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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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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 5:1-3)
  

인도의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갈등으로 암살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호주머니에는 놀랍게도 예수님의 말씀인 오늘 우리가 읽은 산상수훈(마 5~7장)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는 힌두교도였지만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최고의 말씀으로 여겨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밤낮으로 애송하였던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3절)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공동번역) 

1. ‘가난’이란?

본문에서 ‘가난’이란 말의 뜻은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절대 극빈’을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히브리어로 ‘가난(에비온)’이란 말은 가난하게 되어서(to be poor), 비천한 처지로 전락되어 (to be humble), 억압받는 상태에 빠지고(to be depressed), 이런 외적인 상태와 더불어 내면적으로, 풀이 죽어 있고 (cast down), 사는 것을 괴로워하는(afflicted)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에서 ‘가난’이란 물질적인 가난과 함께 정신적인 가난도 포함합니다.
시70:5절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시69:29절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2. 물질적인 가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재물과 행복과의 관계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물질적으로 가난한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으로 연명하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어린 자식들의 우유 값을 구하기 위하여 남의 집 고철을 훔쳐야하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일용할 양식이 없어 주린 배를 움켜잡고 잠자리에 드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진료비가 없어 질병을 안고 죽어가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음이 깊어 행복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종교적인 위선자가 되기 쉽습니다.
행복할 수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알았어요.
‘인간이란 일용할 양식이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따라서 우리 기독교는 인류의 ‘먹고 사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습니다.
저도 우리 교우들의 물질적인 축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한스 큉이라는 신학자는 “가난은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저주를 가르치기도 한다. 가난, 고통, 배고픔은 비참함이지 행복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물질적인 풍요가 행복을 보장합니까?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듯이 인간은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풍족과 만족은 다른 것입니다.
행복은 풍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만족에서 옵니다.
풍족하면 편리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곧바로 행복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풍족하지 못하면 불편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이 곧바로 불행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손빨래를 하던 가정주부가 풍족해져서 세탁기를 구입하여 사용하게 된다면 생활이 편리해졌지 행복해진 것은 아닙니다.
혼동하면 안 됩니다.
세탁기 사서 행복하다면 지금 주부들은 행복해서 매일 춤추고 다녀야 합니다.
지금 가정에 세탁기만 있습니까?
청소기, 냉장고, 전기밥솥, 전기다리미........ 
주부들, 행복해서 춤추고 다녀야지요?
그런데 춤추고 다닙니까?
행복하지 않잖아요?

세탁기 쓰는 생활이 습관화되면 그저 덤덤할 뿐이지 빨래할 때마다 행복하진 않습니다.
T.V.에서 선전하는 것,  탤런트들이 세탁기 옆에서 활짝 웃고 행복해하는 것, 이거 다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행복한가?

3. 심령의 가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돈이 많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위가 높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건강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배부른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1)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지존파’ 아시지요?
김기환(두목), 강동은, 김현양, 강문섭, 문상록, 백병옥, 이경숙 이상 일곱 명은 백화점 고급 고객 명단을 확보하고,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만 골라 죽이는 패륜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육을 먹고, 증거인멸을 위하여 사체를 태우는 잔인한 행동을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현장검증에서조차 ‘더 못 죽인 게 한이다.’라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던 철면피들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차고 손가락질하고 있을 때, 자기 자신의 젊은 시절의 구치소 생활을 생각하고, 이들에게 관심을 가진 한 교회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수차례 3만원씩 영치금을 넣어주고, 겨울에 솜옷을 넣어주고, 성경책을 넣어주고, 편지를 쓰고 정성을 다했습니다. 
두목 김기환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악마가 드립니다.’ 
김현양으로부터도 편지가 왔습니다. 
‘보내주신 영치금 잘 받았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분이지만 저 같은 죄인에게 이런 사랑을 전해주시는 것을 보니 하느님 심부름 하시는 천사님이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곳 교도소를 죄짓고 들어온 삭막한 범죄자들이 우글대는 곳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랍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곳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거든요.…’ 

 이제 사형선고를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이런 평안을 주신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참 대단하시지요? 
이 글을 읽을 때 저의 마음속에 와 닿는 글귀는, 그리고 긴 여운으로 남은 말은 ‘천하에 둘도 없는 악마’, ‘저 같은 죄인에게’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어떻게 자기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았을까? 
극악무도한 범죄자일수록 ‘내가 왜 죄인이냐? 왜 나만 죄인이냐?’ 항변하기 일쑤인데 자신을 죄인이라고 통절히 느낀다니….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큽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 중의 은혜는 ‘나는 죄인이다.’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은혜는 병 고침을 받은 것보다도,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보다도, 재물의 축복을 받는 것보다도, 더 큰 은혜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자기 자신의 죄인 됨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입니다. 
계 3: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물질적인 부요 때문에, 배부르고 등 따뜻한 것 때문에 자신의 죄인 됨을 알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곤고한지, 얼마나 그 처지가 가련한지, 얼마나 가난한지, 얼마나 눈멀었는지, 얼마나 벌거벗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권고합니다.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저는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내가 얼마나 가련하고, 가난하고, 비참하고, 보지 못하고, 헐벗었음을 아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사람이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2) 마음이 가난한다는 것은, 지옥의 두려움을 아는 것입니다.
지옥의 두려움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히 9:27절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심판은 우리를 천국과 지옥으로 가릅니다. 
신앙생활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가장 정확한 대답은 천국가기 위해서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또 지성인들에게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하여 갖가지 설명을 갖다 붙입니다만 한마디로 ‘예수천당’입니다. 
예수천당! 
예수 믿고 천당 가기 위함입니다.

지옥이란 안 가면 좋고, 가도 할 수 없는 곳이 아닙니다. 
가서는 절대 안 되는 곳입니다! 
성경은 지옥을 ‘유황불 못 ’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이 체험하고, 사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곳이 ‘유황불 못’이었습니다. 
계 19:20절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계 20:14절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어떤 분들은 말합니다. 
“지옥? 지옥 가더라도 죽으면 그만이지!” 
그러나 지옥의 고민은 죽지 않는데 있습니다. 
빨리 죽고 싶은데 죽지 않아요.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죽지 않습니다.
저가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지요. 
에덴동산에는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선악과를 따먹고 죄지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고, 생명나무를 화염검으로 보호하셨나요? 
창 3:22-23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24절 “이 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했을까요? 
선악과보다 더 고급과일이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 이유는 죄지은 채로, 저주받은 채로, 영원히 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원히 사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저주이고 형벌입니다. 
지옥은 죽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지옥의 고민은 죽지 않는데 있습니다. 
언제 하나님은 생명나무 과일을 먹게 하셨나요? 
구원시킨 다음, 구원이 이루어진 다음에, 형벌이 없어진 다음, 생명나무 과일을 먹고 영생하도록 하셨습니다. 
계22:2절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천국에 가면 생명나무 과일을 먹고 즐길 수 있습니다. 
계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지옥의 형벌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3)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은 죄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고(helplessness),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해보면 참 이상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아이러니입니다. 
깨끗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깨끗하다.’ 라는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마음 속 깊이 감추어진 더러움이 새롭게 드러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선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이만하면 선하다.’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마음속 깊이 뿌리내린 욕망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저렇게 선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고 칭찬하지만 하나님 앞에선 자신의 모습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이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예배당 안에 먼지가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줄기 햇볕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이곳의 형편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어두운 세상에서 뒹굴 때는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였지만, 성령이 비취시는 밝은 빛 앞에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그 말씀이 빛이 되어 내 추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말씀은 칼이 되어 내 추한 영혼을 헤집습니다. 
깨끗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확실히 드러나는 자기 자신의 더러움을 보고, 선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분명해지는 자기 자신의 악함을 보고, 우리가 고백하는 외마디는 롬 7:24절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마 8:25절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찬363장에서 한 이름 모르는 작사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2절 “주가 죄를 살피면 누가 능히 서리요 오직 주만 모든 죄 용서하여 주시니 주님 앞에 떨면서 용서하심 빕니다.” 
3절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고 바라듯 나의 영혼 주님만 간절하게 바라네. 이스라엘 백성아 주를 바라보아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자신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주님만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1) 자기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사람입니다. 
2) 지옥 형벌이 두려움을 아는 사람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인이므로 주님 앞에 떨면서 용서하심을 비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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