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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뒤늦은 깨달음 (대하 33:10-17,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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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깨달음 (대하 33:10-17, 21-25)


본문은 유다 왕 므낫세와 그의 아들 아몬에 관한 기록입니다. 므낫세는 히스기야의 아들로 열두 살 때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두 왕국 이스라엘과 유다의 그 어느 왕의 통치기간보다 긴 오십오 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므낫세의 통치기간은 가장 길었을 뿐 아니라 또한 역사상 최악의 기간이었습니다. 온갖 이방숭배가 그 절정에 달했던 시기입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행한 종교개혁을 다시 다 뒤집어놓고 말았습니다. 

본문 2-7절을 그냥 읽기만 해도 그의 악행이 어떠했는지를 알고도 남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바알들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모든 일월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영원히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에 제단들을 쌓고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그의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점치며 사술과 요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여호와를 진노하게 하였으며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을 하나님의 전에 세웠더라.” 

9절로 뛰어넘어가서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모든 나라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합니다. 이와 병행절인 왕하21:16에서는 “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합니다. 

므낫세는 그저 우상숭배를 좋아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했을 뿐 아니라 포악하고 무자비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피가 넘쳐흐를 때까지 많은 백성을 죽이고 유다의 의인들을 모두 살해했을 뿐 아니라 특히 숱한 선지자들의 목숨을 빼앗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일치된 전승에 따르면 므낫세가 예언자 이사야를 톱으로 켜서 몸을 두 쪽 내어 죽이게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며 예루살렘과 유다에 내릴 재앙을 경고하셨지만 그들이 듣지 않았습니다(본문 10절, 왕하21:10-1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을 보내어 그를 치게 하셨고 그들은 므낫세를 사로잡아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본문 11절). 

앗수르로 끌고 가지 않고 바벨론으로 끌고 간 것은 그 당시 아직 앗수르보다 약했던 바벨론이 앗수르에 맞서 대항했다가 앗수르에 의해 분쇄되고 말았는데 므낫세가 바벨론과 내통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앗수르가 아닌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므낫세 때의 앗수르 왕은 에살핫돈과 아슈르바니팔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런 표현이 없지만 다른 여러 번역성경에는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므낫세를 사로잡아 “코에 고리를 꿰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에살핫돈 왕의 치적을 나타내주는 고고학 발굴물 중에 그가 두 명의 포로를 결박한 장면을 보여주는 부조가 있습니다. 거기서 포로를 묶은 끈은 포로의 코에 있는 고리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치욕적이고 고통스럽기 이를 데 없을 비참한 광경입니다. 므낫세는 온갖 우상숭배로 하나님을 지극히 욕되게 하며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린 대가를 톡톡히 치룬 것입니다. 

므낫세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며 짐승과 같은 모양으로 비참하게 바벨론으로 끌려가서야 비로소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해졌으며 그에게 간구했습니다(본문 12절). 하나님께서는 간구하는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신 것입니다. 므낫세는 그제서야 하나님을 온전히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본문 13절). 

므낫세는 성을 쌓고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에 군대 지휘관을 배치하는 등 국방을 튼튼히 했습니다(본문 14절).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증거입니다. 그는 이방 신들과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우상을 제거하고 우상들을 위해 사방에 쌓았던 모든 제단들을 다 철거해 버렸습니다(본문 15절). 그는 하나님의 제단을 보수하고 화목제와 감사제를 그 제단 위에 드리며 유다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섬기게 했습니다(본문 16-17절). 

므낫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아몬이 나이가 이십이 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이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본문 21절). 아몬은 그의 아버지 므낫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그의 아버지가 만든 아로새긴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여 섬겼습니다(본문 22절). 그의 아버지 므낫세는 비록 늦되긴 했지만 자기의 죄와 과오를 깨닫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졌는데 아몬은 그렇지 못하고 더욱 죄를 범했습니다(본문 23절). 그러다 이 년 만에 그를 반역한 신하에 의해 궁중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본문 24절). 그러자 이번에는 백성이 아몬을 반역한 자들을 다 죽이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습니다(본문 25절).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반복된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의 두 왕 므낫세의 긴 역사와 그의 아들 아몬의 짧은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는 히스기야 같은 비교적 훌륭한 아버지에게서 므낫세 같은 아주 못된 아들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부모의 좋은 신앙이 자동적으로 자녀에게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사실 앞에서 우리의 자녀가 바른 신앙을 갖고 올곧게 살게 하기 위해서는 그저 하나님께 쉬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밖에 없다는 단순한 결론을 내리게 하는 일입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줍니다. 자녀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지 않으면 부모 자신이 아무리 훌륭해도 자녀가 잘못되기 쉬운데 하물며 부모가 잘못하면 자녀가 잘 될리는 더더욱 없는 일입니다. 므낫세에게서 난 아몬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므낫세는 나중에 깨닫고 회개를 하기라도 했지만 아몬은 그저 더욱 죄를 범할 따름이었습니다. 

둘째는 므낫세는 유다 왕국의 역대 최악의 왕이었지만 모진 고난을 당하자 회개하고 돌이켰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그 어떤 사람도 돌이킬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런 판단은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따른 의와 지혜의 심판을 하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므낫세가 아무리 극악무도한 왕이었지만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용서 못하실 죄인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너무 많은 죄를 져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용서받을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했음을 깨닫는 그 순간이 곧 기회이며,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므낫세를 개인적으로는 용서하셨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시려는 뜻은 돌이키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므낫세는 유다의 마지막 왕은 아니었고 그의 뒤에 여섯 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또 그들 중 그의 손자 요시야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통해 나라를 바로 세우려 한 선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집트의 바로 느고에 맞서 싸우다가 활을 맞고 죽자 남왕국의 유다는 급속히 멸망을 향해 기울기 시작했습니다(대하35:20-24). 

그런데 이 모든 원인은 므낫세에게 있었다고 열왕기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왕하21:10-15, 24:1-4). 왕하23:25-27을 봅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이 사실은 때를 놓친 깨달음이 불러오는 막대한 피해를 우리로 하여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므낫세의 뒤늦은 회개가 그 개인의 용서는 받게 해주었지만 그의 오랜 악행은 이미 많은 희생을 낳았고 나라와 민족이 멸망으로 나아가는 길을 돌이키지는 못했음을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높일 방안을 찾기 위해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남녀 천 명을 대상으로 작년 3월에 전화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지난 금요일 아침 우리 교회 신관에서 모인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회에서 한 발제자가 소개했습니다. 그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합니다. 응답자 중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사람은 18.4%에 불과한 반면 불신한다는 사람은 48.3%였다는 것입니다. 또 기독교(개신교)인들의 말과 행동에 믿음이 간다고 응답한 사람은 14%인 반면 그렇지 않다고 답한 사람은 50.8%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천주교와 불교와 개신교에 대한 신뢰도조사에서는 35.2%가 로마천주교를 신뢰한다고 답했고, 31.3%가 불교를 신뢰한다고 답했으며, 개신교를 신뢰한다는 답은 18%에 그쳤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개신교라고 답한 이들 중에도 14.1%가 개신교보다 로마천주교를 더 신뢰한다고 답했습니다. 이에 반해 로마천주교신자들은 1.1%만이 개신교를 신뢰한다고 답했습니다. 종교별 호감도에서도 불교가 31.5%로 가장 높고 로마천주교가 29.8%로 그 다음이며 개신교는 20.6%입니다. 

암흑기에 있던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었고 정신적 지도력의 산실이었던 개신교가 어쩌다 이런 위치로 추락하고 말았는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러다가 개신교는 이 땅에서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더 지체하지 않고 돌아서야 합니다. 큰 교회마다 탐욕과 비리와 싸움으로 시끄럽다고 연일 언론은 보도하고 있고 인터넷 상의 반기독교 세력들은 때 만났다는 듯 교회에 돌팔매를 퍼붓고 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을 탓하려 하지 말고 우리가 먼저 각성하고 빨리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모든 탐욕을 버리고 조그마한 비리조차도 철저히 발본색원하며 일체의 싸움을 그치는 결단이 한국교회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교회로 하여금 사회와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하게 만들었는지를 냉철히 돌이켜보며 무엇부터 고쳐야 할지를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뒤늦은 깨달음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손실을 교회에 안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우리에게 바르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뼈아프게 돌을 던지면 하나님께서 세상이 우리를 향해 불끈 쥐고 있는 손에서 모든 돌을 버리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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