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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기쁨으로 충만하십니까? (요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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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쁨으로 충만하십니까? (요 3:22-30)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깨트리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한번 고정된 관념, 인식이란 것은 정말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의식의 틀은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이루는데 엄청난 방해가 됩니다. 사물에 대한 것들도 문제겠습니다만 특별히 사람에 대한 그것이 더 문제입니다.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다.’라는 고착된 관념으로 보기 시작하면 끝없이 그렇게 보게 됩니다. 

어떤 모임이든지 꼭 약속시간을 어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몇 시까지 어디로 모이라고 약속하면 5분 늦게 오는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람이고, 10분 늦는 사람도 꼭 정해진 그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만 오면 다 왔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지요. 또 “교회에서 모여서 함께 출발하겠습니다.”광고 하고 “몇 시 정각까지 오세요.”하면 대부분은 10분전이나 아무리 늦어도 5분 전에는 옵니다. 그런데 꼭 5분 늦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다 한번이라면 실수라고나 하지 다음에 모이면 꼭 그 사람이, 꼭 5분 늦습니다. 희한합니다. 그 사람의 육체가 시계인지 아니면 정신머리가 시곈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그렇습니다. 이건 잘못된 습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고도 모자라서 또 변명합니다. 변명한다는 것은 대체로 그 내용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변명은 진실이 아닌 하나의 위선이요, 허영입니다. “내가 늑장을 부리다가 늦었습니다.”사실대로 인정하며 그만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늦은 사람이 항상 늦고, 그 사람이 항상 똑 같은 변명을 합니다. 그래서 모여서 그럽니다. “아마 그 사람 또 늦을 거다.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이런 변명을 할 거다.” 내기를 하면 십중팔구 맞습니다. 

문제는 교회마다 예배시간에 늦는 사람이 있는데 가만히 보면 5분 늦는 사람은 항상 5분 늦는답니다. 10분 늦는 사람 딱 10분 늦습니다. 시간이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딱 그 시간입니다. 아주 시계입니다. 그리고 꼭 변명이 있습니다. “차가 밀리더라.”,“남편이 꾸물거리더라.” 그게 얼마나 나쁜 체질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변명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넌 원래 그런 사람이야!” 이 보다 더 불행한 말이 또 있겠습니까? 변명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자유 합니까? 변명할만한 거리를 만들지 않으니 불행할 것도 없고 자유하지 못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것이 그렇습니다만 가치관이라는 것도 크게 나누면 둘로 나눌 수가 있는데 하나는 부정적인 가치관이요, 하나는 긍정적인 가치관입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긍정적으로 보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 있고, 꼭 부정적으로 보는 것에서 스스로 불행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부정적으로 기울어지는 잘못된 가치관을 바로 잡아서 긍정적인 가치관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요? 앤드류 매튜스라고 하는 세계적인 일러스트 작가가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지는 방법을 몇 가지 제시했습니다. 

첫째가 칭찬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남이 칭찬 할 때 순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누가 나를 칭찬하면 때로는 “고맙습니다.”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순수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남이 칭찬할 때 그걸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신이 뭔데 나를 칭찬 하냐! 당신이 나를 칭찬할 처지가 되냐!” 고 그 사람을 비판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이거 칭찬이 아니라 날 비웃는 거 아냐! 나를 업신여기는 거 아냐!’ 이렇게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남을 칭찬하라고 했습니다. 

평생에 남을 칭찬 한번 해보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늘 잔소리만 했지 잘한다고, 잘했다고 칭찬이라는 것을 해보지 못했습니다. 가만히 보면 이건 못 고치는 병입니다. ‘칭찬하는 순간 내가 낮아지고 내가 지는 것이다.’ 라는 생각 때문에 평생 칭찬이라고는 해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부정적인 가치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긍정적인 사람이 되려면 이제부터라도 남을 칭찬하십시오.


세 번째는 자신을 좋게 말하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 할 때 자꾸 아픈 소리하지 말라는 겁니다. 물론 괴로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나 괴롭다, 나 어렵다.”하는 것이 그 말을 듣는 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어려운 것은 충분히 나 혼자서 당할 수 있고, 괴로움도 내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것인데도 남에게까지 무거운 짐을 지우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걱정거리가 많아도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화평하고 즐겁게 행복한 얼굴로 나타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는 언제나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요,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존재’ 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길입니다. 이러한 의식들이 점점 쌓이면서 내 성격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자기 자신과 자기 행동을 분리해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위해 힘씁니다만 사업과 나는 별개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업이 망하는 순간 내가 다 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이 망한 것이지 내 존재가 망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대학시험에 떨어질 수도 있고, 붙을 수도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거 떨어졌다고 해서 인생 끝났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희한한데다가 운명을 걸어요. 내 것도 아닌 목숨은 아무데나 그렇게 쉽게 거는 게 아닙니다. 사업은 사업이고 나는 나요, 시험은 시험이고 나는 나 일 뿐입니다. 아니 내가 있어야 사업도 하는 것이고, 내가 있어야 치를 시험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좋게 생각하는 것, 곧 긍정적이고, 밝게 보고, 밝게 생각하고, 밝게 받아들일 줄 아는 인격이 행복을 만드는 올바른 가치관이라는 이런 말이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무슨 일에든지 웃으며 기뻐 할 수 있는 사람, 무슨 일이든지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사람이 진정 긍정적인 사람이요, 그것이 행복 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노만 커즌]이라는 사람이 <병의 분석>이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웃을 수 있어야 하고, 웃을 수 있을 때에 질병도 고쳐진다.”고 했습니다. 기쁨이 건강의 유일한 비결이라고 말할 정도로 기쁨의 감정, 즐거움의 감정으로 살아갈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이 모든 것보다 아주 더 높은 차원의 성경적 행복의 지름길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신앙적인 즐거움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 튼튼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 비결에 대해서 오늘 성경을 보면 요한이 말합니다. 

29절에 보면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고 말합니다. 그는 이 기쁨으로 모든 것을 소화합니다. 자, 요한의 마음속에 있었던 절대적인 기쁨이라는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먼저는 요한에게 그 기쁨은 질투가 없는 마음에서 왔습니다. 
구약성경 잠언 14:30절에 보면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질투하는 마음은 사람을 썩게 합니다. 질투라는 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짐작이 갑니다. 

자 이제 세례요한을 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준 사람이 요한입니다. 세례를 받은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또 세례를 베푸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기분이 나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여주는 요한의 모습이 정말 특별합니다. 요한은 이 일을 하늘에서 주신바라고 받아들입니다. 시기하거나 질투할 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분이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려고 어느 교회를 찾아갔는데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그 교회에 있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래도 아는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반갑던지 좋았는데 그 친구는 이미 그 교회에 장로님이 되어 있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학교 다닐 때는 찌질 해서 자기 책가방이나 들어 주고 했던 친군데 교회에 와보니까 소위 자기보다 더 출세해 있거든요. 자기 생각에 출세라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자존심이 상하고 질투가 나서 그 교회를 못 다니겠다고 나와 버렸답니다. 이 사람 정말 못난 사람입니다. 

특히 여자들은 더 그렇습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혹은 자기보다 믿음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권사가 되어있다는 것에 질투를 해서 따라주지도 않고, 대접도 해주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요한에게서 배워야합니다. 이건 다 하늘이 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직분은 하늘이 냅니다. 특별히 항존 직분은 분명히 하늘이 내리는 것임을 알고 따라야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질서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마음이 질투를 이깁니다.

그리고 요한의 기쁨은 함께 하는 기쁨입니다. 
참 좋은 말 중에 “아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요한은 29절에서 내 친구가 장가가서 신랑이 되면 정말 기뻐하는 것처럼 곁에 있는 친구로서 똑 같은 기쁨을 느낀다는 말로 함께하는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남이 잘 되면 축하해주고 좋은 일이 생기면 내 일처럼 여겨서 같이 즐거워 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이 잘 되면 배 아파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쳐야 하는 부분이 이것이거든요.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요한의 이 기쁨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하나 요한의 기쁨은 겸손함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오늘 세례요한의 그 마음을 “쇠하여지는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30절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신비한 기쁨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물러나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물러나면서 기뻐한다? 쉬운 일입니까? 물론 오늘 세례요한처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자기의 사명을 다하고 이제 예수님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는 상황입니다. 우리 같으면“내가 없이 어디 잘 되나 보자! 네가 얼마나 잘하나 보자!” 는 식의 마음이 들 수도 있거든요. 이건 정말 좁은 생각입니다. 은퇴할 때 기뻐할 수 있어야 되고, 물러서서 행복을 빌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러서서 욕이나 하고, 물러나서 저주나 하고 있다면 이건 정말 불쌍한 인생입니다. 이러지는 말아야 됩니다. 오늘 요한의 마음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이대로 여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속에 있는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그 기쁨으로 충만해도 진정 후회하지 않을 기쁨입니까? 오늘 세례요한의 고백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고백 속에 담긴 기쁨의 비밀을 여러분들도 다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 속에 감사와 감격이 있고 이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해성교회 성도님들은 올 한 해 다 같이 잘 되는 그런 해가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만 잘된다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다 같이 잘 되어서 하나님께는 큰 영광이 되고 성도님들 가정에는 기쁨이 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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