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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 (벧후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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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 (벧후 1:1-4)


요즈음에 이런저런 많은 생각에 잠기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예수 믿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입니다.   “당신은 예수 믿는 척 하는 사람이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것 같아 답답한 마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 제대로 믿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입니까?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싫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전혀 닮지 않은 종교인들- 목사와 전도사, 신학생, 그리고 장로나 권사들, 그리스도를 전혀 닮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만 사라져도 복음은 방해를 받지 않고, 전파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빛이 꺼진 등불이 되었고, 맛을 잃은 소금이 되었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교회가 좋은 일에 알려져도 시비할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나라 초대형교회의 어두운 단면이 소개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가를 내릴 때에 이것은 내가 잘못 믿어서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면서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우리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살을 깎아내는 심정으로 회개하고 정화시키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 희망이 없습니다.  

요즈음 강대국들이 우주로 쏘아올린 과학위성이나, 통신위성, 탐사위성이 임무를 잘 수행하였지만 돌아오지 못하였거나, 처음부터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용도가 폐기된 위성이나 로켓의 파편들이 우주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많은 우주 쓰레기를 치우는 것이 시급해졌습니다.  우주선과 인공위성이 정상적으로 작동해도 부근에 우주 쓰레기가 떠다니면 방해를 받게 되고, 큰 고장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일본 우주 항공개발기구와 영국의 우주연구소에서는 이 우주 쓰레기를 치우는 우주선을 개발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레기로 전락한 교회들이 있다면, 깨끗하게 치워야 하고, 청소하는 심정으로 우리의 심령을 정화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쓰레기에 불과하다고 책망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지, 제대로 반응하는지 점검하고, 진단하는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요즈음에는 크리스천 리더십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영향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영향권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의 한 마디가 남편에게 영향을 주고, 어머니의 사랑스러운 말이 아들과 딸에 영향을 미치고, 목사의 한 마디가 온 성도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존 맥스웰 박사는 “리더십이란 영향력이다”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영향력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각, 행위, 신념, 가치에 영향을 주는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은 무려 1만 명에게 영향을 주게 된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목사가 타락하므로, 악영향을 주는데, 수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키고 교회를 떠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좋은데 그리스도인들은 밥맛이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한 어린 불교도가 예수를 전하는 성도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믿기 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믿겠습니까?”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한 힌두교인은 더 심한 말을 합니다.  “저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합니다. 당신이 이 도시에서 진실된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내게 보여준다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앞이 캄캄해집니다.  우리가 어디 완벽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가지고 안티기독교인의 말이라고 하면서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세상도 예수님을 사모하고 믿고 싶은데 요는 먼저 믿은 사람들, 전혀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않는 기성그리스도인들처럼 될까봐 주저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를 닮지 못한 우리의 삶을 조롱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주기를 더 갈망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저는 구약의 몇 사람을 통하여 오늘에 예수 믿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삭이라는 사람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랄 사람들, 블레셋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창26:28에서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고 합니다.  

이삭의 가문을 보면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보면서 한 민족, 한 나라가 와서 이삭과 화친조약을 맺어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번성할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이란 청년이 노예로 잡혀 팔려왔는데,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일생 노예로 마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창39:3에 보면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비록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팔려왔어도 그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꿈과 이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반드시 받아내고야 말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치우칠 수 없고, 세상을 따라갈 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놓고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시위대장 장군이 하찮은 노예 요셉을 보면서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시는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도 이래야 됩니다.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어보겠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수사학이나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제자들이나 학생들을 자기 밑에 두고, 자기 밑에서 배우게 하였습니다.  문하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랍비요, 스승이셨습니다.  그래서 12제자를 문하생으로 두고 그들에게 당신의 신앙과 사상과 철학을 전수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승 이상이셨으며, 알고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학생들에게 지식적인 성장 그 이상을 요구하셨습니다.  온전한 사랑과 전력투구하는 전폭적인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알고 따르는 것으로 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14:25에 보면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사람들에게로 돌이키시면서, 

눅14:26-27입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요13:34-35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1-2절의 말씀은 인사입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봅니다. 1-2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인 시므온 베드로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우리의 믿음과 같은 귀한 믿음을 받은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써,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3절의 말씀은 주어가 무엇인지, 누가 누구에게 말씀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차분하게 읽어봅니다. 3절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3절에 담긴 내용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  어떤 글을 번역하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정역으로 읽어보고, 알기 어려운 말씀은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보아야 좋습니다.  공동번역이 좋고, 쉽게 번역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경건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영광과 능력을 누리게 하신 그분을 알게 해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게는 하나님이 아들로서 하나님에게 받으신 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실 때에, 하나님이 부여해주신 능력을 발휘하여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과 경건한 생활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즐기며 누리게 하시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시고, 풍성한 생명과 경건을 누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4절입니다.  개정역으로 보시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런대로 이해가 되고, 알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나 어렵습니다.  사도 베드로 말씀하실 때에는 아주 쉽게 말씀하셨을 터인데, 어렵게 번역해놓고, 믿기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새번역으로 보시면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 천국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 이 구원의 선물, 하늘나라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신성한 성품에 참예하여야 합니다.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좀 더 성숙해졌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믿음과 생각과 인격 때문에 마음고생이 큽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숙한 제자로 산다는 것, 성숙한 제자로 성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숙이라는 말을 정의하기도 힘들고, 성숙이라는 말을 강조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들 자신에게 솔직하고 피차간에 솔직해보면, 우리 안에는 미숙한 자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몸은 장성하였고, 연륜은 쌓여만 가는데 미숙한 아이가 숨어 있습니다.  지적으로 성숙해지고, 감정적으로도 성숙해야 하고, 의지적으로 성숙해야 하는데, 지식은 동의하는데, 감정이 허락하지 않고, 의지가 마비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 영적 성숙이라고 하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인격적인 성숙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 성숙이란 무엇입니까?  고민해보셨습니까?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숙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하는 것으로 영적 성숙은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과 살아 있고, 생생한 관계를 맺으며, 주님의 삶이 우리 속으로 흘러 들어와 주님이 사시는 삶과 내가 사는 삶이 공유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제자요, 작은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0세기의 위대한 고전이 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을 쓰신 J.I.패커는 “우리는 난쟁이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존 스토트 목사님도 ‘21세기 제자도’라는 책의 서문을 쓰시면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난쟁이 그리스도인이다.  난쟁이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종교 슈퍼마켓에는 갖가지 예수들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거짓된 그리스도, 왜곡된 그리스도, 본래의 주님과는 거리가 먼, 어릿광대 예수, 인기스타 예수, 정치적 메시아 예수, 사회운동가 예수, 혁명가 예수, 보수주의자 예수, 기복주의 예수, 십자가 없는 예수 등등 거짓되고 왜곡된 예수로 가득 넘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예수를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 십자가에 없는 예수, 인기 연예인과 같은 알아달라고 주문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력이 흐릴수록 우리의 제자도는 시시해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시력이 선명하고 밝을수록 우리의 제자도는 풍성해집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을 닮기를 갈망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사실 수 있도록 우리의 심령을 비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니 성령님의 감동과 감화에 예민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말씀이 운동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채워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기를 원합니다.  
일평생 목회자로 살아오신 존 스토트 목사님이 현재 90세이신데, 그는 2007년 4월 86번째 생일일 기념하면서 공적 사역에서 은퇴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모든 강연 요청을 사양하셨지만, 그해 7월에 열리는 케직 사경회의 강연은 이미 계획된 것이어서 마지막으로 제자도를 강연하셨습니다. 그 강연을 가지고 ‘제자도’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그가 어려서부터 가진 하나의 질문이 있었다고 하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회심하였다고 하면 그 다음에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있었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유명한 질문과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말씀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다섯 단어로 된 짧은 문구도 떠올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답이 그에게는 충분히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순례의 여정을 마치고 끝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현재, 그의 생각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말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바라신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롬8:29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요13:14-15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사신 주님, 섬김의 삶을 사신 주님, 오래 참으신 주님, 생명을 내어주시는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 사실 우리의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 동화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물론 정통 진리를 고수하고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교회에 출석하고 항존 직분의 사람이 있습니다. 선행을 하면 과연 그리스도인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알려진 앨버트 리처드슨 목사님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미술 수업이 끝난 후 한 어린학생이 선생님을 찾아와서 “선생님, 제발 부탁인데, 한번만 예수님을 그려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그 선생님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네 스스로 예수님을 한번 그려보겠니?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내게 보여주렴”  잠시 후에 그 학생이 돌아왔습니다.  학생의 도화지에는 조그마한 동그라미 하나만 그려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학생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없어요.  예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광채밖에는 그릴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이 어린 아이에게서 아주 많은 것, 값진 교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초상이 되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우리 얼굴을 통하여 예수님의 광채가 드러나야 합니다. 

빌1:21에는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갈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사시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시는 중에 주님이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을 드러내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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