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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 겸손하라 (약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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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겸손하라 (약 4:1-10)


사람은 누구나 다 무언가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땅만 내려다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상황인데도 싱글벙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한숨에 찌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썰렁한 농담에도 아주 기꺼이 웃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젠 그런 말은 그만하라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천차만별인지 모르겠습니다. 올해는 유난히 더 춥다고 하며 움츠리고 있는데 사실은 평균을 내보니 작년보다는 덜 춥다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옷만 든든히 입으면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훨씬 얇은 옷을 입고도 너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있는 대로 다 끼어 입고도 여전히 춥다고 벌벌 떠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뚱뚱한 사람은 그래도 좀 추위를 덜 타지 않나 하지만 그것도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사나 하는데 동남아시아를 가보면 아 그래도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결국 다시금 깨닫는 것은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이 내 마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즉 족한 줄 여기라고 하지만 우리네 형편에서는 그러면 집은? 하고 들이대면 하긴 집이 없이 살기도 힘들잖아요. 하지만 그래도 우리네는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전세라는 제도가 있어서 참으로 좋습니다. 다른 나라는 다 사글세입니다. 우리네처럼 보증금 얼마에 월세 얼마 그렇게 해서 집을 얻지만 사실상 보증금이라는 것은 집을 나갈 때 거의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동안의 집의 관리 상태에 따라 일종의 징벌금 형태로 빠져나가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네는 계약 기간 동안 실컷 내 집처럼 사용하곤 맡겼던 돈을 도로 찾아가지고 나오니 외국인들은 마치 보물이라도 찾은 양 기뻐한다고 합니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해마다 전세값이 올라서 살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세가 왜 그렇게 오릅니까? 예전에는 집값이 오르다 보니 웬만하면 융자를 얻어서라도 집을 사려고 했는데 이제는 사실상 집값이 거의 오르지 않거나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굳이 집을 사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리고는 너도 나도 전세를 얻으려고 하다 보니 집값이나 전세값이나 거기서 거기인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자기 유익을 위해 집을 사기보다는 전세를 찾는데 그런 사람이 어디 나 한 사람뿐입니까? 세상에 나만 약은 것이 아니잖아요? 그럼 옛날처럼 한 방에 두세 명씩이라도 함께 사는 그런 형태로 주거 공간을 찾으면 되는데 그래도 눈들만 높아서 그건 또 아니랍니다. 또 이사를 하면 왜 모든 가구를 다 새로 사야 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가구란 말 그대로 필요한 집기나 옷가지를 넣어두는 기구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꼭 비싸고 좋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정리해보면 편하고 싶고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부터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것이 내 마음처럼 되는 것만도 아니기에 거기서부터 이런 저런 마음 아픈 일들이 생겨지게 됩니다. 그건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내가 하는 만큼만 해보라고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럼 언제나 흠이 없이 모든 사람이 칭찬할 만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느냐하면 그것만도 또 아닙니다. 

흔히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자식이 없는 사람은 자식이 없다는 것이 항상 마음에 부담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남의 집 자식으로 인해서 염려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 차라리 저러는 것보다는 자식 없는 것이 낫다고 하지만 뒤돌아서면 그래도 나도 자식 하나 있었으면 하는 것이 또 사람입니다. 그래서 2% 부족하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문제는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것을 채울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 가운데 다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몰랐습니다. 내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다는 것조차 생각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려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이 생각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물을 드리기에 앞서서 형제에게 가서 먼저 화목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형제와 화목하는 것이 우선순위에서 앞선다는 뜻입니다. 예물을 드리다가 생각이 났다고 하는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상대방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나 행동을 했다고 하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는 뜻도 됩니다. 나는 무심코 한 말이요 행동이지만 그것이 상대방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교훈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이 생각나게 해주시기까지 그 누구도 그런 말을 내게 해 주지도 않았고 나도 그러리라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결국 내 생각을 먼저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니라고 나는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 주는 것도 그것이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냐 아니면 내 입장에서 상대방이 이럴 것이라고 생각해서 하는 것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그래도 남을 먼저 생각해 주려고 하는 그 마음 자체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라는 말도 있듯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고자 할 때 그 마음만으로도 아름답고 흐뭇합니다. 한데 나는 위해주려고 하는데 상대방에서 그것을 오해하게 될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정말 상대방을 도와주려고 한 것인데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나를 뭐로 보고 저러나 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한 번 두 번 손을 내밀었다고 뿌리침을 당하게 되면 다음에 다시 손을 내민다고 하는 것이 보통 용기를 가지고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뭐라고 합니까? 

언제는 내가 싫다고 해도 손을 내밀더니 정작 내가 필요할 때는 모른 척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손바닥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잘한다 잘한다 하면 신이 나서 잘 합니다. 그런데 어디 사람이 항상 잘 할 수만 있습니까? 잘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한 번 더 손 내밀어 주는 것이야 말로 진정 하나됨의 비결입니다. 한데 우리네 마음이 그렇게 순수하느냐 하면 아니라고 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나는 마음을 다 비웠다고 하지만 마음을 비운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얘기가 아닙니다. 나는 다 내려놨다고 하지만 정말 그렇게 내려놔지던가요? 왜 그렇습니까? 내 안에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그래요 내 안에 싸우는 정욕이 있습니다. 그래서 싸우게 되고 다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툼은 조금 작은 티격태격 이라고 한다면 싸움은 본격적인 전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작은 말 다툼부터 시작해서 서로에게 큰 상처를 주는 싸움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일이 생기는 이유는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 말을 바꿔서 말하면 정욕은 우리로 하여금 싸우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욕심 때문입니다. 그럼 뭐가 욕심입니까? 내가 갖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것도 내 것이 아닌 것을 내가 갖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가지려고 하고 내가 받아야 하는 것보다 더 받고자 하는 마음이 정욕입니다. 요즘 연봉제로 월급을 받는 분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건 내 능력만큼 받는 것입니다. 그저 내가 근무한 연수만큼이 아닌 내 능력과 실적에 따라 올해 내가 받을 연봉은 얼마 이렇게 회사 측과 협의해서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나보다 먼저 들어왔냐 나중 들어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이야깃거리는 되지만 그보다는 그 사람이 그 일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적응을 하고 이익을 산출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느냐 생산성 제고에 얼마나 역할을 하느냐 등을 따집니다. 그런데 무턱대고 저 사람이 받는 것만큼 나도 받겠다고 한다고 해서 오케이 할 회사는 없습니다. 일하는 만큼 그리고 그 능률만큼 더 받고 덜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등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으면서도 더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그래 놓고 내가 저 사람만큼도 대접을 못 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그 사람은 일 잘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미움 받아야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사실 누구든 다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좀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는 남이 알아주는 것이 부담스러운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금으로 허락하신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키가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고 할 정도로 당당한 대장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제비 뽑아 왕으로 기름 부어 세우고자 할 때 짐 보따리 뒤에 숨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숫기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뜻도 됩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성령이 그 안에 충만할 때는 당당하게 블레셋 군대와 맞서서 싸우는 임금의 역할을 다했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할 때 그만 블레셋 장수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떠는 초라한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 아래서 올라설 때와 내려앉을 때를 구분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내가 효율적으로 성과를 냈다고 해도 “모든 영광은 다 주님이 받으십시오. 나는 무익한 종일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어여삐 보사 이 직임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래 저는 오직 받은바 은혜대로 충성하였을 뿐입니다. 주님 은혜 감사합니다.” 이래야 마땅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알아주시면 되는 거지 다른 사람이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그건 전혀 상관하지 않는 자세야말로 바른 청지기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대접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담스럽다고 말은 하지만 그래도 남이 세워주는 것을 은근히 즐기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무엇 좀 해 주시겠냐고 할 때 아니라고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내가 무얼 할 줄 안다고 그걸 하겠느냐 말을 합니다. 하지만 아 그러냐고 알았다고 하고 지나가 버리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괜히 씁쓸해집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냥 지나갈 건 뭐야 한 번쯤 더 권해 봐야 되는 것 아냐 그럽니다. 그럼 다음번엔 어떻습니까? 

또 다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서운하다는 말을 하지 말던가 속상하다고 하지를 말던가 해야 하는데 사람이 어디 그렇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그래도 말 한 마디라도 수고했다고 하면 은근히 기분이 좋지만 아무 말도 없으면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든단 말입니다. 그게 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유래된 욕심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라 그러면 죽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보았더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해서 홀랑 따 먹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도 하나님과 같은 대접을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 도다”고 했습니다. 욕심을 부리고 미워하고 시기하여도 내가 욕심내는 것을 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한 바울의 권면처럼 자기 분수를 알고 오직 내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대로 감사하며 찬송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은혜를 주십니까?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로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흔히 하는 말이 기도하면 된다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염려할 것 없다고 기도하자고 하지만 정작 기도하라고 하는 사람이나 문제가 있다고 하는 사람이나 한결같이 기도 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조금 숨을 쉴만하면 어떻게 합니까? 다시 편히 휴식입니다. 그저 등 따습고 배부르면 다가 아닙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조금 살만하게 되면 그게 복 받은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물질의 복도 복입니다. 하지만 그건 수많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복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성령의 열매들이 날마다 넘쳐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복을 누리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 사는 맛이 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다고 느끼신다면 기도하십시오. 

정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무엇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 지부터 깨닫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그래 하루를 살아도 참 사람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의 중심에 있지 않고서야 어찌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마음의 중심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주님이 내 삶의 중심이 되실 때 나는 더 이상 짐승의 자리 숲으로 도망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신 은혜대로 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시간 평강의 하나님이 내 마음에 계신지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묵상해 보십시오. 

둘째로는 구하기는 하는데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하는 잘못된 마음으로 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먼저 분별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주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내게 있어야할 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마음에 원하는 것만을 구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저 나밖에 모르고 내 가족 내 회사 내 교회 내가 소속된 곳만을 기도 대상으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결국 내가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구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살아갈까를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응답하심이 내 자랑거리가 되고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좀 더 희희낙락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결국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응답하시겠습니까? 누가 나에게 무얼 해 달라고 하는데 그걸 해 주면 내게 손해가 된다고 할 때 그걸 해 줄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눈물이 있습니다. 그 반면에 상급을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내게서 눈길을 돌리고 계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내 마음이 섭섭하면 섭섭할수록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더욱 축복하기를 힘쓰십시오. 

정말 마음으로부터 축복하십시오. 그러면 그 복을 나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게 됩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평강을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그 얼굴로 나를 향하십니다. 욕심은 나를 망가뜨리지만 서로 축복함은 이렇게 나를 세워나갑니다. 다투는 자에서 평강을 누리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 평강의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토록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심지어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내 안에 소원을 주시고 친히 내 입술을 붙잡아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이끌어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이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답답해하십니다. 얼마나 답답하시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성령님께서 답답하시도록 그냥 놓아두는 삶을 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의 탄식은 나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자 하는 마음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합니다. 그래서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도록 불러 주시고 우리 마음을 감동하여 믿음으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게 한 것으로 그치는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권세를 더하여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누구에게 주느냐 하면 겸손한 자에게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겸손입니까?
먼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데도 나는 너무 부족해서 못하겠다고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게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대로 나도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결국 겸손은 순종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철저히 내 안에 나를 버리십시오.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십시오.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하여 그 얼굴을 드시는 주님만 보십시오. 

내 생각대로 하게 하는 마음은 바로 마귀로부터 주어지는 마음입니다. 내 생각만 하게 하는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마귀와 모든 권세를 묶고 예수 이름으로 물리치십시오.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 살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모든 마귀의 권세와 계교는 예수 이름으로 묶임 받고 내게서 떠날지어다. 예수 이름으로 명한다 하나님께 복종치 못하게 만들려고 하는 악한 마귀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라가”고 명하십시오. 

그러면 악한 마귀는 나를 떠나고 천사가 시중들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마음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두 마음을 갖게 됩니까? 세상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미련들 두지 마십시오. 세상에 있는 것들에 매이지 마십시오. 모든 부귀영화와 명예와 권세들에 매이지 마십시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매이지 마십시오. 좀 덜 먹으면 어떻습니까? 좀 싸구려면 어떻습니까? 뭐 좋은 옷 입었다고 폼잡아봤자 아닙니까? 그런다고 누가 더 알아줍니까? 좋은 집 있다고 그래 봤자 세상을 떠날 때는 한 평의 땅도 과분한 것입니다. 한 세기만 지나도 다 잊힐 것들 때문에 더 이상 울고불고 할 것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 지혜 그까짓 것 좀 모르면 어떻습니까? 그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합당한 모습으로 우리를 가꾸어나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 때문에 울고 웃었던 우리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심장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철저히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다만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는 고백이 그래서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랑을 그치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고백하십시오. 나를 들어 하나님의 일꾼 삼으신 주님 앞에 감사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귀한 삶을 우리 모두가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의 장점을 이용하실 것입니다. 키 큰 사람을 키 작은 사람보다 운동선수로 사용하실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IQ가 높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점 때문에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고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 다윗을 대적해서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의 죽음도 결국 그의 잘 생긴 용모와 자랑스러운 긴 머리카락 때문이었습니다. 

삼손의 실패도 결국 그 힘 때문이었습니다. 겸손하게 여기지 않으면 장점만큼 큰 단점도 없습니다. 장점은 겸손할 때에만 장점이지, 때로는 엄청난 단점일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쳐 쓰는 즐거움을 아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히려 우리의 약점에 있습니다. 겸손한 병든 사람을 고쳐서 쓰십니다. 겸손한 지혜 없는 사람에게 지혜를 주셔서 사용하십니다. 겸손한 실패자를 재기시켜서 사용하십니다. 깨끗한 질그릇을 귀히 쓰임 받는 그릇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항상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심으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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