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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를 찬미하나이다 (삼하 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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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찬미하나이다 (삼하 6:20-23)


[다윗이 자기의 집안 식구들에게 복을 빌어주려고 궁전으로 돌아가니, 사울이 딸 미갈이 다윗을 맞으러 나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윗이 미갈에게 대답하였다. "그렇소. 내가 주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를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욱더 존경할 것이오." 이런 일 때문에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 하나님 납치 사건 

교우 여러분, 오늘은 날이 좀 푹 합니다만 연일 계속되는 추위를 어떻게 견디셨습니까? 양파는 겨울 한파에 매운맛이 들고, 고통은 어린아이도 철들게 한다지요? 어려운 시절을 지나면서 우리도 조금씩 깊어지고 있는지요? 왠지 요즘은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게 영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200만 마리가 넘는 가축들이 매몰되고, 오리와 닭도 300만 마리 이상이 땅에 묻혔다고 합니다. 이 묵시록적인 사건 앞에서도 사람들은 설 물가 걱정에 한숨을 내쉬고 있습니다. 

고기 수급이 어떻게 될까, 과일 값이 오를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사람살이의 실상인가요? 아프리카 대륙의 코티드부아르의 정치 상황이 복잡해지면서 주민들의 주 수입원인 코코아 농장이 문을 닫자 어린 노동자들의 생계가 막연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발렌타인 데이가 다가오는 데 초코릿 가격이 오를까 걱정합니다. 남의 죽을 사정이 내 배고픈 사정만 못하다는 말이 빈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성도들도 남의 고통에 무감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내심으로는 여전히 ‘나’의 아버지이기를 바라고, 내 아픔, 내 슬픔에 먼저 반응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신앙이란 내 욕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땅한 삶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무엇이 그릇된 신앙이고, 무엇이 참된 신앙인지를 가르쳐주는 한 가지 예입니다. 

사울 가문과의 힘겨운 싸움 끝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한 다윗은 여전히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울을 지지하던 북부 지파 사람들과 다윗을 지지하던 유다 지파 사람들은 정치적인 연합은 이루어냈지만, 마음의 통일은 이루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역 간의 갈등을 넘어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심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미 하나의 중심이 있었습니다. 야훼 신앙이 그것입니다. 종교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인 ‘religare’는 ‘함께 묶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나뉘었던 백성의 마음이 하나가 되리라는 판단이 서자 다윗은 즉시 행동을 개시합니다.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려는 것이었습니다. 묘수였습니다. 

다윗은 정병 삼만 명을 징집하여 그들을 이끌고 유다의 바알라로 올라갔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꺼내서 새 수레에 싣게 하고는, 아비나답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히요로 하여금 수레를 끌게 했습니다. 군인들은 그 행렬을 호위하고, 악사들은 각종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화려하고 장대한 행렬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궤가 떨어지려 하자 웃사는 깜짝 놀라 궤를 붙들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이 불길한 징조에 놀라 궤를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옮겨가게 했습니다.

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은 궤를 모시려는 다윗의 마음이 순수하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회통합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하려 했습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정병 삼만 명을 대동한 채 그는 하나님을 납치하려 했던 것입니다. 저는 성경의 이 대목에 ‘하나님 납치 미수사건’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 해도 하나님을 동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제 욕심 차리려는 게 뻔한 데 말끝마다 하나님의 뜻이니 은혜니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욕지기가 나옵니다.

• 모심

이 일로 다윗은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언제나 내 편이라 생각했던 하나님이 갑자기 낯선 존재로 변한 것 같았으니 말입니다. 석 달쯤 지난 어느 날 다윗은 하나님께서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내려 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비로소 문제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궤를 모시려는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음을 알았고, 하나님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강제할 수 없음도 알았습니다. 그는 이제 ‘기쁜 마음’으로 오벳에돔의 집을 향합니다. 

궤를 모신다는 행위에는 변함이 없지만 마음의 동기는 달라졌습니다. 호위 군사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윗은 주님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겼을 때에,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소와 살진 양을 제물로 잡아서 바쳤습니다. 이전에 위풍당당하던 다윗의 행보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여섯 걸음일까요? 7이라는 숫자가 완전수 곧 하나님의 수를 뜻한다면 6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나타내는 숫자일 겁니다. 그는 자기가 내딛는 걸음걸음이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제사를 바친 후에 다윗은 모시로 만든 에봇을 걸치고 주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습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예복인 데 다윗이 그걸 입는 게 합당한 일인지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윗이 춤을 춥니다. 적당히 의례적으로 추는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춥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왕의 권위를 벗어버렸습니다. 멋지게 위엄 있게 춤추는 것은 그의 관심이 아닙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깁니다. 자아와 체면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시는 마음이 어떤 것일까' 생각할 때마다 故 방현복 장로님이 생각납니다. 장로님 댁으로 심방을 가면 장로님은 아침 일찍부터 노구를 이끌고 계단 청소를 하신 후에, 집 밖에 나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집 안에 들어가면 무릎을 꿇고 앉아 환영의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정말 송구스러운 영접이었습니다. 그 정성스럽고 겸손한 영접에 저도 마음을 가다듬곤 했습니다. 목사가 심방하는 날은 교우 가정의 대청소일인 경우가 많습니다. 모신다는 생각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한 마음 없이 모심은 불가능합니다. 모시기 위해서는 스스로 낮아져야 합니다. 모심의 마음을 잃어버려 우리 삶이 팍팍합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 가야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순간순간 우리 속에 모셔야 할 분이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옮겨놓은 후에 주님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그러고는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 그곳에 모인 모든 백성들에게 빵 한 덩이와 고기 한 점, 건포도 과자 한 개씩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주님을 모신 날은 축제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궤 앞에서 힘차게 춤을 추는 왕을 보며 백성들의 마음도 열렸습니다. 그들은 주님 안에서 한 몸 공동체임을 재확인했습니다.

• 나는 주를 찬양할 수밖에 없소

다윗은 흔연한 마음으로 궁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안 식구들에게도 한껏 복을 빌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 미갈의 말은 다윗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20b)

미갈은 왕이 채신머리없이 처신함으로 왕가의 위엄이 손상되었다고 노골적으로 다윗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미갈의 마음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닙니다. 사울의 딸로 오랫동안 왕가에서 살아온 그에게 중요한 것은 궁중의 예절과 법도를 지키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윗의 처신은 시정배들에게나 어울릴 일이었습니다. 물론 미갈의 비판에는 다윗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깔려 있습니다. 지금 남편이 되기는 했지만 다윗은 아버지의 왕국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발디엘과 결혼하여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던 자기를 강제로 끌어내 생이별을 하게 한 다윗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미갈의 눈에는 다윗이 하는 일 하나하나가 곱게 보이질 않았을 겁니다.

미갈의 말 속에 담긴 칼날을 느꼈던지라 다윗의 대꾸도 부드럽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춤을 추게 된 것은 그대의 아버지와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자기를 뽑아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세워주셨기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마치 작정을 하고 아내에게 고통을 주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이 조금 만 더 여유롭게 상황을 살폈더라면 이렇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함부로 내뱉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의 말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할 차갑습니다. 성서 기자는 다윗에게 흠집이 날 수도 있는 이런 갈등 상황을 얼른 수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신실한 신앙인으로 포장합니다.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21c-22a)

상황을 배제하고 본다면 참 신실한 말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다’는 말 앞에서 저는 참 오래 머물렀습니다. 사람들이 무심히 내뱉는 말에 상처 입고, 들려오는 이런저런 소리들 때문에 속상해 하고, 때로는 냉소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것은 모두 낮아지기 싫어하는 제 마음이 빚어낸 풍경이었습니다. 공자는 의필고아(意必固我) 네 가지를 끊어버렸다(仲尼絶四)고 합니다. 의는 주관적인 억측이고, 필은 기필코 무엇을 이루기 위해 무리수를 쓰는 것이고, 고는 완고함이고, 아는 아집입니다. 공자가 말하는 의필고아를 끊는 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자기 부정’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다’. 이 마음 하나 얻지 못해 우리는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 

• 힘차게 사는 법

주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좋은 일이 또 있을까요? 하나님을 찬양하는 순간은 나를 잊는 시간입니다. 근심, 상처, 욕망, 미움, 경쟁심, 허영심 등 우리 생을 무겁게 만드는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생기를 모시는 시간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를 생각해보십시오. 복음을 전하다가 치안관 앞에 끌려간 그들은 옷을 찢어 벗기우고, 채찍질까지 당했습니다. 그 치욕감과 고통을 그들은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차꼬에 채워진 채 던져진 감옥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옥을 성전 삼아 하나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바쳤습니다. 그때 큰 지진이 나 터전이 흔들리면서 감옥 문이 열리고, 죄수의 수갑이며 차꼬가 다 풀렸습니다. ‘찬양’과 ‘지진’이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따지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누가가 이 일화를 전하면서 택한 두 단어가 제 눈길을 끕니다. ‘열리다’와 ‘풀리다’가 그것입니다. 누가는 기도와 찬양이 모든 닫힌 것을 여는 열쇠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일련의 소동 끝에 바울과 실라는 석방되었고, 간수와 그의 가족들까지도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의 든든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후4:8-10)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의 피로가 찾아오고,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지칠 때 나도 모르게 흥얼대는 찬양이 있습니다. “주를 찬미하나이다/주는 좋으신 분/주를 찬미하나이다/알렐루야”.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부르기도 하고, 길을 걸어가며 부를 때도 있습니다. 이 단순하고 소박한 찬양은 마치 부드러운 손처럼 영혼을 어루만져 줍니다. 반복하여 부르다보면 어느새 마음이 고요해지고, 내면에 새로운 힘이 고여 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는 좋으신 분’이라는 구절을 부를 때는 가슴이 저릿해집니다. 주님의 포근한 사랑이 나를 감싸고 있다고 느낄 때, 속상한 마음과 서운한 마음은 슬며시 스러집니다.

위험 사회의 징후가 도처에서 나타나고, 생명을 경시하는 문화에 대한 경종이 들려오고, 분쟁과 갈등의 소식이 끝도 없이 들려오는 세상에 사느라 우리는 지쳤습니다. 파도에 떠밀려 가며 조금씩 해안선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은 점점 가물거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조급한 마음도 들고, 절망적인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주님을 찬미할 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도왔는가?'가 아니라, '내 내면에 평화가 있는가?' 입니다. 느헤미야는 “주님 앞에서 기뻐하면 힘이 생기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을 모신 사람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 빛 더욱 영롱하듯이, 찬양과 기도로 마음을 밝힌 이들만 하나님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삶이 힘겹더라도 주님을 찬미하는 기쁨을 잃지 마십시오.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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