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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여!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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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여! (마 5:7)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 마태복음 5장 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에세이가 하나 있습니다. 

퇴근길에 남편이 불쑥 노란 국화꽃 한 다발을 내밀었습니다. 당신한테 주는 '가을편지'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아내는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아무 이름도 붙지 않은 날,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아닌 날, 꽃을 선물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꽃병에 꽂아두자 남편도 흐뭇해했습니다. 

다음 날 퇴근길에 남편은 꽃을 또 사왔습니다. 문제는 그 후에 생겼습니다.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퇴근하는 남편의 손엔 어김없이 국화 꽃다발이 들려 있었습니다. 집안이 온통 꽃으로 가득 찼습니다. 꽃밭이 되었습니다. 꽃을 둘 마땅한 장소도 이제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아내가 생각했습니다. 혹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꽃을 사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오늘도 꽃을 사 오면 꼭 따져봐야지 하고 잔뜩 벼르는데, 다행히도 이 날은 꽃을 사들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꽃 대신 옷에 넣는 고무줄과 옷핀, 좀약을 잔뜩 사들고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남편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 도대체 왜 그래요?" 물어보았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남편이 자초지종을 털어놓았습니다.

얼마 전부터 회사 앞 골목에 웬 할머니가 어린 손녀를 데리고 나와 장사를 시작했는데, 처음엔 국화꽃을 팔더니 사흘 전부턴 목판에 고무줄, 옷핀 같은 걸 늘어놓고 팔더랍니다. 남편은 이것이 너무 딱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의 이 말을 들은 아내는 말없이 남편의 손을 꼭 잡아 주었습니다.

인간을 가리켜서 영적인 동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영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지배합니다. 말하는 것, 행동, 표정까지도 다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이렇게 표정 짓고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영의 지배를 받은 결과 그렇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영이 어둡게 되면 우리 모든 삶이 다 어둡게 되고, 영이 밝으면 삶이 다 밝습니다. 말하는 것도 밝고, 행동하는 것도 밝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영은 자기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선한 영의 영향을 받기도합니다. 우리가 참된 기독교인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 성령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성품을 다 드러내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2장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사는 것은 내 속에 오신, 내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때 들어오신 그 예수님이 나를 주장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실 때는 영으로 들어오시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님이 들어오시게 되는데, 성령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신앙이 진실하고 신실할 때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영은 강하고 힘있게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진실하지 못하고 무늬만, 모습만 신자라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히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인의 영, 성령님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으면 성령님이 오십니다. 

그런데 성령님의 성품은 어떤 것인가요? 성령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늘 ‘사랑의 하나님’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사랑입니다. 긍휼하심입니다. 성경전체에서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25편에서는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시25:6)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는 계속해서 긍휼하심이 가득합니다. 느헤미야 9장에서는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서 계속해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과부는 남편이 없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 중에서도 아무에게도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나그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유 있게 여행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올 데 갈 데 없는 사람들,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어쩔 수 없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같은 사람을 가리켜서 나그네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아무도 도와주지 아니하고, 아무데도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계속해서 긍휼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좋아하시는 것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저 멀리 가서 하든지 가까운 곳에서 하든지 복음 전파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좋아하십니다. 제가 너무 너무 좋아하신다고 말씀드릴 때 그 뉘앙스를 여러분들이 알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좋아하심은 당신만 좋아하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좋아하시도록 만든 사람도 함께 좋게 만들어주십니다. 심리적인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좋게 만들어주십니다. 한 번 체험해보십시오. 

또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예배입니다. 제사입니다. 예배를 너무너무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로 진실되게, 신실되게 주일마다 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예배에 참여하여 정말로 하나님을 향해서 온 맘을 다해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너무 너무 좋아하십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또 좀 더해서 수요예배를 드리고, 또 형편이 되는대로 새벽예배까지 하나님께 신실하게 예배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너무 너무 좋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런 사람을 좋아하시는지 한 번 체험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경험해보시면 틀림없이 ‘아 그때 우리 목사님이 한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것을 다 체험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참으로 좋아하시는 것이 제사이고 예배인데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제일 좋아하시는 것이 예배이지만 그만큼 긍휼을 좋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처럼 긍휼 그 자체, 사랑 그 자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인 성령님이 우리 속에 충만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긍휼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로 긍휼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닮아서, 예수님을 닮아서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가엾게 여기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고 힘없고 연약하고 없는 사람을 위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 차 있게 됩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이제 긍휼이 어떤 것인가를 정의해야 되겠습니다. 긍휼이란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마음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엾게 여기는 마음인데, 하나 더 알 것은 이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간에 그 딱한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이 나라면 내가 무엇을 원할까, 무엇을 바랄까를 생각하고, 그것을 해주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을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긍휼이라고 말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말로만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으로만 마음으로만 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로 불쌍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보았을 때, 참 불쌍하다, 참 딱하다고 생각하고 눈물까지 흘렸다면 이것이 긍휼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야고보서 2장에서 만일 형제나 자매 중에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5-17)라고 아주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런 것은 긍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민이고 동정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가 좀 날카롭게 비판한다면 그런 것은 긍휼이 아니라 외식입니다. 위선입니다. 사실 마음속은 아무렇지 않은데, 그저 나도 자비가 있고, 긍휼이 있고 사랑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서 불쌍하다고 눈물까지 흘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긍휼입니까? 긍휼의 대표적인 것으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있습니다. 그 앞을 제사장이 그냥 지나갑니다. 여러분, 이 제사장이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갈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그 딱한 사람을 보면 다 불쌍하게 여깁니다. 참 안 되었다고 혀를 찹니다. 

레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긍휼입니까? 그저 불쌍하다고 한 마디 말하고 마음속에 담지 않고 그냥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마리아 사람이 왔습니다. 그 사람은 다가가서 치료를 해주시고 여관에 데리고 갔습니다. 여관주인에게 지금은 돈이 이것밖에 없으나, 혹시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마련해서 주겠다고 그를 부탁하며 신신당부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귱휼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긍휼을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정신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녁이 되었는데, 식사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딱하게 여기면서 저들이 먼 길을 가는데 먹지도 못하고 어떻게 할지 걱정하면서 예수님께 저 사람들이 시내에 가서 무엇을 좀 사 먹도록 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네들은 할 도리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긍휼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지금 제자들이 무언가 준비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고,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이것입니다. 

조금 전에 장로님이 말씀하셨지만 에디오피아에는 거의 다 극빈자들이고 불쌍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이들을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 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말로만 “하나님, 저 불쌍한 사람들을 입혀주십시오. 공부시켜 주십시오. 저 북한 사람들을 먹여주십시오.”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양에 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들으시고 피식 웃고 마십니다. 너희들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을 쓰고 애를 쓰면 그 다음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오병이어입니다. 오병이어를 만들어주시면 그것을 가지고 에디오피아, 캄보디아에 나가서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알았습니다.’ 하고 나갑니다. 나가면 하나님이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은혜를 좀 받아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런 것을 체험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법정에서 재판을 하는데, 월세를 내지 못해서 강제퇴거를 해달라는 재판이었습니다. 판사가 보니 법적으로는 강제퇴거를 시키라는 판결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참으로 딱했습니다. 재판을 하던 중 판사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습니다. 그러자 방청객들이 다 돈을 조금씩 내어 모았습니다. 넉넉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모은 돈을 판사는 원고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일부를 지금 드립니다. 당신은 지금 일부를 받았으므로 당신의 퇴거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긍휼입니다. 어느 판사가 이런 판결을 내릴 때 불쌍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바라기는 예수 믿는 판사들이 다 이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최대의 긍휼이 있습니다. 바로 어제가 크리스마스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 저는 솔직히 크리스마스가 되면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병일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식을 낳으면 행복하게 살라고, 멋있게 살라는 것이 다 소원인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식을 보내실 때는 죽게 하기 위해서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긍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실 때 노아의 홍수처럼 다시 멸망시킬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보니 너무 딱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마음은 불쌍한 마음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인생들의 죄를 하나님 당신이, 당신의 아들이 대신 짊어지도록 해야겠다고 결정하시고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성탄절을 즐거워하십시오. 그러나 의미를 알고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 이런 긍휼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머니에서 돈을 내는 것이 힘들지만 그래도 우리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습니다. 내 아들을 내줄 수 있습니까? 내 딸을 내줄 수 있습니까? 이 땅에 멸망이라는 판결을 하실 수밖에 없는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짐을 지겠다, 내가 아들을 내놓고 이 아들에게 다 덮어씌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긍휼한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하게 여기면 긍휼하게 여기는 그것이 나에게 돌아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거래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이나 가여운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정도로 그 속에 그리스도가 가득한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이 여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래하시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성품을 보고 인격을 보고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긍휼을 얼마나 좋아하시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긍휼이 있는 사람 속에는 그리스도가 충만한데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심판을 받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기도 긍휼을 여김을 받는다는 이 말속에는 이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미를 알든 모르든 간에 분명한 것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게 됩니다. 

긍휼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늘 생각나고,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 항공회사에서 조종사로 근무하던 폴란드인 한 사람 있었습니다. 조국 폴란드가 전쟁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국에 들어가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가는 길에 오스트리아 비엔나 호텔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 밤에 독일 게슈타프에 쫒기고 있다는 유대인 젊은이 한 사람이 급히 도와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참 어려운 부탁입니다. 그러나 폴란드 조종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숨겨주었고, 생명을 걸고 국외로 탈출시켜주었습니다. 

그 이후 조종사는 조국에 돌아가서 전투조종사로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혁혁한 공로를 많이 세웠습니다. 그러다 전투를 하던 중 영국 상공에서 격추를 당하게 되어 불시착하게 되었습니다. 뇌에 중상을 입게 되었고 회생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더 이상 아무도 수술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시간에 영국 공군 본부에 민간인 의사 한 사람이 수술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수술은 대성공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수술한 사람은 바로 얼마 전에 비엔나에서 폴란드 조종사가 생명을 걸고 구해주었던 유대인 젊은이였습니다. 

당시 이 젊은이는 이 조종사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가까스로 피신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신문을 보면서 폴란드 비행대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신문에서 폴란드 조종사 한 사람이 회생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 공군 본부에 연락하여 수술을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내었습니다. 

이제 환자가 깨어났습니다. 환자가 눈을 뜨고 있는데 환자 바로 위에서 유대인 의사가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 의사는 감격이 가득 차서 눈에 눈물이 고인 채 폴란드 조종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를 아시겠습니까? 저는 오랫동안 우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내가 지난번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받았던 그 은혜를 누구에게든지 꼭 갚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나는 오늘 아침 당신을 수술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저는 의사입니다. 그것도 뇌신경 전문의사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바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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