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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됩시다 (고전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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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됩시다 (고전 1:10)


(고전 1:1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한 아버지가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큰 소리의 주인공은 친구와 놀고 있는 자신의 딸이었습니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점점 더 열기를 더하더니 논쟁으로 번졌습니다. 마침내 아버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창문을 열고“그만해라, 애야. 무슨 일이니?”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딸은“아빠, 우리는 그저 교회 놀이를 하고 있었을 뿐이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보통 아이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엄마, 아빠가 흔히 하는 행동을 따라하면서 노는 행동을 엄마, 아빠 놀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이 이야기의 아이들은 교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동들을 따라하며 교회 놀이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느새 교회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내며 논쟁하는 일은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조금도 양보를 모르고 서로의 목소리를 높이느라 그 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도 알지 못한 채 서로에게 달려들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상대방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뒤에서는 몇몇이 모여 상대를 욕하고 비방하느라 정신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그곳이 교회가 되어버렸다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너무 심할 경우는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교회의 모습을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사람에게 속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길 원하십니다

(고전 1:12)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고전 1:13)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학창시절, 한 반에서 삼총사, 공주파 등의 이름을 지어 자기 마음에 맞는 친구들끼리 몰려다닌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창시절 반의 모든 학생과 친하게 지내며 같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기에 괜찮아 보이고 마음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친구들끼리만 자주 만나고 친하게 지내기도 합니다.

학창 시절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보통 저 사람은 가까이 지내면 나에게 좋겠다 싶은 사람, 직장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인기가 좋은 사람 등등 내가 친해지면 내게 이익이 되겠다 싶은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지어 전자의 편에 서려 하기도 합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속하면서, 나와 같은 생각으로 그 사람에게 모여든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의 또 다른 그룹을 형성해 나갑니다.

이러한 세상살이에 익숙한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도 이러한 생활을 계속하려 드는 경향이 많다고 합니다.
교회의 사람들을 쭉 살펴보면서, 자신과 어울리기에 괜찮은 사람 같다 싶은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지어 자기 기준에 좋아 보이는 사람 편에 붙어 그 사람에게 속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주축으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역시 이러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만한 사람을 내세워 하나의 공동체 안에 또 다른 공동체를 형성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렇게 자신에게 힘을 실어 줄 사람으로 어떤 이는 아볼로를, 어떤 사람은 게바를, 또 어떤 사람은 바울을 택하였습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며 자신을 그 사람에게 속한 존재로 보고, 그 사람의 존경과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취해서 사람들 앞에 자신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세력을 만들고 교회에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며 자신과 다른 세력을 비방하고 적대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에게 힘이 되고 나를 높여 줄 것 같은 사람을 찾아 그 사람에게 속하길 원했던 고린도 교인의 모습, 즉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아볼로 파, 게바 파, 바울 파, 그리스도 파로 나뉘어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들에게 분쟁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복음의 참된 의미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사람을 중심으로 당파를 지어 분쟁하였던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인 각자의 개체성을 말살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개개인의 개성에 따라 역사하시며, 이는 생활의 다양한 형태들에 대한 근거가 됩니다. 따라서 이 다양성은 무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오한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합당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택하실 때,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그 특징대로 부르신 경우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다양한 색상의 조화가 필요하듯이 하나님께서는 교회 앞에 진리의 많은 양상을 제시하기 위하여 개인의 다양성을 사용하시며,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풍요롭게 하고, 협소하고 단편적이 되는 것을 방지하십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의 다른 학파와 분파의 용도입니다.

그러나 이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그리스도 몸 안에서 해로운 분열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바울이 반대하는 분당 정신과 교회의 특별한 다양성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분파가 참된 교회의 근본 진리를 부정하지 않고 다른 지체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추구하는 신앙 노선이나 치리나 예배의 형식에 있어서 가장 성경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호감을 갖고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안에서 있었던 분쟁이나 당파는 언제나 교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않거나 복음 전파를 위한 것이 중심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은 기독교의 분열의 원인이 되며 교회의 거침돌이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행위이며, 분쟁과 시기심을 일으킵니다. 이는 보다 작은 선을 위하여, 혹은 이기적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보다 크고 절대적인 선을 해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우리는 다양성을 추구함과 아울러 통일성과 일치를 함께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분파를 금해야 할 이유는 교회의 머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13)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은 나뉜 경우가 없다는 역설적 표현입니다. 즉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나뉨이 없는데,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나뉘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의 지체들은 맡은 바 기능이 각각 다르고 다른 것에 대하여 그것이 몸 안에서 가지는 합당한 지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지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지체들은 동일한 머리를 가지는 동일한 몸에 속합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의 머리와 하나의 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모든 언행은 교회의 몸을 나누는 행위인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전 1:13)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이 말씀은 '바울 덕택으로 너희가 구속을 받았느냐'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면 너희가 어찌하여 내 이름을 부르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분파심은 분파의 이름을 그리스도의 이름보다 더 높이며, 따라서 종을 주인의 자리에다 앉히는 우를 범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부당한 우월성을 부여하며, 결국 그것은 우상 숭배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죄 없이 죽으신 그리스도의 이름이 무시되어서는 안 되며, 그 이름 이외에는 어떤 것도 그가 택하시고 속량하신 교회에 붙여져서는 안 됩니다.
   
세례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13)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세례는 죄 씻음에 대한 표징이며, 베풀어진 이름에 대한 충성의 서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의식을 행하는 사람은 비록 그가 사도일지라도 그 경우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소수의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러므로 그의 이름이 불려질 구실을 주지 않은 데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였습니다. 우리 또 한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에 참여합니다.

따라서 세례는 분파심과 대치됩니다. 여기서의 세례는 성례전과 함께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요, 증거와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에 참여한 자는 분파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엡 4:5)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엡 4:6)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시니  우리도 하나이어야 합니다.

독일 베벤하우젠 근처의 오래된 수도원에 가면 서로 엉켜 있는 두 개의 사슴뿔이 전시되어 있다합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그럴 때 원장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한다합니다. "이 뿔은 여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입니다. 두 개의 뿔이 엉켜 있다는 것은 두 마리의 사슴이 서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상대방의 뿔 속에 자신의 뿔을 쑤셔 넣음으로써 그만 떨어질 수가 없게 되었고 버둥대다가 끝내 둘 다 굶어 죽게 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분파심은 다툼을 일이키고 다툼의 결말은 함께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사람에게 속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내세우는 공동체가 되길 원하십니다.
(고전 1: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한 사람을 택하여 그 사람에게 속하면서 겉으로는 그 사람을 높이는 듯 보이나, 속으로는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고 자신을 높이기 원하는 고린도 교인의 모습을 던져 버리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가 내세우며 우리가 자랑하길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지금 내가 속한 그 사람이 영원한 나의 힘이 되고, 나의 자랑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진짜 나의 힘이 되고 진짜 나의 자랑이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값없이 이미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받은 자가 미련하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붙잡으려고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진짜 보물을 손에 쥐고 왜 다른 것을 내밀면서 거기서 안정을 느끼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자를 죄인에서 의인 삼아 주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십자가가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만을 자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면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그것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높아집니다. 내가 의인이 되었다고 만방에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내가 높아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보고 십자가를 자랑하라고 하십니다. 

어느 학교에 언제나 한 녀석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알고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하여 설득해 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마침내 선생님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자를 들어 그 개구쟁이의 손바닥을 때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소란을 피우는 이 불한당에게 자를 들어 때리려던 순간,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이번엔 다르게 해보자. 이 개구쟁이에게 내 손바닥을 때리게 해 보자.' 그러자 놀랍게도 이 개구쟁이는 자기 손바닥에 호된 일격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선생님은 단 한 번도 그로 인해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합니다. 

이 세상에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가 나를 위해 고통 당하셨도다." 하고 말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예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우리 대신 아픔을 당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를 구원하십니다.(스벤 S. 올라프슨)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내세우는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는 공동체가 되길 원하십니다

(고전 1:1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하나님께서는 공동체의 일부만이 사람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한 마음, 같은 뜻, 이러한 마음이 모두의 마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공동체 전부가 사람에게 속하려는 자신의 모습을 던져 버리고 자신의 진짜 능력이 되시는 십자가의 도만을 선포하는 모두가 되길 원하십니다.

공동체 안에 누군가가 파벌을 형성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를 비판만 하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도 이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사람이 아닌 십자가만을 의지하며 그것을 자랑하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으로 우리가 서길 하나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러한 삶을 살길 간절히 원하십니다.
몹시 목이 마른 개미가 연못에 와서 목을 축이려고 하다가 그만 잘못해서 물에 빠졌습니다. 그냥 두면 분명히 물 속에 가라앉아 죽을 것입니다. 그때 마침 연못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던 비둘기가 나뭇잎을 하나 연못에 떨어뜨려 주었습니다. 개미는 비둘기가 떨어뜨려 준 나뭇잎 위로 기어올라 무사히 땅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사냥꾼이 비둘기를 잡으려고 덫을 놓았습니다. 이를 본 개미는 얼른 그 사냥꾼의 발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냥꾼의 비명을 들은 비둘기는 놀라 달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수많은 선교사를 보내시고, 그들이 피를 흘려 죽게 하시면서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나 많은 교회를 세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교회를 세우셨고, 반드시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분이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서로 자신을 드러내며 다투라고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 예수 그리스도만을 선포하며, 이 땅에 그분을 드러내라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뜻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교회로 나아가길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원하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은사의 다양성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건강과 온전한 것을 세우는 데 다양한 은사를 사용하라고 권합니다(12:4-7).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분쟁을 극복하고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라고 호소합니다. 고린도 교회의“교제”(1:9)는 경쟁적인 상태와 몸의 장애를 가져다주는 역경을 해결한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구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1:12).

그들의 구호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 구호를 가진 고린도 교회에는 분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회심시키고 자신에게 세례를 준 사람들을 숭배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한 명 혹은 두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어떤 성도들은 바울을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로 주장했지만 바울은 바울파를 조성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은 그리스도의 종이며 하나님의 신비의 조달자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과 아가페의 사랑에 가치를 두게 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한 외딴 마을의 시냇가에는 아주 오래된 물레방앗간이 있었습니다. 십 년 전부터 이 물레방앗간은 강력한 수차의 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농사일이 돈벌이가 되지 못하고 게다가 자신들이 재배한 것보다 더 싼값에 밀가루 완제품을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농부들은 밭을 더 이상 경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물레방앗간은 새로운 용도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즉 곡식을 빻는 대신에 거대한 발전기를 돌리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 발전기는 마을 전체 이 백 세대가 필요한 전기를 공급하게 되었습니다.  저녁때 해가 지고 사람들이 전기 스위치를 켜면 시냇가에 있는 옛 물레방앗간으로부터 전류가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물레방아 바퀴의 각 부분, 즉 양쪽에 달린 수레바퀴의 겉 둘레와 수레바퀴 안에 달린 많은 물받이 판 그리고 바퀴 중앙에 있는 바퀴통과 바퀴의 많은 살들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화기애애한 대화가 아니라 불평인 뒤섞인 대화였습니다. 양쪽의 수레바퀴 중에 한 바퀴가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거꾸로 돌고 있어. 나는 아침부터 뒤로 움직였단 말야." 그러자 나머지 한 쪽의 바퀴가 말했습니다. "아냐, 그렇지 않아. 우리는 옆으로 돌아야만 한단 말야." 바로 그때 물받이 판이 한탄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받이 판은 오른쪽을 쳐다보고자 했으나 물받이 판만은 왼쪽을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 있던 바퀴 살들마저 불평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수차이고 싶지 않아. 풍차가 되고 싶단 말야." 이와 같이 불평의 소리가 커지자 사람들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너희들 각자는 지금 위치에 만족해야 해!" 그러나 싸움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시냇물도 무서울 정도의 소리를 내며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오래된 물레방아는 큰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그 각각의 부분은 저마다의 제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러자 발전기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고 멈춰버렸으며 전류는 중단되었고 모든 집들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사람에게 속하지 않는 공동체가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내세우는 공동체가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는 공동체가 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며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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