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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순례자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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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순례자 (히 11:13-16)

 
내 용 히브리 성경 중에서 이 11장은 조금 독특한 성격이 나타납니다. 성경 중에 나타난 아주 믿음이 위대한 인물들을 말하고 오늘 우리들에게 그러한 사람들의 믿음을 따라서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 ‘롤모델(role model)’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바라볼 수 있는 것’, ‘본보기’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11장은 신앙생활, 믿음의 롤모델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을 보아라.” 여기 13절 처음의 시작이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바로 “이 믿음의 롤모델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런 사람들이 나오는데 “그들 모두 나름대로의 특별한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롤모델들이다. 이 사람들을 본받아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에서도 롤모델이 있습니다. ‘에이브러험 링컨’, ‘조지 워싱턴’하면 미국 정치인의 롤모델입니다. “그 사람들과 같이 하라.” 또,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은 우리 한국 지도자들의 롤모델이 됩니다. “이 사람들과 같이 하라.” 그리고, 기업에도 J.C. 페니(Penney),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는 모두 미국 기업인의 롤모델이 됩니다. 교회도 바라볼 수 있는 롤모델 교회가 있습니다. “저 교회를 바라보며 그렇게 하라.” 

오늘 말씀은 하나님 백성됨의 삶도 바로 그런 바라볼 수 있는 본보기를 바라보면서 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신앙의 사람들은 이 히브리서에 어떤 믿음을 가졌나? 그리고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가? 여기에 아주 간단하게 나옵니다. 이 사람들의 특성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는 삶으로 살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언약의 백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약속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 때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잖아요?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는 먹어라.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이렇게 하면 네가 살리라. 이 약속을 어기는 날에는 네가 죽으리라.” 

인류는 하나님의 약속과 더불어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됩니다. 노아에게 언약하십니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방주를 예비하고 그곳으로 들어가라. 들어가는 자만 살 것이다.” 약속을 주십니다. 아브라함 때 와서는 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표시로 나타내십니다.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니라.” 종교적 표시를 함으로 언약의 백성됨을 표현했습니다. 점점 발전해서 모세 때 와서는 하나님의 언약은 문서화되어집니다. 하나님이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 주셨습니다. 문서화되었습니다. 그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백성들 간에 혈맹적 의미로 굳어집니다.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에 예수님이 약속을 이렇게 하십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약속을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하고 또 기억하자고 해서 만든 것이 바로 언약궤입니다. 성막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봄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행하는 유대 민족의 역사를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이렇게 약속을 주십니다. 또, 28장에 가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같은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나는 너를 지킬 것이며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룰 때까지 나는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약속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언약을 세웁니다.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무슨 증거가 있는가? 성경에 나타난 다른 사람과의 모든 약속을 내가 믿을 때 그 약속이 곧 내 약속이 됩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약속으로 남기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을 주셨습니다. 성경 전체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이란 그 약속을 믿는 것인데 롤모델 신앙인들이 그렇게 믿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백성은 ‘순례자’로 살게 하십니다. 길을 떠나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에 이렇게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나그네 같이 살아라.” 롤모델 신앙인들이 나그네 같이 살았단 말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을 떠날 결심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함이라.”는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고향에 있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출가하겠다.” 그래서 집을 떠나서 공동체 삶을 만드십니다. 

우리 성경에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 책이 성경의 제일 처음을 장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길고도 긴 그 전체 내용이 다 집을 떠나서 이동하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끝이 납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그래서 나그네가 되어서 살 곳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으로 인류의 삶은 시작되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과 가족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이민 역사가 12장에서 25장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이라크 땅이요 가나안은 지중해입니다. 요셉과 야곱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이동해서 거기서 400년 이상을 살게 됩니다. 그 기록이 창세기 50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출애굽기에 와서는 애굽에서 그곳 문화에 젖어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가 고향인줄 아는 유대 민족에게 하나님이 “아니다. 너희가 살 곳은 여기가 아니다.” 

가나안 땅으로 민족 이동을 시키는 긴 이동의 역사가 출애굽기 1장에서 신명기 마지막 28장까지 대 이동의 역사 기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서의 기록은 계속됩니다. 앗시리아에 가서, 혹은 바벨로니아에 가서 민족 대 이동으로 살며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게 성경입니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수만 명의 예수 믿는 사람이 생겼을 때에 ‘디아스포라’가 이루어집니다. 흩어집니다. 그래서 베드로 성경에 보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로 만듭니다. ‘나그네’란 고향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이 움직일 때는 그들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각기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을 준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너무나 반가워서 길을 떠났습니다. “가라는 대로 가겠습니다.” 야곱은 가정불화로 인해서 형인 에서를 피하여 도망을 가게 된 사건이고, 요셉은 형들의 시기로 장사꾼에게 팔려서 인신매매를 당해 애굽으로 집을 떠났고, 야곱의 가족들은 기근 때문에 식량을 찾아 애굽을 찾아 가게 되었으며, 다니엘은 전쟁의 희생자로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모세와 히브리 백성은 자유를 찾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서 대이동에 나섰습니다. 에스더는 아기 때 부모 때문에 파사국에 가서 살게 되었고,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의 박해 때문에 온 세상으로 고향을 떠나 디아스포라 되었습니다. 이처럼 모두 이유가 합당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배후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부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인류 구원 역사를 위해서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디아스포라, 나그네로 살게 하신다는 것이 오늘 이 성경말씀이 주는 교훈입니다. 

인류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온 세상에 흩어 놓으심으로 이루어 가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계획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시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이라는 곳이 나의 영원한 안식처라는 안정감을 갖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영원히 살 곳은 이곳이 아니다.” 그래서 세상에 너무 많이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도록, 어디를 가나 외국인과 나그네 같이, 집시처럼 살고, 철새처럼 떠돌아다니며, 방랑인으로 만들면서 하늘나라를 목표하게끔 하시는 것입니다. 

본래 이 ‘순례자’라는 말은 ‘거룩한 목적을 지닌 여행자’라는 말입니다. 만약 사도요한을 ‘밧모섬’으로 보내지 않았다면 ‘요한계시록’이 생겼겠습니까? 바울을 방랑자로 만들지 않았다면 바울서신이 나왔겠습니까? 모세를 애굽의 궁정에 그냥 두었다면 모세 오경이라는 성경이 주어졌겠습니까?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계속 살았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가 물려주는 우상 장사나 하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가지 않았다면 엄마 곁에서 팥죽이나 쑤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유대 소녀 하나가 아람 군대의 침략으로 인해 노예로 끌려 다른 나라로 갑니다. “이 소녀를 우리 집에 데려다가 심부름시키자.” 그래서 이 힘없는 소녀는 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의 집의 하녀로 잡혀 와서 심부름을 하며 살게 됩니다. 기구한 운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 소녀는 자기 주인 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에게 엘리사를 소개합니다. “우리나라에 가시면 엘리사라는 하나님의 종이 있습니다. 그 분을 불러오시면 당신의 그 고칠 수 없는 모든 질병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뭐라고?” “내 말이 틀리는지 한번 해보십시오.” 그래서 그 후로 그 나라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처음으로 빛을 발하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소녀는 잡혀갔지만 하나님께서 나그네가 된 소녀 하나를 통해서 한 나라의 구원의 빛을 비춰지게 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에 여행 왔다가 그날 마침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올라가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로마 군인이 징발법에 의해서 “너 잠깐 이리 와.” 외국사람 같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잠시나마 예수님이 지고 가는 십자가를 몸에 걸쳤던 것이 구레네로 돌아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의 두 아들은 초대교회의 위대한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여행 중에 에티오피아 내시는 간다게 여왕의 심부름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서 빌립을 만나서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고 에티오피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최초의 자국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길을 떠난 나그네, 순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 생애를 돌아보면서 객관성 있게 자기 생애를 돌아보는 말을 형들 앞에서 했지 않습니까? 그는 열일곱 살 때 일부다처제 가정불화의 희생물이 되어 배다른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남의 집 종살이를 했습니다. 또, 행실이 좋지 않은 주인집 마님의 억울한 누명에 휩싸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인생의 고난스러운 과정도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 하나 때문에 다 견디었습니다. 나중에는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 형들이 식량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들이 만났을 때 요셉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형들이 나 죽이려고 했지? 구덩이에 집어넣었다가 돈이 필요하니까 끄집어내서 나를 장사꾼에게 팔아먹었지? 그래서 나는 그로부터 지금까지 17살에 팔려 와서 30세가 넘도록 외롭고 슬픈 고난의 연속의 삶을 살았다.”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습니까? “이 놈들을 모두 끌어다 죽여라.” 그러면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우리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의 섭리론에서 자기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형들을 불러다가 다 잘 살게 만들어줍니다. “형들이 나를 팔아먹고 팔려왔지만 배후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나그네가 되고 온 세계 예수님의 복음은 집을 떠난 선교사들에 의해 전해졌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 히브리 성경은 지금 우리에게 “너희도 이 세상에 너무 마음을 두지 말고 나그네로 살라.” 나그네는 언제나 돌아갈 생각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 다음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지만, 이 땅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면도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나에게 많이 주시므로 이루는 사람이 있고 주시지 않으므로 이루는 구원이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모세는 가나안 땅 즉,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데 최고의 공로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 땅에 들어가서 하룻밤도 자보지 못하고 누구도 알 수 없는 산모퉁이에서 외로이 숨을 거두고 맙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번제단에 올려놓은 순종까지 했는데도 그의 생애 마지막 결산을 성경에서 보면 자기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무덤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헷 족속에게 가서 은 400세겔을 주고 구입한 묘지 하나가 그의 모든 소유였습니다. 지나치게 세상 것에다 축복 개념을 두고 믿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축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으며 아브라함도 모세도 보라. 그렇게 살지 않았느냐?”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저는 지난 주중에 특별한 손님 한 분을 맞이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의 한국대사 투비아 이스라엘리(Tuvia Israeli)께서 갈보리교회에 방문하셔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사실 유대인 유대교 신자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이 개신교의 목사 사무실을 찾아오는 것은 힘든 일이며, 안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셨습니다. 제가 너무 반갑고 고맙게 생각되어 피차의 관심사를 아주 긴 시간에 이야기하며 점심식사도 나가서 함께 하면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서로 대화하는 중에 몇 가지 질문하고 답변할 때 제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작은 나라인데 어떻게 그렇게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까? 당신은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 아닙니까? 말씀해보십시오.” 그분이 저에게 대답을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당신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한국의 개신교 목사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 이스라엘 나라 역사 선생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날마다 설교하고, 연도까지 외우면서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 민족입니다. 

We are pilgrim. 우리는 순례자, 방랑자, 집시입니다. 그래서 강해졌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We have to survive. 살아남아야 되기 때문에 강해진 것입니다. 우리 역사를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으면서…. 구약의 모든 이야기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불쌍한 민족입니다. 우리는 집시이고 나그네입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한 가지 좋은 철학 중의 하나는 “Melting pot Philosophy ”입니다. 

우리나라는 “Melting pot”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여기 냄비가 하나 있습니다. 이 냄비에 모든 각종 음식물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두부라든가, 콩, 파, 마늘, 호박, 된장, 간장, 쇠고기, 생선 등을 다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면 독특한 자기 성격들이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을 가해서 뜨겁게 만들어서 다 뭉개버리는 겁니다. 하나의 성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Melting pot Philosophy”입니다. 이스라엘도, 미국도 “Melting pot” 국가들입니다. 그래서 미국도 이름이 무엇입니까? “United States Of America”입니다. 합중국입니다. 

한국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 아프리카 사람, 중남미사람이 다 와서 그 냄비 속에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을 데워서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약 1,500년 이상 나라 없이 다 흩어져 살았지 않습니까? 1948년에 이스라엘 정부가 새로 만들어져서 그때부터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프랑스에 살던 사람들은 거기에서 태어나 거기에서 평생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조국이 있다는 말만 들었지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자기는 프랑스 사람과 똑같습니다. 소련이 붕괴될 때에 소련에 살고 있는 유대인 100만 명이 자기 조국을 찾아갔습니다. 그 사람들은 소련에서 태어나 소련에서 평생 살았기 때문에 소련 밖에 모릅니다. 음식도 문화도 뭐든지 다 소련입니다. 온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독특한 자기 색깔을 가지고 이 냄비 속에 들어온 것인데 다 다릅니다. 그래서 국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열을 가해서 녹여서 지금 하나의 유대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이가 60이 넘었어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무조건 초등학교 1학년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말을 배워야 합니다. “이 작업이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돈이 많이 들고 얼마나 고난스러운지 아십니까? 지나간 2천년 동안 우리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 말을 저한테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Melting pot” 국가들은 아주 잘됩니다. 튼튼합니다. 왜냐? “우리가 각기 모였기 때문에 뭉치지 않으면 죽는다. 우리는 서로 싸우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념을 향해서 우리는 함께 뭉쳐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각기 다른 배경에서 만났지만 서로 융화되면서 강한 국가를 이루었고 미국도 이민자들이 가서 각기 만났는데 “Melting pot Philosophy”에 의해서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참 이상한 현상이 다문화, 다민족 국가는 잘 되어 잘 뭉칩니다. 

그런데 단일 민족은 또 반대로 갈라지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틈만 있으면 갈라내지 않습니까? 지역적으로 갈라내고 이념적으로 갈라내고 요즘에는 보수, 진보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좌파, 우파의 기준이 뭡니까? 말 한마디 했다고 좌파이고, 말 한마디 했다고 우파이고…. 어떡해서든지 갈라내려고 합니다. 철학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다문화 국가로 변해가는 것을 아주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융화되어서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강한 나라를 이루어야 하는데 우리 단일이기 때문에 날마다 갈라지고 싶어 하고 이미 갈라졌던 사람은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세상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뭐냐? 똑같습니다. “Melting pot”입니다. 

여러분이 다 각기 다른 배경과 성격을 가지고 교회라는 이 냄비 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유교 신자이고 우리 할머니는 불교 신자이고 우리 조상을 보니까 무당이었고….” 별 역사를 다 가지고 있는데 여기 들어와서 성령의 불을 피워서 녹여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 하나가 된 공동체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가고 있는데 그게 뭐냐? 

오늘 마지막 말씀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다고 하는 이 큰 인생의 목표 하나를 정하고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서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머무를 장소는 절대로 이 땅이 아니다. 본향을 사모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면서 달려가는 것이다.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 

우리가 살 곳은 여기가 아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돌아가야 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많이 흩어졌고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이 정착한 그 땅을 본향 그림자로 생각하면서 모여들었다 헤어졌다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에 영원히 우리가 머물 장소인 저 본향을 생각하면서 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에 융화된 성령의 역사를 우리가 하나로 움직이면서 우리 모두 순례의 행진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히브리서가 주는 이 고귀한 성도됨의 본질을 잘 기억하고 ‘나는 이 땅에 어떤 의미로 지금 살고 있는가?’ ‘어디를 향해서 내가 지금 가고 있는가?’ ‘교회라고 하는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거룩하게 깨닫고, 또 기억하면서 아버지가 주신 우리에게 남아있는 생을 순례자로 행진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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