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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참 행복의 길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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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행복의 길 (마 5:1-12)


21세기 들어서서 나온 말 가운데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참살이‘라고 쓰이는데, 이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입니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안녕‘, ’행복‘, ’복리‘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의 생각으로 ’웰빙‘은 건강과 마음의 안정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이러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웰빙족이라고 합니다(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어떤 면에서의 행복입니까? 여러 매체에 나타난 웰빙족의 생활, 즉 참살이는 대체로 이러합니다. 

유기농 야채와 곡식으로 만들어진 신선한 건강식을 섭취하고 또 육류보다는 생선을 즐기고, 화학조미료와 탄산음료, 술, 담배 등 몸에 나쁜 것은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대신 좋은 차나 허브티 같은 것을 마시고, 퇴근 뒤엔 약속을 피하고 헬스클럽이나 요가센터를 찾아 운동과 정신수련을 하며 심신의 안정과 건강을 관리합니다. 바쁜 시간에도 틈틈이 아로마테라피(향기)와 스파(온천), 마사지를 즐깁니다. 문화 행사를 즐겨 찾는 것은 물론 다양한 레포츠와 주말여행을 시도합니다. 

이러한 웰빙족의 참살이를 겨냥한 관련 산업도 대도시에서는 번창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미용, 요가, 명상, 스파, 레저, 헬스케어 관련 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호텔이나 음식점들은 웰빙 패키지, 웰빙 푸드 등 관련 상품 개발에 열을 올립니다. 심지어 웰빙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잡지들이 여러 가지 창간됐습니다. 이제 주5일 근무제에 맞춰 각 신문의 주말섹션도 웰빙과 관련한 기사를 많이 다루면서 이와 같이 웰빙 열풍이 확산되고 있으며, 다들 ‘웰빙(참살이)’하라고 은근히 권유합니다. 

이와 같이 ‘웰빙’의 삶을 살면 행복합니까? 어찌보면 이 웰빙이라는 것도 상업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소위 ‘웰빙 마케팅’이라는 것으로 포장한 것이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제천에서 사는 사람은 일상의 삶 자체가 ‘웰빙(참살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이 소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소유했느냐’, 또는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 정말 그렇습니까? 인간의 행복이 ‘무엇을 가졌느냐’로 판가름 납니까? 아닙니다. 인생의 가치나 행복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고 존재의 문제입니다. 

심리학자 ‘에릭 프롬’이 쓴 책,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을 보면, 소유형 인간과 존재형 인간이 있는데, 존재형 인간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인간답게 존재하는데 두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인생의 가치와 성공적 삶은 존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 ‘토마스 하리스(Thomas A. Harris)’ 의 『I am OK, You are Ok』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 관계’를 네 가지 유형으로 소개하면서 말하기를, ‘행복이란 관계성에 있다’고 합니다. 나 자신과의 관계, 너 와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 이 관계 설정이 바로 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이 바른 관계를 외면하고 오직 소유에만 집착해서 살고 있습니다. 먼저 그 무엇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먼저 그 어떤 위치에 오르려고 합니다. 먼저 그 무엇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무한한 욕구는 채워지지 못한 채 허망한 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 마태복음 5~7장은 대단히 중요한 장으로 여러 가지 별칭이 있습니다. ‘산상수훈(보훈)’, ‘산상설교’, ‘천국대헌장’, 등으로 불립니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첫 번째 말씀이고 ‘팔복’이라고 불리워지는 말씀입니다. 곧 ‘이것이 인간 행복의 길이다’, ‘누구든지 행복하려면 이렇게 살아라’를 핵심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예수님은 자기를 좇아다니는 무리를 보시고 갑자기 산으로 오르신 것입니다. 왜일까요? 4장 마지막 부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4:23~25)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무리들, 특히 수많은 병자들이 주님을 따른 것은 한마디로 병 고치는 기적 때문이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는 기적은 오늘날에도 필요한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또 언젠가는 다시 병들고 죽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병 고침 자체가 복음일 수 없습니다. 복음의 한 단면이요, 복음의 한 능력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무리들은 오직 병 고침을 받는 것에 집착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산상에서 ‘진짜 복’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오늘 본문을 ‘성경의 축복산’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 ‘축복산’에서 가르치시는 그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1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절)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당시의 랍비들은 무엇을 가르칠 때에 반드시 앉아서 가르쳤다고 합니다. 당시에 앉아서 가르친다는 것은 권위 있는 통치자의 자세로 가르쳤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앉아서 이제 그 능력의 입을 여시고 가르치시기 시작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이 첫 마디를 원문에서 직역하면, “복이 있느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입니다. ‘복이 있느니라’(마카리오이), 이것은 복에 대하여 가르치셨다기 보다는 복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 자체가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 복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 

본래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참 좋아하시는 분이십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당신의 자녀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먼저 복부터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복은 우리 세속적 인간들이 생각하는 복과는 차원이 다른 복입니다. -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에 먼저 복부터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을 받으려면 먼저 그 복의 근원이신 주님에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찬송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합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그렇게 찬송하면서 실제로는 세상 복을 구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행복하지 못했고, 만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복을 계속 철철 넘치게 주셔도 우리의 잔은 맨날 ‘빈 잔’이요, 우리의 인생은 ‘텅 빈’ 인생입니다. 

여러분, 올해는 복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겸손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고통의 멍에를 벗기 위해서는 주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낭패와 실망당했다 할지라도 주께 나아가야 합니다. (찬송 272장) “교만한 맘을 내 버리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복되신 말씀 따르려고 주께로 갑니다. 실망한 이 몸 힘을 얻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옵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주께 나가면 주님께서 바로 여러분 향하여 선언하실 것입니다. “복이 있느니라”, 이것이 바로 행복한 삶의 출발입니다. (시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오늘 말씀에 이렇게 주 예수께서 복을 선언하시고 곧이어 복 있는 자가 누구인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복이 있도다!” 누구입니까? 곧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팔복은 모두 다 ‘성품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소유해야 할 성품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의 성품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성품입니다. 내적이고 영적인 성품입니다. 이 여덟 가지 성품을 다 합치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둘째는, 팔복은 모두 다 ‘관계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일복, ‘가난한 심령’은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입니다. 이복, ‘애통’은 죄에 대한 태도입니다. 삼복, ‘온유’는 타인에 대한 태도입니다. 사복, ‘의에 주리고 갈급함’은 하나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로 인생을 살게 되면 그 삶에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오복, ‘긍휼’은 타인에 대한 열매입니다. 육복, ‘마음의 청결’은 자기 자신의 내적 열매입니다. 칠복, ‘화평’은 이웃 관계에 대한 열매입니다. 팔복,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경건한 신앙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얻어지는 결론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사람됨에 있다” - 곧 거듭난 성품으로 나 자신, 이웃,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진정한 행복자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만 맺고 살아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래 전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시카고의 큰 호텔이 있는데 어느 날 여기에 한 노신사가 들어와서 카운터에 있는 아가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호텔에 있는 방 중에 제일 값싼, 값싼 방을 하나 제게 주십시오.” 그 말을 듣고 쳐다보았습니다. 쳐다보니까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다시 세계 제일의 부자 존 록펠러입니다. 

세계적인 유명한 재벌, 그런 록펠러가 와서 싼 방을 달라고 합니다. “어째서 싼 방을 달라고 합니까?”, “제가 싼 방이 제일 좋으니깐요.” 이 아가씨는 한마디 더 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이 호텔에 올 때마다 제일 좋은 방을 달라고 해서 항상 제일 고급 방에서 쉬고 가는데 그 아버지는 어째서 제일 싼 걸 원하십니까?” 그때에 이 록펠러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내 아들에게는 나 같은 부자 아버지가 있지만, 내게는 그러한 부자 아버지가 없거든요.”, 부자 아버지를 둔 덕에 아들은 돈 쓰고 다니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이 부자입니다. 그가 우리 아버지십니다. 이것으로 만족 할 수 없겠습니까? 

“복이 있도다!” (마카리오이!) - 이 말씀은 인간의 행복이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에 있음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결코 인간의 행복은 그 무엇을 소유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바른 관계를 가질 때 누리는 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지금부터 삶의 질이 달라져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무엇을 소유하느냐?’,  ‘내가 그 무엇이 되느냐?’,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느냐?’ 를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진짜 복이 아닙니다. 얼마 동안 이것들은 우리를 편리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유 자체가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을 줄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을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 교인, 신자, 제자. 1) 교인 - 기독교를 한 종교로 선택해서 종교 생활의 일환으로 자기 임의대로 별 부담 없이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2) 신자 - 예수를 나의 주 그리스도로 영접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아직 말씀을 생활화하지 못하는 사람. 3) 제자 -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예수의 성품을 닮은 사람.  

그렇다면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진정 제자인가?”, 놀라운 사실은 그 누구든 예수의 제자만 되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 믿음이 평안이요, 행복이요, 능력이요, 구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잘 믿는 것 그 자체가 평안이요, 행복이요, 능력이요, 구원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 예수 잘 믿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삶이란 세상에서의 소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인격’ ‘올바른 관계’ ‘올바른 그리스도인 됨’에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참 행복의 길이 어떤 것입니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 -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거듭난 성품으로 나 자신, 이웃,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 이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음으로 참 행복의 길을 걸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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