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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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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눅 19:1-10)


'헨리의 이야기'(Regarding Henry)라는 영화에 보면, 주인공인 헨리는 미국 뉴욕 시의 유명한 로펌에 있는 유능한 변호사이지만 인간적으로는 너무나 냉철해서 법정에서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항상 찬바람이 느껴지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영화는 의료사고로 남편을 잃게 된 매튜 부인이 병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헨리가 병원 측의 변호를 맡아서 결국 승소를 안겨 주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억울하게 패소한 매튜 부인은 원망스러운 눈길로 헨리를 바라봅니다.
  
그런 후 어느 날 저녁에 헨리는 담배를 사러 동네의 작은 가게에 들렀다가 강도를 만나서 머리에 총상을 입게 됩니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자기 이름을 비롯하여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는, 거의 식물인간 비슷한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후에 아내의 지극한 보살핌과 재활치료를 통하여 말하는 법부터 시작하여 글을 읽고 쓰는 법, 그리고 걸음걸이 등 하나하나를 마치 갓난아이처럼 새로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헨리는 사고가 나기 이전의 자기라는 존재가 얼마나 이기적인 냉혈한이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그 '과거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혐오까지 하게 됩니다.
결국 헨리는 이전처럼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돌아가지는 못하지만 그 대신에 선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바뀌면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헨리는 옛날 매튜 부인이 자기 때문에 억울하게 패소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가 항소심에서 승소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를 자기 로펌의 사무실에서 몰래 꺼내어서 그녀에게 갖다 줍니다.
매튜 부인은 이전에 자기를 법정에서 그처럼 매몰차게 몰아붙이던 그 냉혹한 변호사가 이제는 마치 천사처럼 사람이 바뀐 것을 보고 너무나 놀라서 처음에는 아예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같은 헨리'라는 사람이 그처럼 '과거와 정반대의 헨리'라는 사람으로 바뀐다는 것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하지 실제로는 거의 비현실적입니다.
또 혹 그처럼 모든 과거를 다 상실하고 새로 인생을 시작하는 과정에서라면 가망성이 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극적인 동기가 없이 어떤 '나쁜 사람'을 '착한 사람'으로 하루아침에 바꾼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훌륭한 재활치료사라도 전혀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정말이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하지만 이 일에 있어서 그야말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의원'이 한 분 있는데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성격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중생' 즉 '거듭난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실로 신기하고 놀라운 인격과 능력의 소유자이신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삭개오라는 대표적인 '구제불능의 인간'을 어떻게 '전혀 딴판의 새 사람'으로 바꾸어 버리셨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도 '잃어버렸던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구원받은 양자'로 변화시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인간 사회에서 최하의 '저질'이라고 멸시당하는 자까지도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1절부터 7절에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 유명한 사건은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들러' "지나가시던"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삭개오"란 '순수하다, 의롭다'는 뜻의 이름이지만 실제로 그는 그런 좋은 이름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자기 밑에 다른 세금징수원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는 세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어떤 지역의 세리를 '경쟁 입찰' 형식으로 임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리고 성'에 세리를 임명한다면, 각 세리 지원자들은 자기가 여리고 성의 세리가 되면 얼마만큼의 세금을 로마 정부에 내겠다고 그 액수를 적어내었습니다.
그러면 로마 정부는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액수로 입찰한 사람을 여리고 성의 세리로 임명해 주면서 동시에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두는 '세율'을 정할 수 있는 권리까지 부여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리는 자기가 로마 정부에 약속한 납세액을 채울 뿐 아니라 자신의 '충분한 수수료'까지 남길 수 있을 만큼 높은 세율을 자기 마음대로 정해서 세금을 징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 평민들이 볼 때에 세리란 자기 민족을 압제하는 로마제국에게 빌붙어서 동족의 고혈을 빨아먹고 사는 '최악의 매국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여리고는 예루살렘과 그 동쪽 인접 지역을 연결하는 교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자기 관할 구역 안에서는 문자 그대로 '독점 기업'처럼 마음대로 돈을 벌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세리인데, 더욱이 삭개오는 그런 '물 좋은 지역'의 '세리장'이었으니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부자"라도 정말 엄청난 부자였을 것입니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특별히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저 전 유대와 갈릴리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유명인사'가 자기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한 번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서 도저히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방향으로 미리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갔던" 것이었습니다.
이것 역시 삭개오가 '열성적으로, 간절히'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삭개오는 온 동네사람들로부터 미움과 멸시를 받고 있던 '왕따'였습니다.
그러니 그가 "내가 키가 작아서 잘 볼 수 없으니 좀 길을 터주시오."라고 부탁한다고 해서 여리고 사람들이 그에게 앞자리를 양보해 줄 리가 만무했습니다.
물론 삭개오 역시 그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그는 아예 동네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뽕나무 위로 올라갔는데 물론 그런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을 부끄러워할 체면이 있는 위인도 아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삭개오로서는 정말 꿈에도 기대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기 앞을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갑자기 그를 올려다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하겠다'라고 번역된 말은 영어의 'must'에 해당되는 단어이므로 다시 말하자면 "내가 삭개오 네 집에 꼭 가서 밥을 먹고 잠을 자야만 하겠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은 곧 '가장 친밀한 교제'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그때까지 여리고에 살면서 자기에게 함께 밥 먹자고 말해 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이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그 여리고의 "뭇 사람"이 "수군거리면서"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예수님께서 하고 있다고 비난한 것을 보아서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만나는 이 예수님이라는 분이 여리고에서 아예 '공식 죄인'으로 통하는 자기에게 그런 기상천외의 호의를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로서는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겠습니까?
아마 삭개오는 자기 등 뒤로 수많은 여리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봐라, 너희들은 나를 죄인이라고 멸시하지만 지금 이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자청해서 내 집에 오겠다고 하지 않느냐?'라고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유명인사로 통하는 예수님을 여리고 성의 내로라하는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대기업 회장' 같은 쟁쟁한 지역유지들을 다 제치고서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으니 정말 절로 어깨춤이 덩실거릴 정도로 '즐거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역시 예수님께서 '택자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아주시는 방법입니다.
사람은 멸시받아야 할 사람을 당연히 멸시합니다.
사람은 따돌리고 싶은 사람을 반드시 따돌립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기 싫은 사람은 절대로 상종하려 하지 않고 아예 만나지도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 우리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를 비롯해서 '창녀'와 '로마군인' 등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다 혐오하는 사람들까지도 기꺼이 먼저 다가가 주셨습니다.
만나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듣게 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고 그들과 가까이 사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하고 피하고 멸시하는 '최악의 저질' '인간 말종'이라고 불리는 자들까지도 '사람 취급'을 해 주시고 '인간 대접'을 해 주시는, 한없이 넓고 깊고 따뜻하기 짝이 없는 실로 놀라운 성품의 소유자이신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처럼 이렇게 '죄인'을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는 사람을 달리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돈 많이 벌어오지 못하는 남편을 향해 아내는 "으이그, 이것도 남편이라고."라고 구박합니다.
공부 못하는 학생을 두고 선생은 "너 이렇게 맨날 꼴찌만 하다가 나중에 도대체 뭐가 될래?"라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듯이 핀잔을 줍니다.
어쩌다 한 번 잘못을 저질러서 실형을 받고 소위 '빨간 줄'이 그이게 되면 평생 사회로부터 멸시당하고 지인들조차 기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누가 보아도 '욕을 먹어 싼 죄인'을 향하여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가까이 다가와 주시고 당신의 품에 안아 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있어서 삭개오는, 그리고 저와 여러분은 그냥 '죄인'이 아니라 단지 '잃어버린 죄인'이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우리를 '반드시 만나서' "다시 찾아 구원하러" 오신 "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성인군자라는 사람도 결코 보여 주지 못했던 이 놀랍고도 신기한 인격의 소유자 예수님께서 오늘도 '삭개오야'라고 우리의 '이름'을 친근히 부르시며 '내가 너와 만나고 사귀어 주겠다.'고 먼저 찾아와 주시는 이 '고소원불감청'의 초청을 '즉시' 그리고 '즐거움'으로 '영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진짜 최하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8절 이하 10절에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본문에 "삭개오가 서서"라고 했는데, 원래 유대인들은 특히 잔치 자리에서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금 삭개오가 그 잔치석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혼자 일어서서 예수님께 어떤 '중대선언'을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토색"이란 '남을 속여 먹은 것' 혹은 '강탈한 것'이란 뜻입니다.
사실상 '세율을 가지고 사기치고' '조폭들을 동원해서 빼앗는' 것이야말로 지금까지 삭개오가 초지일관 애용해 왔던 '부정축재의 수단'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만일"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내가 혹시 그런 일이 있었다면'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토색했던 모든 경우들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또한 레위기 6장 5절이나 민수기 5장 7절 등의 율법에 의하면 그런 경우에는 원래의 액수에 "오분지 일"만 더해서 돌려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것을 아예 "사 배"로 갚겠다고 공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삭개오로서는 '공개적 회개'인 동시에 '양심적 서약'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사건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의 사람들은 물론이요 삭개오 자신도 자기 입에서 그런 기상천외한 말이 나올 것이라고는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한마디로 '돈만 아는 철면피'였습니다.
미국의 어떤 유명한 기업인이 "당신을 'S.O.B.'라고 부르거든 웃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낸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내용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그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욕먹을 행동까지도 서슴지 않는 경우가 있었고 그것을 별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가히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랬던 삭개오가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하고 자기가 사기 쳐서 강탈했던 사람들에게 '4배'로 갚아 주겠다는 약속을 예수님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했습니다.
평생을 '남의 것을 빼앗으면서' 살아 왔던 그의 입에서 '내 것을 남에게 주겠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늘이 두 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삭개오에게는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 지금 실제로 벌어졌던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기적이 삭개오의 인생에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까?
왜냐하면 그는 난생 처음으로 정말 놀랍고도 신기한 사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여리고 사람들이 '똥을 피하듯이' 멀리하는 자기에게 오히려 먼저 접근해 주시고 친근히 말을 걸어 주셨습니다.
또 그처럼 고명하신 '랍비'께서 일부러 자청해서 자기 집에까지 오셨으면 자기 같은 '세리'에게 뭔가 '훈계' 한마디쯤 하실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그저 자기와 함께 즐겁게 식사를 나누실 뿐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보고 있던 삭개오는 갑자기 자기 속 깊은 곳으로부터 아주 이상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죄'라는 자각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삭개오의 마음에서는 '내 삶이 부끄럽다.'는 따위의 생각은 단 한 번도, 털끝만큼도 떠올랐던 적이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동포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압제 하에 시달리고 있던 시대에 그 로마정부의 '졸개'가 되어 동족을 괴롭히는 일을 자처하고 나선 사람이었습니다.
옛날 일제 시절에 같은 조선 사람이면서도 일본순사가 되어서 동족을 체포하고 구금하고 고문했던 '조선인 순사'와 똑같은 통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로마정부의 비호 아래에서 자기 마음대로 엄청나게 높은 '세율'을 정해 놓고 그 세금을 한푼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이려고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미납한 세금 때문에 그에게 울며 통사정을 해도 삭개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기 부하 세리들을 동원해서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길바닥으로 쫓아내고 모든 가산을 강제차압했을 것이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삭개오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눈곱만큼이라도' 부끄럽게 여긴 적이 있었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그는 그저 '너희들은 내 등 뒤에서 욕이나 하고 내 무덤에나 침을 뱉어라.'고 비웃으면서, 동족의 고혈을 빨아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안면에 철판을 깔고' 살던, 정말이지 '양심도 심장도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대하게 되자 갑자기 그 모든 지난날의 자기 인생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면서 '진정한 회개에 따라오게 되는 합당한 열매'까지도 서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식사 도중에 삭개오를 불러 세워 놓고서 "삭개오야, 내가 기왕에 네 집에까지 왔으니 한마디 해 주어야겠다. 너도 이제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네 인생을 한번 좀 곰곰이 돌이켜 봐라. 너 평생 이 모양 이 꼴로 살다가 죽을래?"라고 따끔하게 꾸짖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삭개오에게 먼저 가까이 다가와 주시고 그가 지금까지 평생토록 다른 사람에게서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무한한 인애와 자비를 베풀어 주셨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예수님의 주도적이고도 사랑 충만한 접근과 교제가 삭개오를 완전한 새사람으로 한순간에 바꾸어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삭개오 본성'을 다 얼마만큼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은 절대로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행위를 두고 '죄'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는 본성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남이 잘못하는 것을 정죄하는 데에는 다들 천부적인 '바리새인'이지만,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변명하고 핑계를 대고 합리화까지 시키는 데에 그야말로 '타고난 천재'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혹 남이 자기를 지적하거나 비판하거나 충고하면 오히려 더 발끈하고 성을 내면서 그 상대방의 잘못을 더 크게 들추어내면서 비난할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의 '철판 얼굴'을 녹여 버리시고 부끄러움으로 빨개지게 만드시는 아주 신기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와 아무 상관도 없으신' 100퍼센트 순결하신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지극히 거룩, 거룩,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그 '희디 흰 하나님의 무흠하신 순결성' 앞에서 자신의 '더럽고 추악한 부정함'을 절로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만이 그런 감동적이요 기적적인 회심을 사람의 양심 속에서 일으키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이런 예수님 앞에 절로 '겸손히 서게' 되는 순간이 곧 우리 각자에게 "구원이 이르는" 순간이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의 죄가 부끄러워지고 그 예수님 앞에서 진심으로 자복하고 회개하는 바로 그때가 곧 우리도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 즉 이전에 '잃어버린 탕자'였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까지 오심으로써 이제는 '찾게 된 택자'임이 확인되는, 지극히 행복한 순간인 것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앞의 18장에 보면 삭개오와 대조되는 또 한 명의 '부자'인 "어떤 관원"이 나옵니다.
그는 '돈만 알던' 삭개오와는 달리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차원 높은 질문도 할 줄 알았고, '토색'을 비롯하여 온갖 죄를 일삼던 삭개오와는 정반대로 율법의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다 지킨" 모범 주일학생 출신이었습니다.
즉 객관적인 '스펙'만 본다면 삭개오보다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훨씬 더 잘 갖추어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관원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라고 일러 주신 것, 즉 "와서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며"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삭개오나 그 관원이나 둘 다 똑같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더 어려운 부자'인데도 전자는 구원을 얻고 후자는 낙오하고 말았습니까?
왜냐하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에만 있기 때문입니다(눅 18:26-27).
즉 죄인 구원에 대한 주도권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 주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선포해 주시는 구세주께만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저도 어릴 적에 주일학교에서는 '삭개오가 키 작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뽕나무 위로 올라갈 정도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열심을 내었다.'고 자주 배웠던 것이 기억납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삭개오 사이의 '접촉'(contact)은 결코 삭개오의 열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순전히 예수님 편에서 그처럼 여리고 성의 최고 '왕따' 인생이었던 그를 부르시고 만나 주심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삭개오가 '재산의 반을 기부하고 토색했던 것을 사 배로 갚는' 선행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구원'이 그에게 이르게 되었던 것도 결코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당연히 지탄받고 정죄당하고 벌 받아야 마땅했던 삭개오의 '죄'를 먼저 용서해 주심으로써 그 한없는 사랑에 대한 감격이 삭개오를 그처럼 '180도로 바뀐 새사람'으로 변화시켰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자이신 당신께서 이 땅에까지 오신 목적 자체가 이처럼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아 구원해 주시기' 위함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풀어 주신 '최대의 사랑'이요 '무한한 은혜'요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스스로 '짐승과 버러지 형상으로 격하시키고 있던 저질 인생'에 불과했던 우리를 '당신의 친구'로 영접해 주시고 '하나님의 양자'로 격상시켜 주시는 주님, '마땅히 진노 받아야 할 죄인'이면서도 오히려 '목이 곧고 마음이 강퍅했던' 우리를 '순결하신 어린양' 앞에서 절로 자복하며 회개하게 만들어 주시는 이 놀라우신 예수님을 '즐거이' 영접함으로써 자신의 금세와 내세에 '구원이 이르는'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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