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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왜 떠나왔는가? (창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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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떠나왔는가? (창 12:1-9)
    

성경일독 제2주째에 접어들어 어제 창세기 26장까지 읽었습니다.   세상에 죄가 가득하였을 때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구별하여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번성한 사람들은 홍수 심판을 잊고 또 다시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번에 하나님은 또 한 사람 아브라함(아브람)을  주목하셨고 그를 구별하여 위대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한 사람을 통해 이 땅에 한 민족이 만들어지고 그들을 구별하여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세상 만민을 구원하실 준비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나눈 약속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창세기의 족보를 보면, 보통 30~40세 경에 자녀를 낳았던 시대에 동생들 나홀과 하란은 자녀들을 일찍 낳아 가문을 이루고 있을 때(창22:20-24) 아브라함은 맏형이지만 75세가 될 때까지 아직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로부터 고향을 떠나라는 명이 내렸습니다.   하나님은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에게 ‘네가 큰 민족을 이루는 아비가 될 것이며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을 삼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약속을 마음에 둔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에 정든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아내와 조카의 가족과 딸린 식구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이사왔습니다.   

외국에서 사는 우리들은 정착 초기에 겪었던 무용담들이 한 두가지씩은 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으니 지난 날 허둥대며 살았던 일들을 추억으로 되새길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진땀이 흐르고 속상하며 내 나라 두고 떠나와 여기서 괜한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하고 후회도 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경험한 것처럼 타향에 오면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설프기만 합니다.   그럴 때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훨씬 마음이 놓이고 정착하는데 드는 시간과 물질도 절약됩니다.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믿고 의지할만한 친척이나 든든한 선배와 친구 하나 없이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자리를 줄테니 와서 동업하면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주겠다는 초청장을 받고 온 것도 아닙니다.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아내와 조카 롯 그리고 데리고 온 하인들 정도인데 이 사람들도 아브라함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니 모든 책임은 아브라함의 어깨에 지워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가나안 이주생활 초기 형편을 가리켜 성경은‘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사51:2), ‘갈 바를 알지 못하고’(히11:8), ‘그 땅에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행7:5) 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 외국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 약속을 믿고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신다’이것이 아브라함이 꼭 붙잡고 있던 믿음이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고향을 떠나온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삶은 시간이 갈수록 서로 달라집니다. 살림이 불어난 아브라함과 롯은 좁은 공간에서 함께 지내기 불편하여 각각 살림을 나누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삼촌의 그늘을 떠나 독립할 기회가 왔을 때 롯은 성공과 출세의 길을 따라 소돔과 고모라 성이 가까운 들판으로 이사갔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향해 떠나가는 과정에서 그의 인생관이 잘 드러납니다. 롯의 눈에 보기에 그곳은 기회의 도시였습니다. 삼촌을 따라 다니던 떠돌이 유목생활을 접고 가족들과 함께 안정된 정착생활을 할 수 있는 희망의 땅이었습니다.   삼촌을 떠난 롯은 이렇게 미래에 대한 무지개 빛 희망을 가지고 꿈을 이루려고 떠났습니다.   

고향을 떠난 두 사람의 행보를 살피며 서로 다른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두고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기대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카 롯보다 더 좋은 조건과 우선권, 기득권을 가진 족장이었습니다. 얼마든지 더 좋은 자리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나이 어린 조카에게 우선권을 양보하고 포기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에 깊은 관심을 두지 못한 롯은 눈에 보이는 성공과 번영을 따라 갔습니다. 가나안으로 들어온 후 25년쯤 되었을 때 아브라함과 롯의 길은 완전하게 달라졌습니다.     

롯이 살고 있는 소돔 성이 그돌라오멜과 동맹한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사람도 재물도 다 약탈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롯의 가족들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조카의 가족을 구출하기 위하여 집에서 훈련시키던 사병 318명을 데리고 밤중에 기습하여 포로들과 재물을 되찾아 소돔 왕에게 돌려주는 공훈을 세웠습니다.  이때 소돔 왕이 아브라함의 협력에 고마움을 표하며 사람들은 돌려주고 노략물은 다 가져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소돔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당장 거부가 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아브라함이 318명의 사병을 동원할 만큼 상당한 힘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밖에서 들어온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의 부족 국가들과 평화를 유지하고 그돌라오멜과 다른 연합군들의 보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소돔 왕의 힘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소돔 왕의 제안을 분명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상급은 곧 쌍방계약과 같은 조건이었습니다. 그와 계약을 맺는 순간 아브라함은 더 이상 하나님과의 약속을 따라 살지 못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얽매여 살아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위한 전쟁에 함께 나가고 함께 종교적인 축제를 벌이며 그들이 사는 방식으로 함께 움직여야 하는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이사온 목적이 이런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것은 가나안 사람들의 삶을 배우고 그들처럼 살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의 죄악된 환경로부터 구별시키신 하나님은 가나안의 낯선 땅에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친척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 땅에서는 그래도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아브라함은 외국에서는 나그네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가나안 지역의 터주대감 소돔 왕과의 동맹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일전에 애굽으로 내려갔다 혼쭐이 났을 때 안전하게 지켜주셨던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체험한 후로 더욱 강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였기 때문 아닐까요?   

이 일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너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다’(창15:1) 하시며 위로하셨습니다. ‘너를 위협하는 사람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주겠다. 네가 포기한 소돔 왕의 상급과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상급이 바로 네 하나님이니라 내가 너의 필요를 공급하겠다’ 하는 든든한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또 주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점점 자라가고 또 견고해졌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언제나 완벽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까?   아브라함도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을 때 가족들과 딸린 식구들을 먹일 책임을 가진 아브라함은 잠시 기근을 피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질 때 제일 먼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그 땅의 나그네들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살림이 어려워지면 토박이들의 불평과 원성이 타지 사람들을 향합니다.  나눠 먹을 양식이 부족한데  나그네들이 들어와 먹을 분량이 자꾸 줄어드는 것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어려워지면 우선 나그네들을 돌려보내고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더부살이 하는 아브라함의 식구들도 그런 위협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여기보다는 안전하고 물자가 풍성한 애굽으로 이사가는 것이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아내에 대한 애굽인들의 태도였습니다. 제법 많은 양 떼들과 하인들을 거느린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들어올 때 애굽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가진 소유에 관심을 가지고 할 수만 있으면 귀화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합법적이고 명분이 서는 것은 쌍방간의 정략 결혼으로 동맹을 맺어 보다 약한 쪽을 흡수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는 아브라함은 혹시라도 아내 때문에 자기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 두려워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이고 들어갔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너무나 잘 따르던 아브라함에게 이런 약함이 있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이런 뜻밖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사전에 의논이 없이 급한 마음으로 결정한 일이었음이 드러났고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었으면 애굽의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길 뻔하였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존경받는 사람치고는 너무 아쉽고 안타까운 순간이지만 사실 아브라함도 아직은 만들어지고 다듬어져 가는 과정이었지 완전한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예상치 못했던 위기를 만나면 하나님의 약속보다 당장 편리한 해결 방식을 찾아갑니다. 이런 비슷한 일이 아브라함의 일생 중에 몇 차례 있었습니다. 시종일관 변함 없이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 연약한 우리 인생들에게 이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울 때는 가끔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사람의 방식을 따라 살아도 괜찮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그때마다 얼마나 큰 댓가를 치렀는지 살펴보면 그런 식의 삶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신부감을 찾는 과정에서 보여준 또 한 가지 믿음의 행동을 눈여겨 봅시다. 이삭은 나이 사십에 늦장가를 들었습니다. 어머니 사라는 외아들이 37살이 되었을 때까지 장가드는 것을 못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만큼 며느리 맞이에 심사숙고 한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 아브라함은 신임하는 늙은 종을 고향 메소보타미로 보내 동생 나홀의 동네로 가서 아들을 위하여 신부감을 찾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거기서 나홀의 아들 브두엘이 낳은 딸 리브가를 데려왔습니다.  가나안에서 힘 있는 부족장으로 자리를 잡은 아브라함이 본토 사람들 중에 유력한 집안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지 않고 굳이 떠나온 고향, 먼 곳에서 찾았습니다. 가나안의 권세 있는 집안 자제와 결혼하여 든든한 동맹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어렵게 고향 땅에서 데려왔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있는 삶의 철학이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동화되지 않고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고 애쓰는  신앙인의 모델입니다.   소돔 왕과의 거래를 통하여 재물을 얻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유지들과 동맹결혼으로 안정된 삶을 얻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반면에, 조카 롯은 벌써부터 이런 방식의 삶에 눈을 뜨고 성공의 기회를 찾아 소돔 성으로 들어와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던 사람입니다.   

가정을 이끌어가는 부모님들은 물론 특별히 젊은이들은 아브라함의 태도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장래의 목표를 분명히 정하여 따라가기 바랍니다.  우리 앞날에 몇 차례의 기회가 있을 겁니다. 빠른 성공과 출세를 보장하며 우리와 손잡고 일하자는 제안들이 올 수 있습니다.  그때 나는 어떤 자세로 그런 것들을 받아들일 것인지 지금 기준을 정하고 그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를 것인가 세상의 손짓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을 때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속절없이 흐르고 내 육체는 쇠약해지며 그 사이에 남들은 나보다 더 잘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할 때도 있습니다.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더라도 세상의 길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까?    그때 가서 순발력 있게 대처하면 된다고 자만하지 말고 지금부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훈련하기 바랍니다.    

현대인들이 너도나도 비전(vision)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비전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왠지 비전이 없는 무능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성공하지 못하고, 비전이 없으면 망한다’고 합니다.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으니 좋은 꿈, 원대한 비전을 가슴에 품으라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아주 좋은 충고입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는 좋은 말씀이 있습니까?   물으면 대뜸 잠언 29:18을 제시합니다.   

잠언 29:18에 ‘묵시가 없는 백성은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때 ‘묵시’를 vision(KJV) 혹은 revelation(NIV) 으로 번역합니다.   댓구 형식으로 된 잠언 본문을 보면 ‘묵시’는 우리가 생각하는 꿈이나 환상 같은 의미의 비전보다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되는 것이 옳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 곧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복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제 맘대로 방자하게 사는 백성은  결국 망합니다.   

방자하다는 말은 질서가 없이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함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니 자기 신념과 야망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마음이 끌리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잠언의 말씀을 인용하여‘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 비전은 미래에 대한 나의 원대한 꿈, 계획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해야 옳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가는 사람이었다면, 롯은 말씀이 없이 소위 자기 비전을 따라 방자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세상의 미혹은 너무 교묘하여 나의 야망을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확신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내 앞에 온 기회를 잃지 않고 싶은 마음에 세상이 주는 달콤한 제안을 덥썩 받아들이면서 이것이 나의 비전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이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비전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성경적이지 않더라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결과물이 나왔을 때 하나님이 나의 비전을 성취하셨다고 간증합니다.   

아브라함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간 것과, 그랄 왕 아비멜렉의 땅으로 이사한 것도 그의 비전을 이루기 위함이었을까요? 아들을 얻기 위하여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하갈을 첩으로 맞이한 것도 비전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어떻게, 무슨 방법을 쓰든 목적을 이루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비전 성취가 되는 것은 아닙니니다. 무엇을 이루었다는 성취에 촛점을 두기보다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가정의 가장되신 남편과 아버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있는 영적 리더가 되기 바랍니다. 창세기를 읽어가면서 아브라함의 가정과 롯의 가정을 비교해 보고 노아의 자녀들과 롯의 자녀들을 비교하기 바랍니다.  노아의 아내와 아브라함의 아내 그리고 롯의 아내를 서로 비교하여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 경고 앞에 노아의 며느리들과 롯의 사위들이 각각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신앙은 자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언제나 예외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절대적인 순종으로 사는 부모에게서 순종하는 자녀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세상의 가치와 처세술과 성공을 앞세우는 부모를 보며 자녀들은 비슷한 삶의 방식을 배우며 자랍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돈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학벌과 권력을 힘으로 여기는 이 세상의 가치들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앞으로 남전도회가 조직이 되면 남성 교우들이 최우선으로 관심을 가지고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가장들이 하나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일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가정과 내가 몸 담은 일터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을 힘쓰기 바랍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바른 비전을 가지고 영적 리더십을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 고향을 떠나온 아브라함의 삶을 살펴보며 떠남이라는 주제를 나 자신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떠남을 반복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때가 되면 부모를 떠나고 학교를 떠나며 일터와 사람들을 떠납니다.  고향을 떠나 타향으로 이동하며 고국을 떠나 외국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존재입니다.   지리적으로 혹은 관계적으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하나님, 히브리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어 하나님의 말씀이 지배하는 그 나라로 이동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을 떠나온 것처럼 우리도 다양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향과 고국을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자녀 교육, 학업과 여행, 보다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생활하기 위하여…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무슨 음성을 들었거나 환상을 보고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 나름의 계획과 준비 단계를 거쳐 어려운 결정을 하고 여기에 왔습니다.   지금 내가 믿고 따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귀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거나 눈에 보이는 환상이 있으면 좋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전에 있던 자리를 떠나왔습니까?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삶의 목적과 목표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하고 추진합시다.   악속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며 그 속에서 삶의 보람과 기쁨을 누립니다.  

여러분이 머물고 있는 그곳이 한국이든 어디든 롯과 그의 가족이 야망을 품고 들어갔던 소돔과 고모라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벧엘과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수풀과 브엘세바가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고 나의 믿음을 재다짐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거룩한 성소, 믿음으로 독자 이삭을 드렸던 모리아 산, 여호와 이레가 되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다’하셨습니다(요8:58).   아브라함이 육신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못 보았지만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때를 멀리서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아브라함에게 주신 비전입니다.    아들 이삭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려는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하기를 마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믿음의 아버지, 순종하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믿음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주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금년 일년 내내 말씀을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우 가정과 교회가 주님 주시는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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