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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를 기쁘시게 (엡 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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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기쁘시게 (엡 5:8-14) 


얼마 전 어느 신문에 세계 여러 나라의 행복지수를 조사하여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나라는 세계 최하위 수준이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구일 것 같으냐를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빌 게이츠가 일등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의 제일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은 돈이었습니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부자라는 말과 잘 산다는 말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50년 동안 경제가 250배나 성장한 나라로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은 세계의 신화 중에 하나입니다. 돈을 행복의 제일가는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나라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높은 경제성장을 그동안 하였다면 당연히 행복지수도 세계에서 제일 높아야 하는데, 행복지수는 세계에서 가장 낮습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사실이 무엇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기사를 읽는 순간 ‘철학의 빈곤’이라는 단어를 생각했고 많이 부끄럽고 너무 많이 창피하였습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에 대한 바른 이해가 부족한 나라라는 사실이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우리는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행복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에게서 행복을 빼앗아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행복을 이야기하고 생각할 때 어렸을 때 주일학교 설교시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대개 아시는 이야기 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의 식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과 지옥을 방문하였답니다. 먼저 지옥을 가게 되었는데 마침 식사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지옥의 사람들이 식사를 하러 나오는데 모습을 보니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말라있더랍니다. 그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은 지옥에는 식사 시간만 있고 식사는 없는가보다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식사가 들어오는데 아주 훌륭하고 어마, 어마한 식사가 들어오더랍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음식을 먹고도 저렇게 피골이 상접할 수 있을까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사용하는 수저를 보니 숟가락과 젓가락이 자기 키보다 큰 것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자기 입에 넣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모두들 애만 쓸 뿐 음식은 하나도 자기 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지옥을 지나 천국을 가게 되었는데 천국도 마침 식사 시간이었답니다. 천국의 사람들이 식사를 하러 나오는데 모두가 다 영양상태가 좋고 행복해 보였답니다. 식사가 들어오는데 지옥과 같이 진수성찬이었답니다.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은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천국의 수저는 지옥의 수저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천국의 수저도 지옥의 수저처럼 다 자기 키보다 큰 것들이었습니다. 

천국도 지옥과 똑 같이 수저가 저렇게 자기 키보다 큰 불편한 것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천국의 사람들은 저렇게 영양상태가 좋고 행복해 보이는가가 궁금하였습니다. 그러나 금방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자 천국의 사람들이 그 긴 수저를 음식을 떠서는 자기가 먹으려고 하지 않고 상대방을 먹여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상대방을 먹여주니 행복했고 상대방이 먹여주는 음식을 먹으니 마음껏 먹을 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것이 천국과 지옥의 차이였습니다. 50년 전 쯤 들었던 설교인데 그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를 준비하는데 그 이야기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오늘 설교의 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옥의 사람들은 남을 생각할 줄 몰랐습니다.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저들이 지옥에 오게 된 까닭은 죄 때문이었고, 죄의 원인은 욕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와 욕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지옥에 와서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고 있었으니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만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남을 생각할 모릅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남의 행복에 관심이 없습니다.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남이 행복하면 그것을 통하여 불행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나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남의 행복을 뺏고 가로막아야 자신의 행복기회가 높아지는 줄로 확신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웃고 살지만 속으로는 칼을 갈고 그 예리한 칼을 가지고 상대방을 찌르며 삽니다. 나도 남을 찌르고 남도 나를 찌르고 하는 그런 세상에서 그런 삶을 사니 행복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바른교회 아카데미에 열심히 참가하시는 신학대학의 교수 두 분이 중심이 되어 일본의 복지 생활 협동조합 운동을 살펴보고 스터디하는 여행이었습니다. 수요일에 출국하여 사실 어제 밤에 도착하였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된 아주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복지 생활 협동조합에서 하고 있는 일 중에 노인들에게 저녁식사 배달을 하는 사업이 있었습니다. 아주 가난한 노인들에게는 나라가 저들에게 이런 저런 복지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지의 사각지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가 있는데 가족도 없고 건강도 나빠진 노인들은 오히려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습니다.

복지 생활협동조합에서는 저들에게 돈을 받고 저녁식사를 배달하고 있었습니다. 한 끼 도시락 값이 우리나라 돈으로 12,000원 정도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제적인 차이를 고려하면 7-8천 원 정도되는 부담이었습니다.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노인들이라면 큰 부담이 되는 액수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락이 너무 훌륭했습니다. 도시락을 겨울에는 차지 않게, 여름에는 덥지 않게 그리고 내용물이 흐르지 않게 박스를 만들어 차로 집집마다 배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식사도 제공하지만 그 배달 서비스를 통하여 노인들의 건강상태나 생활상태를 체크하여 노인들을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공짜로 제공하는 서비스는 아니었지만 아무리 계산을 해도 그 받는 돈으로는 수지를 맟추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활 협동조합에서 식사를 만들고 그것을 배달하는 사람들에게 보수를 드리고는 있었지만 세상의 직장과 비교하면 적은 액수를 받고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완전한 봉사도 아니고 완전한 보수도 아닌 애매한 선을 기술적으로 잘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도 부족한 예산을 위하여 이런저런 작은 가게들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행복한 가게가 그러한 가게들을 모델로 하여 나왔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애매한 보수를 받고 일을 할 수 있느냐를 물었습니다. 두 가지 이유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조합원이 되어 그런 봉사를 함으로 자기도 늙었을 때 그와 같은 봉사를 받을수 있다는 것과 그와 같은 봉사를 하면서 느끼는 기쁨과 보람과 행복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습니다. 밝았고 활발했습니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느끼는 일본인들의 모습과 달랐습니다. 보통 일본인들은 자기감정을 남에게 잘 드러내지 않습니다. 감추어져 있고 절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제가 이제껏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과 느낌이 달랐습니다. 활기차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사람은 남을 돕고 섬길 때 행복해집니다. 남을 기쁘게 해야만 자기도 기뻐집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 인간을 처음부터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이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게 하였습니다.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죄의 뿌리는 욕심입니다. 이 욕심이 치명적입니다. 이 욕심이 우리를 이웃이 밭을 사면 배가 아파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을 돕고 섬기는 일을 본능적으로 가로막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의 행복과 기쁨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궁지로 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짓밟히고 궁지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상처받고 외로워지고 궁핍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250배나 부자가 되었으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할 줄 모르는 나라의 사람들이 되게 된 것입니다.

기장 측에 김정준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시편연구의 대가이시고 한신대 학장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젊으셔서 폐결핵에 걸리셨습니다. 상태가 아주 나빠지셔서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요양원에서 더 이상 치료가 어렵다고 판단한 분들만 입원해 있는 병동에 가시게 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는데 그냥 누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이 억울해서 자기 보다 더 상태가 나쁘고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물 시중도 해 드리고, 화장실 시중도 들어 드리는 것과 같은 사소한 것부터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외로운 환자들의 말 벗도 되어 드리고 위하여 기도도 해 드리고 하는 것과 봉사였겠지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김정준 목사님은 그곳에서 돌아가시지 않으시고 퇴원하시어 꽤 오랫동안 생존해 계시면서 교회와 교계와 학교를 위하여 일하시다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김 목사님도 병원이 더 이상의 치료를 포기한 환자였는데 어떻게 그 병동에서 살아나오실 수 있었을까요? 봉사가 운동이 되어 그 운동 때문에 건강이 회복된 것일까요? 물론 그런 면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것은 봉사가 주는 기쁨이 치명적인 병균까지 약하게 만들어 건강을 회복하게 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남을 돕고 섬기는 일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의료선교팀을 해마다 추석 휴가를 이용하여 베트남 의료선교를 가곤하였습니다. 재 작년인가 의료선교팀의 한 집사님이 청년 봉사자들이 많이 필요하여 청년 예배 때 청년들의 참가를 유도하기 위하여 광고를 하였습니다. 그 때 그 집사님이 한 광고의 멘트가 히트를 쳤습니다. 그 집사님은 청년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한 번만 와 보세요. 뽕 맞은 것 같습니다.’ 그 광고가 효과가 있어서 청년들이 많이 가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의료선교 활동은 전쟁 같습니다. 짧은 추석휴가 기간에 엄청난 의약품과 장비를 가지고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베트남 빈농이라는 곳을 갑니다. 오가는 시간을 빼면 이틀 정도 봉사를 할 수 있는데 수 천 명의 환자를 치료해야만 합니다. 돌아 올 때 쯤 되면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탈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쌩쌩합니다. 정말 뽕 맞은 사람들 같습니다. 소중한 시간과 만만치 않은 물질을 들여야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기다렸다가 가곤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만 먹겠다고 발버둥질 치다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피골이 상접한 삶을 사는 지옥의 사람들과 같이 살지 말고 남을 섬기고, 남을 먹이고, 남을 입히기 위하여 공부하고 돈을 벌고 뿐만 아니라 남을 보다 본격적으로 돕고 섬기기 위하여 남보다 조금 빨리 은퇴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돈과 시간 만으로가 아니라 평상시에도 말과 마음으로라도 어떻게하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어떻게 하면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실험해 보고 시험해 보며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요즘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가장 많이 설교하는 본문은 마태복음 20장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주시기 위하여 하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새벽부터 장터에 나갑니다. 장터에 나가서 일자리를 구하러 나온 사람만 보면 자기 포도원에 들여보내 일을 하게 합니다. 새벽, 오전 9시, 정도, 오후 세시 그리고 오후 다섯 시까지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도 온전한 하루 품삯을 줍니다.

저는 그 성경을 읽다가 그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 위하여 일꾼을 고용한 사람이 아니라 일꾼을 고용하여 품삯을 주고 싶어서 포도원을 경영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순간 저는 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기 위하여 그 포도원 주인 이야기를 꺼내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후 5시 장터에서 일자리를 얻은 사람 그것도 한 시간만 일했는데 하루 온전한 품삯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가난한 노동자는 그날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그 가난한 노동자의 행복이 바로 포도원 주인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는 그 행복을 주고 그 행복을 자신도 느끼기 위하여 포도원을 경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탄에게 속아 우리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 사탄의 속임수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본래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다른 사람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야만 자신도 기쁘고 행복해지는 그런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연구하고 실험하고 시험하는 그런 착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욕심을 위하여 살면 지금보다 또 다시 250배 부요해 진다고 하여도 우리는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기 위하여 공부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기 위하여 돈을 벌고, 그리고 하나님과 세상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 지식과 돈을 다 그리고 잘 쓸 줄 아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도 건강하고 행복한 천국의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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