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상의 빛과 소금 (마 5:13-16)

첨부 1


세상의 빛과 소금(마5:13~16)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중한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금과옥조와 같이 정말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산상수훈(山上垂訓, 마태복음 5장~7장)입니다. 산상수훈의 내용은 한 마디로 ‘천국시민헌장’(天國市民憲章)입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은 천국시민인데, 과연 어떤 축복을 받으며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맨 처음 나오는 말씀은 팔복이죠.(마5:1~12) 팔복은 천국시민으로 누릴 수 있는 신령한 축복에 관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팔복 바로 다음에 나오는 말씀으로, 그런 축복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 동안 감당할 사명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동떨어진 게 아닙니다. 한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천국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의 신분(Identity)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격에 맞다’ 이런 말을 사용합니다. 신분에 걸 맞는 모습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도 격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 백성으로서의 격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격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갈 때 축복이 있고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격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가 왕왕 있습니다. 그로 인해 본인도 손해보고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 결과 복음의 문이 막히고 교회가 욕을 먹게 됩니다.

지난 주간 너무 부끄럽고 슬픈 일이 있었습니다. 신문마다 도배하고, TV 뉴스에도 오르내린 사건 이야기입니다. 어느 신문에서는 심지어 사설까지 실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하시죠? S 교회에서 신년 첫 주일에 폭행 사건이 있었죠. 그것도 부목사가 담임목사에게 폭행한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그 내막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그 자체로 기가 막혔습니다. 

그 교회는 대통령이 다니는 교회로 유명해서 더욱 더 충격이 컸습니다. 인터넷마다 비난하고 조롱하는 댓글들이 달렸는데,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그 중에 이런 게 있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이 제일은 주먹이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신년 벽두에 새해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는데,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한국교회에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부끄러운 소식들이 도처에서 들려오고 있었는데, 이런 일까지 터지니까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교회는 다 한 몸인지라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새벽에 강단에 엎으려 기도하는데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그리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격이 떨어졌구나 하고 새삼 느꼈습니다.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교회도 큰 일, 나라도 큰 일, 우리 개개인도 큰일 나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우물쭈물 대면 하나님이 곧 진노하시겠다고 경종을 울리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남의 일로 비난하고 욕할 게 아니라,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것처럼 느껴야 합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와 축복을 주셨는데, 마치 졸부처럼 우쭐대며 격에 떨어지는 모습으로 살았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격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 본연의 신분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격에 맞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1] 그리스도인의 신분 의식 : 특권(축복)과 책임(사명) 

사람이 신분이든 격이든 그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추하고 우스워집니다. 여러분, 신분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 있나요? 특권과 책임 두 가지입니다. 신분의 양면성입니다. 마치 동전의 겉과 속의 관계와 같습니다. 신분에는 그에 따른 특권(축복)이 주어집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에 따른 특권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죠. 다른 한편으로는 책임(사명)이 부여됩니다.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 ”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리를 놓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 주는 책임자입니다.   

모든 신분에는 이처럼 특권과 책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국민이라고 하면 그에 따르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 영토 안에서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고, 경제활동도 할 수 있고, 그 밖에 이러저런 혜택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국민으로서의 책임 즉 의무가 있습니다.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등이 있습니다. 만일 의무를 감당하지 않으면 국가 권력이 놓아두지 않습니다. 당장 특권을 제한합니다. 

천국 백성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신분에 따른 특권(축복)도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 앞에 부여받은 책임(사명)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누리고 감당할 때 비로소 격에 맞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특권만 챙기려고 하고 책임은 회피한다면 격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축복이 제한되고, 심하면 다 거두어가십니다. 
  

[2] 그리스도인의 책임 :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말씀하십니다. 이 책임을 잘 감당할 때 정말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그 책임을 무엇입니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①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   

이 말씀 가운데 세상이란 말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외딴 섬이나 깊은 산 속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가운데 어울려 사는 존재라는 겁니다. 13절~14절.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 그리스도인은 어디까지나 세상에 살면서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떠나서 은둔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칭호가 그런 뜻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람 즉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소속은 천국이라는 겁니다. 이게 참 어려운 점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니!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성도(聖徒 Saint)라는 호칭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성도는 성자(聖者) 즉 거룩한 사람라이란 뜻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성자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암시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라는 요구입니다. ‘거룩’이란 단어는 본래 구별(distinction, difference)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안에서 살되 세상과 구별되게 살라는 겁니다. 세상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리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차별성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런 특성을 잘 설명해 주는 비유가 바로 소금과 빛입니다. 

② 세상의 소금 : 

소금의 비유를 잘 이해하려면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소금이 흔하지만, 고대에는 소금이 아주 귀했습니다. 로마 시대에 salarium라는 말이 있었는데 salt-money라는 뜻입니다. 당시 소금은 중요한 생필품이었던 소금(salt)을 살 수 있는 별도의 돈을 준데서 유래합니다. 여기서 봉급을 의미하는 단어 salary가 나왔습니다. 그 정도로 소금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소금은 그 염분으로 인해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는 등의 여러 가지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조미료와 방부제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씀은 맛이 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라는 뜻입니다.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고대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소금이 지금 우리와 다르게 바위로 된 ‘암염’(巖鹽 Rock Salt)입니다. 이 암염을 정제해서 순수한 소금을 추출한 후에는 그 속에 뒤섞여 있던 흙이나 불순물을 갖다 버리게 됩니다. 이 때 경작지에 버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독한 성분이 있어 밭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길거리에 갖다 버리게 되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갑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습에 빗대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경고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이처럼 죄악이 가득한 것은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죄악으로 부패해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죄성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혹시 맛을 잃어 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기는커녕 한데 어울려 죄를 짓고 살고 있지 않나 말입니다. 백보 양보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은 못 받아도 욕은 먹지 말아야 하는데 욕을 먹고 있다면 한참 잘못된 겁니다. 물론 우리가 잘하고 있어도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욕을 먹고 조롱을 당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건 욕을 먹은 게 아니라 잘해서 핍박을 당한 것이죠. 오히려 핍박은 순기능이 있습니다.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인의 차별성을 증거하게 됩니다. 

③ 세상의 빛 : 

성경을 보면 세상을 어둠에 비유합니다. 세상은 죄악과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빛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14절~15절.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bowl)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stand)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고대에는 흔히 동네가 산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빛은 본질 상 드러나야 합니다. 등불을 말(됫박) 안에 숨겨두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스탠드에 올려놓고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비추는 게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빛을 비추라는 말씀입니다. 

빛을 비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6절.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선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관심한 것 같아도 뒤에서 주시합니다. 좋게 보면 그만큼 기대한다는 겁니다. 자기들은 죄를 짓고 살지언정 크리스천들만큼은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더욱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잃으면 세상에 소망이 없기 때문에 심각합니다.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이 변화될 기회가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을 비추는 것은 책임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에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됐지만, 그 믿음이 진실하다면 행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행위로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해야 된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신행일치(信行一致)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산수훈 가운데 강조하신 바입니다. 마7:18~21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나무는 열매로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과나무라면 사과를 맺어야 합니다. 만일 사과가 안 열리면 가짜입니다. 찍어 버려야 합니다. 입술로만 주요 주여 한다고 해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무서운 말이죠.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교리 뒤에 숨어서 안일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한 방 먹이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선생도 이 점에 대해 심각하게 말씀합니다. 약2:17~20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그 믿음은 가짜요 그런 건 귀신들도 흉내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런 가짜 믿음 갖고 구원받겠느냐 이겁니다. 구원 못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 비해 도덕적 우위를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나라에 1천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합니다. 전 국민의 20%입니다. 이건 상당한 비율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소금과 빛의 책임을 다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나라 전체가 뒤집어져야 맞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 TI)가 있죠. 국가별로 투명성을 조사해서 순위를 발표합니다. 소위 반부패지수입니다. 한국은 대개 40위 전후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게 시정되지 않으면 요즘 말하는 국격(國格) 운운 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대개 기독교 인구 비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순위가 앞서는데, 예외가 되는 나라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일까요? 대한민국입니다. 상품으로 비유하면 브랜드 가치가 별로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 한국교회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에는 관심이 많지만, 축복은 좋아하지만, 빛과 소금의 책임은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브랜드 가치가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기윤실에서 조사한 「2010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결과를 보면 참담합니다. 41.48점인데,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3년 연속 낙제점수입니다. 대학으로 말하면 학사 경고를 넘어 제적 처리 상황입니다. 그 이유를 무엇으로 꼽았느냐 하면, 대표적으로 언행불일치와 비윤리적 행동입니다. 

물론 소수의 교회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잘못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비춰졌다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면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핑계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몸 즉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 고백하는 대로 우리는 공회와 서로 교통하는 성도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멤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사인(私人)이 아니라 공인(公人)입니다. 나 혼자 잘못해도 교회나 다른 그리스도인이 함께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공인의식을 갖고 다 같이 힘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3] 한국교회의 최우선과제 : 영성과 도덕성의 회복 

이렇게 살펴볼 때, 오늘날 한국교회의 최우선과제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교회 사이즈를 늘이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이즈가 늘어나는 게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는 유기체이므로 당연히 성장하고 사이즈가 늘어나야 합니다. 다만 우선순위를 말하는 겁니다. 성장보다 중요한 것은 성숙입니다. 이를 위해 영성과 도덕성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버티고 있으면 아직은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가 문제이고 그리스도인들이 문제입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죠. 소돔 성이 왜 유황불 심판을 받고 흔적도 없이 멸망했습니까?(창18:16~19:29 참조) 근본 원인이야 소돔 성 사람들의 죄악 때문이지만, 직접적으로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이 간절히 기도할 때 의인 10명만 있으면 심판을 철회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10명이 없었습니다. 소돔에 살고 있었던 롯도 믿는 자였습니다. 그가 빛과 소금의 책임을 다했다면, 그 가족들 가운데 그 이웃들 가운데 10명 정도는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이 망하고 잘못되는 것은 세상 사람들 탓이 아니라 교회 탓이요 그리스도인들 탓입니다. 세상은 본래 죄악이 가득한 곳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그 시대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남아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아 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대를 접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희망이고 그리스도인들이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들마저 무너진다면 그 어디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 세상을 책망하는 것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하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에베소교회에 주신 말씀(계2:1~7)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계2:4~5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교회가 신앙의 본질을 상실했다는 겁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긴다고 경고하십니다. 무서운 말씀이죠. 교회 문을 닫겠다는 뜻입니다. 

이런 까닭에 호세아는 그 시대의 사악함을 보고 애타게 호소합니다. 호6:1~2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게 살 길입니다. 

우리가 먼저 회복되는 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첫 출발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변혁(變革)이라 부르죠. 변혁의 원리는 ‘나부터, 지금부터, 여기서부터’(From Me, From Now, From Here)입니다. 남의 탓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문제이고 우리가 문제입니다. 

흔히 우리는 그럽니다. 나 혼자서 무엇을 하겠어? 그러나 생각보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나는 약하지만 위대하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다니엘을 보십시오! 혼자서 고군분투했진 그 시대를 바꾸었습니다. 이방 제국을 변화시켰습니다. 요셉은 소년 시절 애굽에 노예로 끌려갔던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소년 시절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총리가 된 게 아닙니다. 그러나 처한 상황 속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았을 때 세상을 변혁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그리스도인들조차 바르게 살면 오히려 손해 본다는 이상한 피해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허위의식입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바르게 사는 게 승리이고 축복입니다. 요즘 보십시오. 개인은 여전히 죄인이지만,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사회는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합니다. 공직자가 되려면 엄정한 도덕성을 요구합니다. 기업도 윤리경영을 하지 않으면 갈수록 고전합니다. 세상도 갈수록 정직으로 요구하는데,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직하게 깨끗하게 살 때 하나님의 축복을 유지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더하시는 가운데 축복의 선순환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년 초에 무엇을 결심하십니까? 신앙의 본질이며 그리스도인의 책임인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고자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나도 살고, 한국교회도 살고, 나라도 살릴 수 있습니다. 부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