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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 (민 27:18-20, 벧전 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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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 (민 27:18-20, 벧전 4:12-14)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1889년에 발표되어 많은 영향을 미친 작품입니다. 학식과 자비심을 겸비한 지킬박사는 인간의 잠재적 선과 악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약품을 분리할 수 있다는 것에 착상하여 약을 복용하고 추악한 하이드로 변신합니다. 그는 점차 약이 없이도 변신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지킬박사는 원래의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살인하게 되고 경찰에 쫓기다가 마침내 자살이라는 극단적 길을 택합니다. 그는 유서로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고백합니다.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진짜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외적으로 보여지는 지킬박사가 아니라 내면에 숨겨진 하이드가 바로 그 자신입니다. 외면이란 내면이 드러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외면은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이 있습니다. 눈에 보인다는 것입니다. 내면 또한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면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실재로 인도합니다. 여러분의 내면에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내면에 영이 있습니가? 아니면 여러분의 내면에 육이 있습니가? 실제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내면에 있는 영이 나를 영의 사람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아니면 내면에 있는 나의 육이 나를 육의 사람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를 삼으실 때 가나 사람 나다나엘을 만났습니다. 그는 빌립이 예수님을 보러 가자고 했을 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라고 예수님을 만나기도 전에 제일 낮추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자마자 제일 높여 주십니다.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네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의 겉으로 드러난 것은 교만이며 선입견이며 독선입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간사함이 없는 순수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합니다. 내면에 쌓은 선이나 악은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영의 사람이 되고,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민수기 27:18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라고 합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영성입니다. 여호수아 안에 머물고 있는 영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리더십이 생긴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지파의 10사람과 함께 가나안 정탐을 갔습니다. 10 사람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는데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가나안족속들이 무서웠습니다. 아무리 봐도 자신들이 너무 작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긍정적이었을까요? 왜 가나안에 살고 있던 일곱 족속이 무섭지 않았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머리고 생각하는 인간적 판단이나 합리적 계산 보다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더 믿었습니다. 이것이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머물지 않고는 하나님의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란 ‘영(성령)이 그 안에 있는 자’를 말합니다. 옛 성경에는 ‘신에 감동된 자’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지혜나 통찰력이 탁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의 뜻에 온전히 순복하는 영적 지혜와 능력이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도우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일곱 집사를 세울 때에 그 자격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자”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자가 됩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가 존귀한 자가 됩니다. 
  
19절에는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라고 합니다. 모세가 가지고 있던 존귀를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여호수아에게 전수하는 장면입니다. 모세의 권위는 대단했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모세의 위치는 절대적이었습니다. 심지어 백성들은 모세를 하나님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세의 존귀를 여호수아에게 돌려주라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명령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여호수아에게 모세의 존귀, 모세의 권위, 모세의 영력만 있으면 백성들을 이끄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모세는 특별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는 존귀와 영광과 권세를 부여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의 종 모세”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종입니다. 이런 모세의 존귀를 이어받고 권위를 가진다면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고 리더십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존귀’란 말은 히브리어로 ‘호드’입니다. 이 말은 영광(glory) 혹은 아름다움(beauty)을 뜻하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합법적인 지도자로 인정하는데 필요한 신적 위엄과 권위를 의미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권위의 전수자요 선포자입니다. 아무리 봐도 여호수아의 권위는 모세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존귀를 여호수아에게 준다고 하십니다. 존귀란 말의 한글 사전적 의미는 ‘지위나 신분이 높고 귀하다’는 말입니다. 반대말은 비천하다 혹은 미천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시대가 끝나고 여호수아의 시대가 도래하자 여호수아의 지위와 신분을 높고 귀하게 하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의 제자인 엘리사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지자로서의 모든 권위를 전수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스승인 엘리야의 영감이 갑절이나 더하기를 바랐는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영감의 갑절을 엘리사에게 전수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엘리사가 엘리야를 대신하여 일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엘리야의 영감을 전수하신 것입니다.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란 말이 있습니다. 푸른색은 남색에서 나왔지만 남색보다 더 푸르다는 말인데 제자가 스승보다 낫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흔히 말하기를 스승만한 제자가 없다고 합니다. 형 만한 아우가 없다고 합니다. 모세와 감히 견줄 수 있는 여호수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존귀를 여호수아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모세의 존귀가 아니면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이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에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내 여호와라”고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주의 사람을 존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옛날 여호수아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도 존귀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존귀하게 하시는 은총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시편 49:20에는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존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가를 알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왜요? 그 안에 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를 알지 못합니다. 
  
구약성경의 ‘에스더서’는 유대주의가 가장 크게 흐르는 책입니다. 에스더는 바사의 아하수에로 시대에 포로민으로서 왕비가 되었습니다. 왕의 신하 가운데 하만이라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모든 대신 위에 가장 높은 신하라고 했습니다. 아마 옛날 우리나라의 영의정에 해당되는 지위를 가진 것 같습니다.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의 궁궐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빅단과 데레스가 왕을 살해하려는 모의를 하는 것을 듣고 에스더에게 고하여 죽였습니다. 모르드개는 궐문에 있으면서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 것을 하만은 괘심하게 생각하여 유대인을 말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일을 알고 모르드개는 통곡합니다. 왕이 잠이 오지 않아 궁중일기를 보다가 모르드개가 자신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미리 알고 자신을 지켜주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왕은 하만을 불러 ‘존귀하게 할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어봅니다. 하만은 왕이 자기에게 상을 내리시는 줄 알고 그런 사람에게는 왕복을 입히고, 왕을 말을 타게 하고, 왕관을 씌워 사람들에게 ‘왕이 존귀케 하는 사람라’고 외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왕은 하만에게 “네 말대로 모르드개를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만은 자기가 죽이려고 하던 모르드개를 왕의 말에 태우고 성을 돌면서 ‘왕이 존귀케 하는 사람이라’고 외쳤습니다. 
  
사람의 꾀로 존귀함을 받으려면 오히려 비난을 받습니다. 때로는 존귀가 아니라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찬 사람이 존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존귀를 받으려고 한 사람들, 특히 독재자들이 존귀가 아니라 죽임을 당하고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경은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노니”라고 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영을 그 안에 머무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우리 속에 영이 머무르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머무는 자가 존귀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결코 존귀한 자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자가 높고 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만은 욕과 다툼과 패망을 가지고 옵니다. 반면에 겸손은 지혜와 존귀와 높아짐을 가지고 옵니다. 세상의 영으로는 사람들이 교만하게 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으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잠언 1:23에는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돌이키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영이 우리 안에 있어 존귀하게 되는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에게 사람들이 복종합니다. 

20절에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머무는 사람에게 회중은 복종합니다.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는 말씀은 여호수아에게 신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로 위임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여호수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세가 가지고 있던 백성을 이끄는 지도력입니다. 모세에게 한 것처럼 여호수아에게 회중들이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장 여호수아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을 주시려고 합니다. 
  
성경은 한 결 같이 지도자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라’(출 22:28)고 합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롬 13:1)고 합니다.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라’(딛 3:1)고 합니다. 지도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복종할 수 있는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여호수아에게 복종하는 그 권위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복종하게 하라’는 말은 ‘슈메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듣다’, ‘주의하다’라는 뜻의 ‘솨마’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상대의 말을 어김없이 순복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말을 어기지 않고 순복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자에게 필요한 가장 소중한 것을 주십니다. 사람들이 여호수아에게 복종케 하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중국속담에는 ‘존경보다 더 나은 것은 순종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순종은 믿음에서 나오고, 순종은 존경을 낳습니다. 베드로전서 2:6-8을 보면 믿는다는 단어와 불순종하다라는 단어는 서로 반대의 뜻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곧 순종하지 않는 자입니다. 
  
후나이 유키오의 ‘셀프 매니지먼트’라는 책에 보면 ‘겉모습은 그럴 듯하지만 알고 보면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라 알고 보니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남이 보지 않는 서랍 속을 깨끗이 해 주자’고 합니다. 내면이 깨끗한 사람,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사람들은 복종합니다. 복종하는 것은 영적 권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내면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게 하는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따르는 리더는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따라주는 지도자입니다. 억지나 강압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따르게 하는 것이 좋은 리더입니다. 이런 리더는 하나님의 영이 머물 때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종은 자기 상전에서 복종하라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집을 떠나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던 하갈에게 여주인 사라의 수하에 다시 가서 복종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주인인 하나님께 복종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사람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이 복종합니다. 
  
우리에게는 희고 깨끗한 내면과 검고 더러운 외면이 있습니다. 제가 1년 2개월 정도 머리 염색을 했습니다.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느라고 했는데 다시 어머니를 설득하여 염색을 그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원래의 머리상태로 돌아가려니 시간이 걸립니다. 지금은 염색하지 않은지 4달이 되었지만 아직도 염색한 머리가 남아 있습니다. 처음 2달 정도는 어색하기도 하고, 머리도 예쁘지 않았습니다. 가장 빨리 검은 머리를 없애버리는 방법은 아예 삭발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전처럼 삭발할 수도 없습니다. 검은 머리를 없이하는 것은 아예 뿌리부터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회개란 아예 죄의 뿌리 잘라버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검은 머리를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은 속의 흰 머리가 밀고 올라오는 것입니다. 검은 머리카락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흰 머리카락이 빨리 밀고 올라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면의 중요성입니다. 내면의 힘이 중요합니다. 내면에 영이 있는 사람은 외적인 것을 극복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게 할 수 있습니다. 
  
내면의 흰 것 때문에 검은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검은 것에 복종하는 척하지만 아닙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결국은 흰 것에 복종하게 됩니다. 정직과 정의를 갖춘 검지 않은 내면에 존경과 복종을 표시하는 법입니다. 흰 사람, 깨끗한 사람은 마지막에는 존경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는 법입니다. 
  
베드로전서 4:14에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합니다. 요즘 한국 기독교는 만신창이입니다. 여기저기 터지는 소리가 납니다. 치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가 활개를 치며 비난하고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비웃지 못하게 우리가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존귀케 되어야 되고, 세상이 존경하고 복종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 

옛날 황해도 재령 동부교회에 정찬유 장로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자그마한 문방구를 경영하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십일조를 생활화하신 분입니다. 이 분은 어차피 잘못 살 바에야 십일조라도 하고 못살자고 하여 철저히 하였습니다. 알뜰하게 생활하고 돈을 모아 건축자재상을 하였는데 그 때 마침 건축 붐이 일어나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자신의 집을 새로 지으려고 생각하다 교회가 마음에 걸려 교회를 먼저 짓기로 하고 자신의 전 재산인 당시 돈으로 3만원을 봉헌하였습니다. 그 돈은 요즘 화폐가치로는 20억 원은 된다고 합니다. 교회 건축이 끝나고 교인들은 장로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찬유 장로 기념 예배당’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그 후로 그 교회에 안 나오셨습니다. 교인들이 놀라서 장로님을 찾아갔더니 “나는 지금까지 주님이 주인인 교회에 나갔는데 사람이 주인인 교회에는 나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였습니다. 교인들은 모여 다시 이름을 고치고 머릿돌에 있던 장로님의 이름을 지웠다고 합니다. 그 후로 교인들은 장로님을 보면 그를 존귀하게 여겼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봉헌을 많이 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계시므로 교인들이 절로 장로님께 고개가 숙여지고 그분의 영적 권위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44:3에는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나뿐만 아니라 나의 후손에게도 머물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다음세대와 함께 가는 교회로서 나뿐만 아니라 나의 후손에게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 대대로 존귀한 주의 사람이 되고, 사람들이 볼 때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그러한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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