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온유한 사람 (마 5:1-5)

첨부 1


온유한 사람 (마 5:1-5)  

 
한국을 사랑하는 미국인 선교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오랜 세월동안 한국에서 사역하면서 한국의 분단현실을 가슴아파했습니다. 
자연히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했겠지요. 
어느 날 주님께서 한국의 영적현실을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가 본 그림은, 북한은 황무한 땅인 반면 남한은 썩어서 먹지 못할 열매였다는 것입니다. 
그 환상이 맞아서인지 지금 북한은 기근으로 200만 명 이상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수년전 북한에서 귀순한 사람에게 남한 생활에 대한 호감을 물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북한은 미쳐있고, 남한은 썩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썩은 사회를 고치는 소금되는 삶, 어둠 속에서 분탕질치는 사회에서 빛 되는 삶의 윤리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대답이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산상수훈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 설교를 통해서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구나!’라는 정도로 알고 끝낼 것이 아니라 이 산상수훈을 삶의 이정표로 삼아 ‘이 말씀대로 살아보리라.’고 하는 결단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썩은 강물에 흘려보내는 한줄기 샘물이 될 것이고, 칠흑처럼 어두운 바다에 깜박거리는 작은 등대의 불빛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한줄기 샘물, 이 작은 불빛이 모이고 또 모이면 그것들이 이 사회와 민족을 회생시키는 큰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통일의 기운이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은 산상수훈 설교 세 번째 시간으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 
주님은 ‘온유하게 살아야 한다. 온유하게 살기만 하면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누리게 된다.’고 대답해주십니다. 
이것 또한 이 세상의 상식과는 반대가 되는 교훈입니다. 

‘힘이 세고, 강한 자라야 뭔가 차지할 수 있는 것이지, 유순한 사람이 어떻게.......’ 
징기스칸을 봐라, 나폴레옹을 봐라, 그리고 미국을 봐라, 힘이 있어야 큰소리를 치고 뭔가를 차지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만일 하나님이 안계시거나 돌아가셨다면 모르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게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자연계를 봐도 이 말은 사실입니다. 
동물의 세계에는 양육강식,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자연계에는 강한 동물이 많습니까? 아니면 약한 동물이 많습니까? 
상식적으로 보면 강한 동물이 약한 동물을 잡아먹으니까 강한 동물이 많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강한 동물은 점점 멸종되어져가고 유순한 동물, 토끼, 사슴, 양과 같은, 그냥 부스럭 소리만 나도 도망가기에 바쁜 동물들은 점점 많아집니다. 
이 자연세계는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씀이 진리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온유하다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온유하다.’와 ‘나약하다.’는 다른 것입니다. 
나약하다는 것은 힘이 약한 것이고, 온유하다는 것은 본능과 감정이 잘 조절되어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훈련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온유하다는 성품에서 가장 중요한 인격적 특징은 ‘감정조절’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화를 낼 줄 안다. 그러나 정당한 대상을 향하여, 정당한 정도로, 정당한 때에, 정당한 목적으로, 정당한 방법으로,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화가 나지만 힘이 약하기 때문에 꼬리를 슬그머니 내리는 것은 나약한 것이지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화가 나지만, 불쾌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만, 그 본능과 감정을 잘 조절하여 정당한 대상, 정당한 정도, 정당한 때, 정당한 목적, 정당한 방법으로 그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런 본능과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 모릅니다. 
잠 16:32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바울사도께서는 갈 5:22절의 성령의 열매 중에서 ‘온유와 절제’라는 덕목을 지적했습니다.

2. 어떤 상황에서 성경은 ‘온유하다.’ 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조사해보았습니다.

이런 방법도 성경을 이해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 다른 사람의 비방을 받고 참을 때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민수기 12장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가 구스 여자를 그의 아내로 선택했습니다. 
구스란 에티오피아라는 나라로, 검은색 피부를 가진 민족이지요! 
이 일에 대하여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 비방의 내용이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아마 이런 말로 비방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에 여자가 없어서 그렇게 검은 여자를 집안에 들였느냐? 지도자로서 체통을 좀 지켜라.” 
이렇게 비난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겉으로는 피부색을 들먹거렸는지 모르지만 그 내막은 시기심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즉 미리암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공동체의 여성 지도자로서 독보적인 존재였는데 자신의 위치를 도전할 수 있는 한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미리암은 견제심리와 시기심으로 모세를 비방했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하여 모세는 온유함으로 그 모든 비방을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한마디 대꾸도 없었습니다. 
민 12: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하나는 모세가 성질을 부리고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두를 때에는 그 위세에 눌려 모든 사람이 다 복종할 줄 알았지만 실상은 한 사람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출 2장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모세가 폭력을 휘둘러 애굽사람 한 사람을 때려 눕혀 모래 속에 파묻었습니다. 

그 다음 날 이스라엘 사람 두 사람이 서로 싸우기에 “같은 민족끼리 싸우면 어떻게 합니까?”하고 말렸더니 그 두 사람은 다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네가 뭔데 나서느냐? 네가 뭔데 재판관 노릇이야?”
보세요! 
성질을 부리고,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두를 때는 한 사람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온유했을 때 모든 백성이 그를 얕보고, 그의 권위에 도전했을 것 같은데 전 민족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온유함과 지도력은 비례합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지도력이 필요하다면 온유하십시오!

두 번째 받는 교훈은, 미리암의 비방에 대하여 모세가 온유하게 받아들이니까 하나님께서 간섭하셨다는 것입니다. 
민 12:9-10절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여기 보세요!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진노하셨지요! 
아마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생각하셨는지 모릅니다. 
“미리암, 너 검은색을 무시하고, 희색 좋다고 하는데 한번 희게 되어 보아라.” 
그 순간 미리암의 얼굴에 문둥병이 들려 희다 못해 눈과 같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비방에 대하여 온유함으로 대하니까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마음에 두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비방을 받을 때 온유하길 축원하길 바랍니다.

2) 성경에 보면, 억울한 환경에 처하여 참고 견뎠을 때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사실 모세처럼 근거 있는 비방에도 참기 어렵지만, 아무런 근거 없는 비방을 받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때 억울하다고 하지요? 
주님께서는 이럴 때 ‘온유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란 말씀은, 예수님께서 시편 37:11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 37편은 다윗의 시로서 그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읊은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다윗이 겪은 억울한 일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
그러나 다윗을 해코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을 중상모략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런 사람은 망해야 되는데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있어요! 
이때 다윗이 인간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반응은 불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는 없어!”라고. 
그러나 다윗은 온유하리라고 다짐합니다. 

‘불평하지 말자! 투기하지 말자! 여호와를 기뻐하자! 나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자.’ 
그리고 11절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다윗을 정말 억울했지만 그 대적자들을 온유함으로 대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에게 온유함으로 대한 예를 보십시오. 
삼상 24장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이 백성들로부터 인기를 얻어가는 것을 눈을 뜨고 볼 수 없어 그를 죽이려고 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창을 피해야하는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합니다. 
엔게디 동굴에서의 일입니다. 
다윗의 일행이 엔게디 동굴 속에 숨어있었습니다. 

사울왕이 동굴 속에 들어와서 저만치 겉옷을 벗어던져놓고 쭈그리고 앉아 용변을 보고 있습니다. 
이때 다윗의 부하들이 “기회는 이때입니다. 제거해버립시다.”라고 건의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부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가만히 사울왕의 겉옷자락만 표시로 베고 말지요! 
다윗은 사울왕을 온유함에 대했습니다. 
여러분, 결국 누가 이겼는지 아십니까? 

사울왕의 격정이 이긴 것이 아니라 다윗의 온유함이 이겼습니다. 
다윗은 ‘불평하지 말자, 나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자, 여호와 앞에 잠잠하게 참아 기다리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자.’고 했는데 그 온유함으로 이스라엘의 왕권을 차지하고,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온유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세력과 영향력은 확장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온유하길 축원합니다.

3) 신약성경에 와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가 온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약 1: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깨어지는 경우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회계하잖아요! 
이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깨어지는 경우입니다.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커지는 순간입니다. 
이런 태도를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의 말씀이 깨어지고 내가 살 경우입니다. 

사도행전을 몇 장 더 넘겨 7장에 가면, 스데반의 위대한 설교가 나옵니다. 
이 설교를 듣고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7:54)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찔리긴 찔리는데 이를 갈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깨어지고 내가 사는 경우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사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올 때, 고칠 것은 고치고, 버릴 것은 버리고, 깨질 것은 깨지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판단이, 경험이, 감정이 기준이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난도질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죽이지 마십시오. 

‘내가복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러면 불행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떠나고, 가슴에는 먼지만 풀썩 풀썩 일어납니다! 
죽은 말씀이 무슨 역사를 일으키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온유함으로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온유한 자가 받는 복에 대하여 간단히 생각해보겠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①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그의 권위가 높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지도력이 강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영향력이 확장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설교 중에 인용하셨던 모세를 보세요! 
온유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을 보세요! 온유한 사람이 왕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넬슨 만델라 대통령 아시지요? 
그분은 남아프리카 대통령을 지냈던 분으로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까지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수많은 정치적 박해를 받으면서도 ‘어디 한번 보자! 내가 잡으면 손 좀 봐 주겠다!’ 라는 말을 어느 때에도, 어느 자리에서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이지요.

②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것은, 에덴을 회복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죄로 말미암아 땅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에덴을 회복한다는 말씀입니다. 
가정에 온유한 자가 있으면 그 가정이 낙원으로 회복됩니다. 
공동체에 온유한 자가 있으면 그 공동체가 에덴으로 회복됩니다. 
교회에 온유한 자가 있으면 그 교회가 낙원으로 회복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그리스도인은 온유하게 살아야 합니다. 
감정, 본능을 조절하여 부드럽고 따뜻한 성품, 이런 온유함으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땅을 기업으로 받으리라는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