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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이 은혜를 만끽하지 못하는 이유 (요일 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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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은혜를 만끽하지 못하는 이유 (요일 3:20-24)


지난 주일에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할 수 있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천 앞바다가 사이다라도 곱부가 없으면 못 마신다고 했는데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마실만한 그릇을 준비해야 됩니다. 마실만한 곱부를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신학적인 차원보다 실질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이 왜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지 못하느냐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만끽하지 못하게 될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느냐. 두 가지 극단적인 경우가 가능한데 하나는 신앙을 떠나가는 것이고 하나는 아주 율법주의적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극좌, 하나는 극우인데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데에서 신앙을 떠나버리든가 아주 고집스럽고 완고하고 바리새인적인 율법주의적 신앙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만끽하지 못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첫 번째 이유는 무지함 때문입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르면 모릅니다.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했고 또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지만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알기 위해서는 듣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읽어서 아는 게 아니고 들어서 아는 것입니다. 믿음은 읽음으로 오는 게 아니고 들음으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유명한 과학자였던 칼 세이건이라는 사람은 무신론자로 살다가 무신론자로 죽었어요. 그는 죽기 전에 믿음을 갖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았다고 했어요. 왜 믿으려는 마음이 있는데도 믿어지지 않았느냐? 그 구체적인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추측하기에는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적인 지성인이라도 자기발로 교회를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능력 있게 증거되는 것을 들어야 믿음을 얻을 수가 있고 이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으려는 마음으로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고 들음으로써 믿음이 생깁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콜럼비아 대학을 다닐 때 주일이 되면 할렘에 있는 교회를 찾아가서 설교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왜 오바마가 할렘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느냐? 흑인이기 때문에 간 게 아니에요. 흑인이기 때문에 흑인교회를 찾아간 게 아니고 거기에 진정한 설교가 있었기 때문에 찾아간 것입니다. 물에 물 탄 것 같은 백인교회 설교보다는 흑인 설교, black preaching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성경적이기 때문에 본인의 믿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바마가 할렘의 교회를 찾아가서 설교를 들은 것은 본인의 신앙을 위하여 바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될 사람도 본인의 신앙을 위해서는 고상한 설교, 지적인 설교, 품위 있는 설교보다도 성경적인 설교, 힘 있는 설교,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설교를 들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고 가장 흔한 이유는 마음속에 남아있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이 죄책감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하여 부담감을 갖게 만들고 영원한 방랑객, 영원한 손님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사위는 영원한 손님이라고 하는데 마음의 죄책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교회에서 영원한 손님으로 끝나고 맙니다. 

왜 마음속에 죄책감이 남아 있느냐?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고 그건 믿기는 믿는데 본인 스스로가 보기에도 자기가 그리스도인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순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자격지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때, 영적인 것을 접할 때 스스로 자격지심을 느끼고 스스로를 정죄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어제는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세상 노래를 부르던 그 입으로 이제 거룩한 찬송가를 부르는구나 하면서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민망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사랑하신다는 복음의 진리가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어차피 내가 이런 은혜를 입을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심리적인 현상일 뿐인가 그건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그게 분명하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위치에 우리가 남아있는 한은 아무런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만년 손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평강을 얻고 뭔가 신앙적인 담대함을 얻기 위해서라도 바로 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을 차려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이미 의롭다고 여겨주셨습니다.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육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감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 2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라고 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책망한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책망하기 전에 내 마음이 나를 책망하는 한은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기도의 능력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나를 책망할 것이 없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변화를 꾀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거저 주시는 선물이지만 그것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내 신앙 상태에 대하여 자신감을 얻어야 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신앙생활에 급진적인 변화를 꾀해야 되는데 나를 괴롭히던 습관적인 죄를 버리고 또 평소에 마음에 걸리던 일을 정리하고 내가 평소에 민망하게 생각하는 것을 잘라내고 정신을 차려야 됩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 오른 손이 너희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고 했습니다. 찍어 내버려서 의로워진다면 두 손을 다 찍어버려도 부족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의롭다함을 받기 위한 것보다는 우리의 신앙적인 발전, 뭔가 내가 늘 위축되고, 늘 주저하고, 늘 무력함을 느끼는 데에서 우리가 한걸음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미 나에게 족하지만 그 은혜를 내가 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문제가 무엇이냐. 무력함을 느낀다는 데에 있습니다. 무력함-powerlessness. 무력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 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은 믿는 사람 속에 거하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책망하고 있는 한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만한 담대함을 얻지 못하는, 담대하게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달라든가 능력을 달라든가 담대하게 구하지 못하고, 구해도 주실 것처럼 생각되지가 않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지 못한 것입니다. 늘 쭈뼛거리고 위축되고 눈치보고 그것은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래서 영적인 슬럼프를 벗어나오기 위해서는 내가 전에 하지 않던 변화가 필요합니다. 기도원에 찾아가서 금식을 하고 기도한다든가 이번 기회에 담배를 끊는다든가 소득의 절반을 기부한다든가 새벽기도회를 나온다든가 회개한다든가 이런 이전에 내가 하지 않던 급진적인 행위를 통해서 내 신앙생활에 변화를 유도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만 내 자신이 기쁩니다. 내 자신이 영적인 fitness, 영적으로 건강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무엇과 비교할 수 있느냐면 권투선수가 시합을 앞두고 충분히 훈련해서 준비가 잘 된 선수가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옛날에 모하메드 알리의 전성시대에 저희 아버님하고 저하고 그의 권투시합을 즐겨 봤는데 사실 그때만 해도 전성시대는 아니고 많이 피곤해서 제가 기억하는 것은 클린치 하는 것밖에 없어요, 상대방을 껴안고 싸우지 못하고 쉬려고 하는. 그때만 해도 전성기를 지난 것이지만 그러나 모하메드 알리가 전성시대에는 하루에 10㎞를 앞으로 뛰고 10㎞를 뒤로 뛴다고 했어요. 엄청나게 트레이닝을 했습니다. 힘든 트레이닝 그것이 시합의 승리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합하러 나갈 때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사기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몸이 가벼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에요. 영적인 트레이닝을 하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의 상에 앉을 때 주님의 봉사를 할 때 적어도 담대함이 생기고 사기가 올라가고 준비가 되는 거예요. 그러지 못하고 꿔다 놓은 보리 짝처럼 늘 쭈뼛거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게 심리적인 만족을 위한 게 아닙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차원에서 주관적인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분명한 효과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매일 앞으로 10㎞ 뒤로 10㎞를 뜁니까. 어떻게 평생 그렇게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느냐. 그 과정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믿음에 관록이 생겨서 은혜 속에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담대함이 어느 정도 발전하면 그때부터는 배짱이 생깁니다. 영적인 관록이 붙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저보다 기도를 많이 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저보다 성경을 더 많이 읽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관록은 제가 더 많습니다. 여러분은 아직 졸병이고 저는 장교입니다. 그건 제가 과거에 그런 훈련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면서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군대의 장성이 훈련병처럼 훈련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적인 피트니스만을 따진다면 훈련병이 장성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렇지만 장성이 실력과 관록은 더 많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그도 훈련병이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과하고 훈련을 받고 경험을 쌓고 여기까지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도 관록이 붙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경험을 갖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함 - 이 담대함을 배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 앞에 배짱이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의로워서 나를 부르신 것이 아니고 내 단점을 아시면서도 나를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내 안에 시작하신 일을 이루시지 않으실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담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이 은혜를 알기 위해서 죄인으로 남아있으면 안됩니다. 죄인으로 남아있는 한은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실감나지 않습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의롭게 살려고 애를 쓸 때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실감나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것이지요. 역설적입니다.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으로 남아있는 한은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의롭게 살려고 애써야 됩니다. 그걸 통해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더 실감하고, 더 경험하고 더 그 능력을 알게 되고 나뿐만이 아니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증거할 수 있는 실력, 영적인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설사 넘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날 줄 압니다. 

제가 몇 주 전에 스키를 타러갔는데 스키를 신은채로 넘어지니까 일어나는 게 그것도 실력이 필요하더라고요.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슬로프에서 영원히 누워있어야 됩니다. 일어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그게 실력이에요. 그래서 폴을 잘 사용해야 저처럼 가벼운 사람도 일어날 수가 있는데 그리스도인이 배워야 되는 것은 실수했을지라도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이 자기를 정죄하는 것만 있는 경우에는 일어나지 못하고 낙심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바로 담대함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담대함입니다. 이 담대함을 얻으면 어떻게 되느냐.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다시 말하면 기도의 능력이 생기고 그의 신앙과 인생이 풀리기 시작한다는 얘기입니다. 수험생들에게 시험 잘 보라고 주는 선물 중에 두루마리 화장지가 있지요. 잘 풀리라고. 인생이 잘 안 풀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왜 인생이 안 풀릴까. 근본적인 차원에는 신앙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지 못한 것입니다. 뭔가 자기 마음이 늘 자기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걸 극복해야 됩니다. 그걸 극복해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으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구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고 신앙과 인생이 풀리는 것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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