가씨는 그 책의 저자와 결혼해서 그 이름이 H.W.우드 부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도 재미없던 책이 하루아침에 재미있는 책으로 변할 수 있었겠습니까? 책을 지은 사람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 아닙니까? 제가 목회 하는 가운데 종종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기만 해도 자꾸 잠만 온다는 것입니다. 집중도 안 되고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돼서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책보다 아직도 자신이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 가슴에 벅차게 밀려 들어와 보십시오. 어떻게 성경이 졸릴 수 있겠으며 말씀이 와 닿지 않겠습니까?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 보십시오. 밤을 새면서 읽어도 더 읽고 싶어질 것이고 이처럼 말씀이 그리워서 사모하는 심정으로 달려나올 것입니다. 

여기 2절 말씀에 ‘묵상하는 자로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묵상의 [하가]라는 단어는 단순히 조용히 마음에 되새긴다는 뜻이 아니라 힘을 다해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을 말하는데 말씀을 귀중히 여기고 말씀대로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합니다. 묵상은 마치 되새김질로도 저는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소를 끌고 나가서 풀을 먹이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눈만 뜨면 소를 끌고 나가서 한두 시간 풀을 뜯깁니다. 그 이른 시간에 소에게 풀을 뜯기지 않으면 소가 하루 종일 굶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풀을 먹고 나서 10시, 11시가 되어 해가 뜨거워지면 소는 그늘에 앉아서 되새김질을 시작합니다. 먹은 것을 다시 끄집어내서 잘근잘근씹기 시작합니다. 되새김질을 해서 두 번째 위에다가 착착 채우고 두 번째 위가 가득 차면, 세번째 위에 채우고 세 번째 위가 가득 차면, 네 번째 위까지 가득채웁니다. 그러면 소의 침과 풀이 잘 섞여 위를 통해 흡수되고, 그 흡수 된 영양분이 피를 통해 온몸에 공급됩니다. 되새김질을 잘하니까 소는 풀만 먹고 자라도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건강해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사십 분 동안 설교를 계속해서 듣고 나면 말씀의 되새김질을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되새김질하듯 곰곰이 되뇌어 봅니다. 그런 시간에 성령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그 깨달은 말씀으로 영혼을 가득 채워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영혼의 혈관을 통해 공급되면 영적 피곤이 싹 가시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서 새 힘이 솟는 것을 우리 모두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김질하면서 예수님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약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당연히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숱한 문제에 휘둘려서 무너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마음에는 무거운 짐이 항상 짓누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했는데 생각하지 않고 인생을 사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바쁘다, 힘들다는 말만 하지 말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해결책을 실천해 봅시다. 

셋째,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축복의 열매를 베풀며 사는 인생입니다. 

본문 3절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1)시냇가의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게 하실 것이다. 여기서 ‘시내’ 라는 단어는 저절로 형성된 시내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든 수로를 의미합니다. 

누군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마른 땅을 파서 수로를 만들고 그 수로에 물을 흘려보내는 시내입니다. 인생 속에 복 받을 요소가 없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 있는 삶의 태도로 살아갈 때에는 당신께서 메마른 광야 같은 인생을 뚫고 파셔서 생수를 흘려보내시고 아름다운 열매로 풍성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불행을 불행으로 마치도록 두지 않으시고 불행의 자리에 새로운 소망의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여기 또 ‘나무’라는 단어도 그저 잡목을 뜻하는 것이 아닌 목적과 의미를 두고 구한 나무를 가져다가 그 곳에 심은 것을 말합니다. 별 볼일 없는 인생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복 있는 삶의 태도로 살아갈 때에, 바로 그 삶을 들어 의미 있고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이곳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보혈을 터뜨려서 마르지 않는 시냇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을 이곳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 강수의 시냇가에 옮겨 심기운 자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혈을 마신 우리의 삶은 이제 묘목이 아닌 독야청청 흔들림이 없는 거목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2)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는 희망을 말합니다. - 잎사귀는 열매를 맺게 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잎사귀가 줄기에서 떨어지면 무엇이 됩니까? ‘낙엽’이죠! 요즘 ‘젖은 낙엽’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퇴직하거나 은퇴한 남자를 일컬어 ‘젖은 낙엽’이라고 한답니다. 젖은 낙엽을 보셨죠? 낙엽이 젖지 않았다면 태우는 연료라도 쓸 수 있겠지만, 아무데도 쓸데는 없으면서, 쓸어버리려고 해도 빗자루에 딱 붙어서 귀찮게 하고 처치 곤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잎사귀는 줄기에서 떨어지면 끝입니다.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것은 자양분을 마음껏 받아들여 성장을 지속시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형통한 인생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복 있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 있는 인생은 형통한 삶의 열매가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듬이 있다할찌라도 또 상처가 있을찌라도, 어떤 자리에서도 그것을 전화위복으로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하나만,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까지 행복을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이 복 있는 사람은 그의 시각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기에 항상 시선이 하늘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항상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가 바뀝니다. 약 500년 전 이탈리아의 조각가 도나텔로가 거대한 대리석을 하나 구입하였는데 그 대리석은 흠도 많고 갈라진 곳도 많아서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 수가 없다고 판단하여 반품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있던 미켈란젤로는 그 대리석을 보면서 그 대리석의 흠을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도나텔로가 반품한 그 대리석을 사들여서 ‘다윗상’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만들었습니다. 도나텔로는 흠으로 보았지만 미켈란젤로는 뛰어 넘어야 할 장애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일은 보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억울한 누명을 벗고 다시 3군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선조는 현지 상황을 보아 수군에 가망성이 없으니 포기하고 권율이 이끄는 육군에 합류하라는 교지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상유십이 순신불사” “아직 배 12척이 남아 있고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는 말로 수군을 일으켜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과 싸워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일을 당해도 긍정적으로 보면서 행복을 찾습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상황을 어둡게만 보아 스스로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봅니다. 생명이 자리에서 죽음을 봅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투정을 부리고 도망치려고 합니다. 사실 어려움이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려움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이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 긍정적 자아와 부정적 자아가 싸우고 있을 때 부정적 자아를 물리치고 긍정적 자아를 이끌어내면 인생을 성공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성공한 많은 사람들은 어려움에 직면한 상황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았던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복은 영원한 생명 되신 주를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경건하고 신실하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빨리 지나갑니다. 남아있는 짧은 생애에서 그저 한다는 것이 늘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서 악인과 어울려 다니며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거스리는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나와 이웃과 하나님 나라에 유익한 축복의 통로로 사시겠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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