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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와 내 마음의 왕 (삿 21: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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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내 마음의 왕 (삿 21:13-25)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잘 아는 것 같아도 사실은 잘 모른다. 무모하게, 어리석게 행동하고 파괴적이고 망하는 일에 몰입하고 그것이 옳은 줄 안다. 사람은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 같으나 행동은 전혀 다르고 이상한 일을 벌인다. 사실 알고 보면 죄 때문이다. 죄를 짓는 사람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다. 악한 자에게 사로 잡힌 사람이 되었기에 마음과 생각이 혼돈되어서 그렇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다. 요8:44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라고 하였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거짓의 아비에게 속았기 때문이다. 사탄은 행복이 아닌데 행복인줄 알도록 속이기 때문에 사람은 속아서 더욱 죄를 짓고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보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전쟁을 치르고 사람을 죽인 후 어떻게 되었는가? 

1. 죄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뉘우치게 한다. (삿21:15)

저들은 일을 그르치고 나서 뉘우친다. 무엇을 뉘우쳤는가? 삿21:15을 보면 그것은 이스라엘 지파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된 연유 때문이다. 모든 지파가 다 일어나 베냐민과 전쟁을 했기에 후회의 결과가 온 것이다. 베냐민의 몰락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죄 때문이다. 전쟁의 시작이 어떻게 출발했는가? 죄 때문이다. 

이 슬픈 이야기는 베들레헴 첩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레위 사람의 첩에 대한 행음의 이유는 써 있지 않지만 행음한 이 여인은 남편을 떠나 친정집에 가 있었다. 첩을 데리러 간 남편 레위 사람은 처가에서 5일을 묵고 날이 저무는 시간에 기브아에 도착하여 한 노인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 성읍의 불량배들이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다. 성읍의 문화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외지에서 온 레위인을 끌어내라고 베냐민 사람들이 야단법석을 떤다. 집요하게 요구하는 그들에게 설득이 되지 않자 레위인은 자기 첩을 내어주는데 베냐민 사람은 그를 능욕하고 새벽 이명에 놓아준다. 그리고 이 여인은 남편이 머무는 노인의 집 문에 엎드러져 죽었다. 시체로 변해버린 첩을 나귀에 싣고 자기 집에 돌아간 레위인은 첩의 시체를 12마디로 동강을 내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낸다. 첩을 잃어버린 아픔에 극도로 분노한 레위인은 잔인한 사람이 되었다. 복수에 불타는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호소하게 되었다. 

죄는 죄를 부르고 죄는 한 가정에서부터 한 도시 성읍으로 퍼져가고 죄는 또 다시 12지파, 나라 전체로 퍼져 갔다. 이 사건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모두 다 나와 미스바에서 모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이스라엘은 거기서 이렇게 결의한다. 

삿20:8 “모든 백성이 일제히 일어나 이르되 우리가 한 사람도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지 말며 한 사람도 자기 집으로 들어가지 말고... 징계하게 하리라.”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한 저들을 처단하자. 이스라엘의 칼을 베는 보병은 40만 명이었고 베냐민 자손은 칼을 베는 자가 모두 2만 6천명이었다. 처음 전쟁은 베냐민이 1, 2차에 걸쳐 승리를 거뒀다. 약 4만 명의 손실을 본 이스라엘 족속은 벧엘에 이르러 금식하고 제물을 드리며 단을 쌓았다. 그리고 베냐민 자손에게 져 주는 전략을 통해 베냐민을 성읍에서 꾀어내었고 상대방의 전략에 속아 베냐민의 주력 부대가 전멸을 당했다. 칼을 베는 자가 2만 6천명인데 이날 2만 5천명이 죽었으니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확산된 전쟁은 베냐민 남자들의 씨를 말렸다. 

죄란 순식간에 확대된다. 한 사람의 행음죄, 그리고 불량배들의 집단 폭력, 아내를 잃은 레위인의 복수심과 시체 토막내기 선동, 민족의 전쟁 확대, 수많은 인명의 손실과 종족 중 지파의 소멸 위기. 이제 극에 달하게 된 싸움의 결말 앞에서 백성들은 뉘우치고 있다. 

죄는 이상하다. 멈추면 거기서부터 불행도 끝이 날 것인데 다 멸하고 다 망하고 손을 쓸 수 없는 사태에 치달아야 후회를 한다. 끝장이 나기 전에는 사람이 싸우려고, 죽이려고 태어난 것처럼 산다. 그리고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제서야 우리 동족의 지파가 소멸되게 되었다고 뉘우치게 되었다. 사람을 멸해놓고 나서 멸하게 되었다고 뉘우치는 모순! 그것이 죄가 하는 것이다. ①달라붙는 죄, ②퍼져 나가는 죄, ③생각을 어지럽히는 죄를 겨 같이 부서뜨려 날려보내라. 죄의 삯은 사망이다. 한 사람의 죄가 온통 죽이고 죽인 무서운 죄를 분별하라. 
 

2. 죄는 염려하게 한다. (삿21:16)

삿21:16 “회중의 장로들이 이르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까...” 지도자들은 염려하고 걱정한다. 

삿21:18을 보라.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자손을 퍼뜨릴려면 결혼을 시켜야 하는데 베냐민 남정내들에게 시집을 보낼 여인들이 없다. 그것은 베냐민 지파가 미워서 죽였고 베냐민 지파가 미워서 선민의 딸들을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서원했기 때문이다. 남자의 수도 적지만 그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가정을 꾸릴 짝도 부족한 것이다. 죄는 그 결과가 상식 그 이상이다. 아내로 내 딸들을 주지 않기로 맹세하고 베냐민 죽이기를 계속한 다음, 겨우 종족을 살려내기 위해서 종족 퍼뜨리길를 위해 염려, 걱정을 하는 모순을 보이는 것이다. 

죄는 항상 그렇다. 자기가 죽여 놓고 죽인 것을 후회하고 자기가 없애버리고 다시 있게 해야 될 것을 염려한다. 술 먹고 주사가 있는 사람이 집에 들어와서 가구들을 다 깨뜨린다. 그리고 이튿날 잠에서 깨어나면 그 깨뜨려 놓은 것을 후회한다. 술 때문에 그렇다고 사람들은 말할 때가 많지만 이 모든 것이 사탄이 심어놓은 죄 때문이다. 염려를 해도 다 지나가 버린 필요없는 염려, 신경을 써도 다 소용도 없는 염려를 만드는 것이 죄의 결과들이다.
  

3. 죄는 불법의 방법을 모색한다. (삿21:20~23)

삿21:21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였고 삿21:23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라고 기록한다. 

베냐민 지파를 회복시키려고 이스라엘 회중의 지도자들이 생각해낸 아이디어는 무도회에서 춤추는 여인들을 강탈하는 것이었다. 장로들의 방법은 죄의 방법, 불벌의 방법이었다. 성인 남녀가 결혼을 하므로 가정을 이루는 것은 소중하고 거룩한 의식이다. 

그러나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무도회에서 집단으로 사람을 훔치고 자신의 아내를 삼는 이 방법은 죄가 지시하는 방법이고 죄가 명령하는 방법이다. 죄는 목적만을 위하여 활동한다. 지파의 존속을 위하여 악한 방법이 허용되고 승인되는 불법은 또 다른 어두움의 씨앗을 잉태하게 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사사 시대의 그림은 혼돈과 무질서로 가득한가?
개인이나, 가정이나, 지파나, 전 국가가 살육과 미움, 보복으로 정의를 세운다고 자처하는가?

그 해답은 이것이다.
삿19: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이것이 무슨 뜻인가? 
삿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왕이 없으므로 사람의 삶이 모두 자기 좋은대로, 자기가 보는대로 행했다는 구체적인 명시이다.

왕은 무엇인가? 다스리고 통치하는 자다. 자신이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자신이 왕이다. 자신을 다스리는 왕이 없으니까 자기가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자신에게 자신이 왕이 되니까 죄가 만연하는 것이다. 

왕을 두어야 한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내 마음의 주, 내 마음의 왕, 나를 다스리는 왕을 마음의 보좌에 모시지 않으면 우리는 이 어두운 베냐민 지파의 살육 당함과 범죄의 삶을 반복하게 된다. 신앙 생활은 내가 좋은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다. 내가 주님을 인생의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것이다. 

가정에서 당신이 왕이 되면 행음하는 여자가 된다. 그러나 주님이 왕이 되면 죄는 활동할 수 없다.
가정에서 당신이 왕이 되면 복수와 미움의 삶을 꿈꾼다. 그러나 주님이 왕이 되면 용서와 사랑의 삶을 꿈꾼다.

우리가 사는 마을과 지역에서 당신이 왕이 되면 불량배의 무리가 되어 폭력, 방탕, 남을 괴롭힘에 앞장 선다. 그러나 주님이 왕이 되면 배려와 섬김의 향기를 만든다.

우리 민족도 당신 스스로 왕이 되면 생명 따위는 고려치 않는 전쟁의 나라가 된다. 그러나 주님이 왕이 되면 전쟁대신 상생의 평화가 이루어진다. 

내 마음에 모셔드린 주님이 나를 다스리시는 왕이 되게 하자. 교만의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종이 되고 신하가 되고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내 마음의 보좌에서 다스리게 하자. 

당신이 왕인가? 주님이 왕이신가? 당신이 어떠한 사람인가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의 가정에서 당신이 왕노릇하는가? 주님이 왕노릇하시는가? 과연 당신에게 왕이 누구냐가 가장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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