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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한계 (히 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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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한계 (히 3:12-19)


여러분들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신 일이 있으실 것입니다. 사진에서, 텔레비전에서, 영화에서 또는 직접 그곳에 가 보신 든 그 폭포를 못 보신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폭포는 대게 산 속에 있습니다. 높은 골짜기를 타고 흐르던 물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폭포가 되여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아가라 폭포는 그렇지 않습니다. 넓고 잔잔한 호수가 폭포의 상류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호수만 보면 폭포가 아래에 있다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아가라의 폭포 상류 호수에서 뱃놀이를 즐기기도 하고 고기를 잡기도 합니다. 

그러나 폭포는 폭포인지라 어느 곳에 이르면 물살이 빨라지고 거칠어집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경고 줄이 세 겹으로 처져 있습니다. 1차 경고 줄이 있는 곳에 오면 노를 저어 다시 호수 쪽으로 올라 갈 수 있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2차 경고 줄이 있는 곳에 오면 좀 위험합니다. 호수 쪽으로 올라가기가 약간 어렵습니다. 3차 경고 줄이 있는 곳에 오면 큰 일 납니다. 그러나 필사적인 노력으로 살아 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3차 경고 줄을 넘게 되면 그 때는 절망입니다. 사람이고 배고 폭포 밑으로 떨어져 죽게 됩니다. 그렇게 해 놓았는데도 안내원의 말로는 일년에 서너 명씩 그곳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경고---- 이것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상징적 교훈을 줍니다.    

사람에게는 일생을 통해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이 말하기를 기회를 놓쳤다고 합니다. 실은 놓친 것이 아니라 기회를 잃은 것입니다. 그 수없이 많은 좋은 기회들을 놓치고 만 것입니다. 그 귀한 가능성, 내 일생에 가장 아름답고 평생을 행복으로 보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자기도 모른 사이에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 놓고 보니 너무 소중한 것을 많이 잃어 후회를 합니다. 아쉬워합니다. 안타까워합니다. 

나이아가라의 한계선처럼 사람에게도 한계선이 있습니다. 그 때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인데 그만 한계선을 넘어 인생 파멸이 되어 버린 갓입니다.

배움의 기회도 그렇고 사업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진실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정직할 그 시간에 정직하지 못하면 거짓말을 하게 되고 한번의 거짓 말이 평생 고통을 줄 수 있습니다. 회개의 기회도 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잃고 영원히 망한 사람이 가롯 유다입니다. 다윗은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까지 죽인 다음에사 회개를 하였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평생을 획하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걸핏하면 ‘몰랐던 일’이라든지 ‘할 수 없어서’라든지, ‘약하기 때문’이라고 자기 잘못을 변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한 사람이 하는 말은 아닙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죄가 있으면 죄가 있다고 솔직히 말하고 벌을 받든 용서를 받던 하는 것이지 자기를 적당하게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을 잃을 때도 그렇습니다. 건강에 장애가 오는 것은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1-2년 동안 건강에 대한 적신호가 있습니다. 그 때 주의하면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지만 그 기회를 놓치면 늘 후회를 하게 됩니다. 의사들은 75%의 질병이 이런 경고가 있는 후에 온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강퍅케 됨을 면하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강팍이라는 말은 경화, 경직된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고민과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민 정부의 시대에 크게 유행하고 있는 유행어가 복지 부동, 복지 안동이라는 말인데 이 말들도 사실 경직된 우리 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나 단체, 사회, 나라들이 모두 한가지로 경직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다 극단화가 유행하여 최근에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들도 극단적인 두 계층 즉 너무 잘 살아서 정신이 없는 사람들과 그들을 증오하는 한 계층의 충돌로 말미암아 생겼다고 분석들을 합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강퍅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클레리노’라는 말인데 여기에는 ‘굳어진다’는 뜻이 있습니다. 굳어지면 결국 깨집니다. 파괴가 되고 터집니다. 그래서 “굳어지지 않도록 조심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굳어진다는 것은 인내의 한계요, 인간성의 한계며, 하나님 자녀 됨의 한계입니다. 선하고 의롭고 사랑하는 것의 한계입니다. 
굳어지기 전까지는 인간미도 있고 사랑도 있고, 이성도 있고, 동정심도 있지만 일단 굳어지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되고 맙니다. 그리고 사단의 종이 되고 죄의 종이 됩니다. 강팍의 반대말은 온유입니다. 겸손입니다. 사랑입니다. 

본문에서는 강퍅함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람이 강퍅하게 되는가를 자세히 말씀하십니다. 바야흐로 우리는 이 강퍅케 되는 무서운 정신적 영적 질병에서 우리 자신과 자녀들과 우리 사회를 지키기 위해 강퍅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특별 처방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그 강퍅케 되는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⑴ 강퍅하다 시작은 의심에서 부터라고 하십니다. 의심과 불신이 강팍하게 되는 시발점입니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동료를 의심하고 부부가 의심하고 형제들이 의심하고, 우리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사람의 마음이 강퍅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이 교만해 집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를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거기다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는 생각까지 가지게 됩니다. 모든 잘못의 원인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고 나는 하등에 잘못한 일이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요지부동이 되어 타협의 여지가 없이 됩니다. 사람을 무시하고 법을 초월하려 하고 자기 우상화에 빠집니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이 진리고 다른 모든 것은 비 진리가 됩니다. 이런 생각에 빠져 극단적인 살인적 행동을 자행하게 됩니다.  바야흐로 구제 불능의 정신적 귀머거리가 되고 소경이 되고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사단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사는 이 사회는 점점 의심이 많아지니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된 사회, 경직된 사회, 그리고 포악한 범죄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는 사회가 되여 버렸습니다.

⑵ 성령을 탄식하게 하면 사람이 강퍅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들을 감동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합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고 선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령님을 탄식하게 하면 사람과 세상이 온통 강퍅케 됩니다. 

성령님을 탄식하게 하는 인간의 죄는 우선 성령님의 감화를 묵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하고 아름다운 의를 무시하고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의지를 배반하고 거스리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악마가 들어붓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게하고 죄를 지으면서 쾌감을 느끼게 합니다. 

⑶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자들이 강퍅해 집니다. 롬 1:24-28 사이에서는 하나님께서 버리신다는 말씀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로 “파레도켄 아우트스”라는 말인데 대단히 강한 표현입니다. 포기를 하시는 데 그냥 포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깨끗이 포기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울은 다윗의 장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을 잡아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 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때는 자기의 그런 모습을 후회하고 한탄합니다. 그리고 다윗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을 죽이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그는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을 잡아죽이려고 합니다. 이런 상태를 버림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그냥 방치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더욱 범죄의 길로 들어서서 결국 저주를 받아 망해 버린다는 말입니다.

⑷ 하나님께서 강퍅하게 인간을 만드십니다. 출 7:3에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죄를 계속해서 짓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강퍅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강퍅하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회개를 하지 않기 때문에 강퍅한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강퍅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강퍅하게 하셨으니 그가 얼마나 강퍅한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그는 바로 목전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죄를 범함 인간에게 벌을 주신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백성들이 쓸어져 죽어 가고, 드디어 자기 아들이 죽어 가도 회개할 줄을 모릅니다. 더욱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이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으며 그가 이제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한 일이 얼마나 나쁜 일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은 악한 짓을 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벌을 받아야 그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 교육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조금 강퍅할 때는 그것쯤이야 하는 일도 많이 강퍅해 져서 벌을 받을 때에는 아차 하게 됩니다. 깨달음입니다.  저 사람이 무슨 죄를 지어 망하는 구나 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하여 본인도 다른 사람도 그 죄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죄악을 키워 벌을 내리시는 일이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죄를 범할 때 느브갓네살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그의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매로 쓰십니다. 바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일이 또 있습니다. 본문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에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죽은 과거란 없습니다. 과거는 늘 현재 속에 살아 있습니다. 오늘은 과거의 역사며 미래의 예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살아 있는 증거로 몸이 아프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고민도 있고 슬픔도 있습니다. 믿음의 갈등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잘 믿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이요 삶의 갈등이 있다는 것은 착하고 선하게 살기 위한 몸부림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강퍅함에 대한 고민이 있음은 온유함의 근심도 있는 것입니다.

“매일 피차 권면하여 강퍅함을 면하라”는 말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 악한 세상에서 강퍅하게 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따뜻하신 권면의 말씀입니다.

죄는 우리들의 심령을 강퍅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고, 죄를 멀리하고, 죄는 모양이라도 버리고, 죄를 가까이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하여 강퍅해 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극단을 피하고 중용을 취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때입니다. 부드러운 쪽으로, 온유한 쪽으로 자꾸 의식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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