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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러분은 이 땅의 외국인 임시 체류자!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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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 땅의 외국인 임시 체류자! (히 11:13-16)
 
 
1. 외국인 거주자

<1박2일>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때문에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최근 정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내 外國人 居住者의 수가 100만을 넘었다’고 합니다. 100만이라는 숫자는 우리나라 인구를 생각한다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100만 명이란 우리나라 인구를 약 5천만 명으로 보았을 때, 우리나라 사람 50명 당 한 명이 외국인이라는 수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여러분들은 ‘그래도 외국인이 그렇게 많게 여겨지지 않는데?’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겉으로 크게 표시가 나지 않는 中國 國籍人이 56%, 東南 亞細亞人들이 21%, 日本人이 4%로서, 전체 81%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東南 亞細亞係의 88%가 여성이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결혼 이주 여성으로 사회 활동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100만 명이라는 수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 그렇게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지요.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이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결혼이나 귀화로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그들은 결코 한국인이 아닙니다. 그들의 血統, 文化, 宗敎 등을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들은 언제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면 자기 고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생각할 때, 그와 함께 여러분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2. 이 땅을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성도

1) 믿음의 책 히브리서

히브리서 저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서서, 그 어떤 유혹과 박해 앞에서도 인내하면서 그것과 맞서 싸울 것, 그리고 주님의 복음을 끝까지 붙들고,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그 복음을 전파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을 받는 히브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同族인 유대인들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핍박을 당하고 있었고, 또 로마 정부로부터도 대대적인 박해를 받음으로서 신앙을 포기해야 하는 위기에 있었습니다. ‘예수 믿어봐야 별 수 없더라. 더 좋아지기는커녕 더 힘들고 괴로워지기만 하지 않았느냐? 유대인들의 團結力이 더 낫고, 수 천 년 동안 그것이 깨어지지 않고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유대교가 기독교보다 더 낫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世界 最强國의 지도자인 네로 황제와 로마가 예수보다 더 힘이 세지 않는가?’ 이런 생각들로 그들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형편에 있던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증명하면서, 그 구체적인 예로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신앙의 핵심인 ‘천사’, ‘모세’, ‘대제사장’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즉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위대함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➀ 그러면 그가 말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천사처럼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이면서도 인간이 되사 죽음을 맛보신 영원한 구속주이십니다(1,2장). 예수님은 지도력과 충성에 있어서 대단히 탁월한 모세보다 훨씬 더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론의 반열이 아닌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그 어떤 대제사장보다 우월하신 분입니다(5:1-10:18). 

➁ 그렇다면 이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은 어떤 것입니까? 천사보다 우월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어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을,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분이 되신 것이죠. 모세가 백성들의 인도자로서 충성을 다한 것 이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에서 최고의 충성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의 구속과 공중권세 잡은 자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 인도되어져 그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영원한 천국의 기업과 무한한 땅의 복을 누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통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란 그 대상인 예수님이 누군지를 바로 알고 믿는 것’임을 주장했습니다. 즉 히브리서가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시며, 그가 어떤 일을 하셨으며, 그가 일하신 결과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바로 알고 그 앎에 확고히 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의 히브리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에서 10장 18절까지는 교리적인 내용을, 그리고 10장 19절 이하는 실제적인 생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0장 마지막에서 선지자 하박국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38). 이 말은 앞부분의 교리와 연결하여 그 교리를 믿는 사람들의 실제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단히 탁월한 序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히브리서 11장은 히브리서 전반부가 말한 교리를 그대로 믿고 산 사람들의 기록이라는 것이죠. 

2) 믿음의 사람들

이러한 11장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어집니다. 1절부터 3절은 믿음에 관한 일반적인 정의를 내리고, 둘째 부분인 4절부터 40절은 그러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사람들이 아무리 박해하고 세상의 권력이 힘으로 짓누를지라도 그것을 끝까지 버티고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악형을 받되 구차히 피하려 들지 않았으며, 돌에 맞고, 톱으로 켜이고, 시험과, 칼에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나 잘 이겨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살 데가 없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살기도 했습니다(히11:36-38). 이렇게 11장이 열거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견딜 수 없는 삶의 고난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믿음의 영웅들을 설명하면서 오늘 본문은 그들의 또 다른 한 가지 삶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믿음의 영웅들의 삶의 특징은 그들이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➀ “외국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세노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낯설은, 외국의’ 혹은 ‘낯선 사람, 외국인’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믿음의 선진들과 당시 성도들이 스스로를 외국인으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당시 사회에서 외국인이 어떻게 여겨졌는지 아십니까? 한 성경 사전은 당시 외국인들에 대한 헬라 사회의 시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헬라 사회에서 낯선 사람이나 외국인은 적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낯선 나그네들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고, 죽임을 당하거나 내쫓기었다.” 

➁ 또한 그들은 자신들을 “나그네”로 여겼습니다. “나그네”는 말은 헬라어로 ‘파레피데모스’라고 하는데, 당시 ‘타국에서 다른 백성인 원주민과 함께 사는 사람’, 즉 외국인 거주자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니까 “나그네”란 단순히 여행자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혈통으로서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이 자기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 잠시 머물고 있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벧전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하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나 베드로가 동일하게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외국인의 신분으로 잠시 거주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과 히브리서 당시 성도들은 스스로를 “외국인”으로 여겨 아무리 자신이 유대인으로 유대 사회 안에서 살든지, 헬라인으로서 헬라 사회 안에 살든지, 혹은 로마인으로서 로마 제국 안에 살든지, 자신들은 거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고국에서 동포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외국에 잠시 체류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을 적으로 여겨 온갖 핍박을 가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죠. 

➂ 그래서 오늘 본문은 성도를 “본향 찾는 자”,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는 사람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14~16). 여기서 본향이란 “파트리스”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파테르’, 즉 ‘아버지’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따라서 “본향”이란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는 곳, 그곳이 성도의 본향이고, 성도는 그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하늘 본향을 향한 사모의 마음은 성도로 하여금 이 땅의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게 합니다. 

3)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

그러면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윌리엄 바클레이는 그의 『히브리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외국인은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다. 사회적으로는 노예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외국인들은 外人稅를 지불해야 했고, 공공기관이 정해주는 특정한 장소에 거주했다.” 그리고 “나그네는 유숙자이며 지금 있는 땅에는 집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바클레이는 다음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지 못하면 하늘의 본향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 이 땅에서 하늘의 본향만을 향하여 사는 자는 당연히 이 땅에서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된다. 비참하기가 그지없고 노예 같은 형편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이 말은 성도가 이 땅에서 가난하게, 비참하게, 괴로움과 고통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러한 말들은 성도들은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확실하게 알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이중 국적 소지자였습니다. 그 시대에 얻은 로마 시민권은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들이 온갖 고생 끝에 얻은 미국 시민권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한 것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도,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었던 로마 시민권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자랑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혹은 로마인으로서 이 땅에 살고 있었지만 자신의 최종 시민권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던 나그네 정신이 바울에게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이 땅의 생을 마감하고 하늘나라에 입국할 준비를 하고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역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 천국 시민권자는 이 땅의 화려함에 미련을 두거나 인간적인 성공을 자랑거리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오로지 땅의 일만 생각합니다. 재산, 권력, 명예 등을 위해 삽니다. 
‘오늘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일은 무엇일까?’ 
‘오늘 얻은 것으로 어떻게 내일을 즐기며 편안함을 누릴까?’ 
‘내가 얻은 것들을 어떻게 계속 움켜쥐면서 살아갈까?’ 

이번에 느낀 것인데요. 우리 지역이 생각보다는 춥습니다. 지난 두 주간을 지낸 대전 지역이 사실은 여기보다 더 추운 곳입니다만, 그런데도 제게 창원이 더 춥게 여겨지는 이유는 두 주간 동안 제가 너무 따뜻하게 지냈기 때문입니다. 밤에는 유성 온천의 軍 소속 호텔에서 땀 흘리면서 지내고, 낮에는 차로 이동하여 히터가 빵빵한 학교 강의실에서만 지냈기 때문에 추운 줄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지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겨울이어서 기온이 내려가서 추운 것이 아니다. 

돈이 없어서, 따뜻하게 만들지 못해서, 따뜻하게 입지 못해서 추운 것이다.’ 그런데요, 여러분! 그렇게 한 겨울에도 온천수가 쏟아져 나오는 호텔에서 땀을 흘리면서 잠을 자고, 정부 청사와 카이스트와 여러 대학들이 즐비한 지역의 유명 음식점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제 마음에는 빨리 창원으로, 집으로 오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거기가 제 집이 아니고 고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나그네의 마음 아닐까요? 자신이 잠시 머무는 곳이 아무리 5성 호텔이나 6성 호텔, 심지어 7성 호텔이라 해도 거기에 영원히 머물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경치가 아름답고 공기가 맑은 휴양지라고 해도 때가 되면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본향이 아무리 40도 50도를 오르내리는 곳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온 몸을 천으로 둘둘 감싸고 다니는 이슬람 여인이라 할지라도 거기가 내 본향이고 그렇게 사는 것이 내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이 더 좋습니다.

세계 오지 여행가에서 한국 기독교가 만든 세계적인 구호단체인 <월드비전>에서 일하게 된 한비야 씨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구호활동을 하던 한비야 씨가 ‘미리암’이라는 소녀와 서로 옷을 바꿔입고 시장을 가 보기로 했습니다. 한비야 씨는 모자가 달린 원피스로서 눈만 내놓고 온 몸을 감싸고 다니는 이슬람 여인들의 ‘부르카’를 입었습니다. 

그랬더니 다 벗고 살아도 더워죽을 지경인 그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부르카는 사람을 삶아 죽이는 찜통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그와 달리 어릴 때부터 부르카를 입고 살았던 미리암은 부르카를 벗고 스카프로 머리만 가린 채 시장을 봤는데도, 가볍고 시원하고 편하기만 할 것 같았는데, 정작 본인은 도무지 불편하여 견딜 수 없었다면서 ‘다시는 부르카를 벗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불편을 벗고 편하고 즐거워도 내 것이 아니면 그것은 결코 편하지도 안전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 특히 외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곳이 좋아도 그 생활습관이나 음식이나 문화 등에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1년 혹은 몇 년에 해당하는 비자를 받아 공부를 하거나 일하는 사람들 역시 임시 체류자들입니다. 제한된 기간이 다 차고 체류 목적을 이루었으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설사 영주권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시민권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그 나라의 국민이 아니라 외국인입니다.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 몇 개월 방문 스탬프를 받고 입국한 사람들은 방문자 혹은 여행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나라가 아무리 안전하고 환경이 좋다 해도 입국 비자를 받아 임시로 체류하는 외국인이나 잠시 거쳐가는 방문객들에게는 낯선 타향일 수밖에 없으며, 자신이 나고 자란 고국이 그리워지고, 언젠가 부모 형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나그네 의식입니다. 

타향에서 사는 나그네는 임시 거처에 머물기 때문에 평생 살 것처럼 꾸미고 살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기본적으로 생활할 비품들만 갖추고 임시로 살다가 떠나는 것이 나그네 생활이지요. 한 주간 혹은 그 이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여행 가방에 필요한 것만 싸서 가지, 이삿짐을 꾸려서 가지는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정한 기간 동안 이 땅에 머물다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이, 여기가 여러분이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본향은 하늘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을 향한 외국인이자 나그네로 부끄럽지 않게 사시기 바랍니다.

중고등학생 때 중창이나 합창으로 많이 불렀던 김두완 작사 작곡의 “본향을 향하네”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환란의 궂은 비바람 모질게 불어도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이 세상 지나는 동안 괴로움이 심하나 
그 괴롬 인하여 천국 보이고
이 세상 지나는 동안 괴로움이 심히 심하나
늘 항상 못 부르나 은혜로 이끄시네

생명 강 맑은 물가에 백합화 피고 
흰옷을 입은 천사 찬송가 부를 때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쓰겠네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고
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본향을 향하네

요즘도 이 찬송을 자주 불러야 합니다. 이 찬송을 통해 성도가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천국 본향에서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써야 할 것을 사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잠시 체류하는 곳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말씀을 맺겠습니다. 외국인은 자기 나라를 떠나 남의 나라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나그네는 정착할 수 없는 떠돌이를 말합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합니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 그들은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장막에 거주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에 居住하면서도 장막에 살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들이 거하는 그곳이 영원히 살 곳이 아니라 또 다른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역시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면서 지금 살아가는 이 땅은 잠시 거쳐 지나가는 곳에 불과하며, 언젠가 본향으로 돌아 갈 사람들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모든 짐을 내려놓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먼저 간 성도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본향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대해서, 그리고 땅의 것에 대해서 너무 욕심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설교 시작에 말씀드린 외국인 근로자들처럼 이 땅에 온 목적을 이루어 고향으로 돌아갈 사람임을 잊지 않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나그네입니까? 

혹시 이 세상을 임시 처소가 아니라 영원한 본향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보따리 싸놓고 사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이러한 나그네 의식으로 살 때, 성도의 영성은 건강해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이 땅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과 결혼 이주 여성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면서 잘 섬기면서 삽시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나누면서 삽시다. 고향 갈 때 다 버려두고 갈 것인데 악착같이 쥐고 있으려는 어리석음이 여러분에게는 없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을 의지하고 자랑하기보다 하늘의 것을 기대하고 사모하는 바르고 건강한 나그네의 영성을 가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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