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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2) (계 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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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2) (계 2:8-11)


지난 주일부터 우리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가 어떤 모습의 교회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를 통하여 살펴본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는 그 사랑이 넘쳐흐르는 공동체라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의 모델을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의 모습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들을 보면 마지막 부분에서 한결같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씀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은 복음서에 자주 나타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말씀하시는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것이요, 아울러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중요한 교훈으로 말씀을 하실 때 첨가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귀'는 신령한 귀로써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말씀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음에 있어서 신령한 귀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편견과 아집과 교만으로 우리들의 귀를 막아서는 안됩니다.  마음의 문을 걸어 잠궈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열려진 귀로 들어야 합니다.  겸손한 자세와 열린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순종함으로 들어야 합니다.  2000년 전에 기록된 그 시대의 그 말씀이 아니라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레마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이 엄숙한 말씀은 사도 요한이 기록하던 그 당시의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이 말씀은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을 개별적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칭찬과 책망과 권면과 축복의 말씀은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 각 사람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 앞에서 교회와 나 자신의 신앙의 현주소를 발견하고 신앙적으로나 생활면에 있어서 좀더 성숙되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자의 일생'이라는 책을 썼던 프랑스 작가 모파상(1850-1893)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방황하고 방탕하다가 퇴학을 당한 후에 신앙과 결별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예수가 주인된 인생이 아니라 내가 나의 주인된 인생을 살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 후에 그는 문학에 뜻을 두고 정진하여 10년만에 유명한 작가가 되고, 돈을 많이 벌기 시작합니다.  그는 지중해에 요트를 가지고 있었고, 노르망디에 대 저택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면, 파리에는 호화 아파트를 갖고 쉴새없이 아내를 바꾸고 애인을 바꾸면서 살았습니다.

비평가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고 군중들은 그를 흠모했습니다.  그의 은행에는 쓰고도 남는 여유분의 돈이 저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부터 안질병과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1892년 1월 1일 새해가 밝았지만 인생을 살아야 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자기가 사용하던 종이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서 자살을 기도합니다.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만 정신이 파탄 난 그는 정신 병동에서 몇 달 동안을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허공을 향해 절규하다가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칩니다.  그의 무덤 묘비명에는 그가 말년에 쉴새없이 독백했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그는 부자의 꿈을 이룬 것 같았지만 실상은 가장 처절하게 가난한 인생을 살았던 불쌍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1세기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인 서머나 교회라고 하는 한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시면서 "너희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난해 보이지만 너희들이야말로 정말 부요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모파상과 정 반대의 인생, 진정으로 부요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서머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성도들의 공동체가 바로 서머나 교회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먼저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여기에 보면 서머나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1세기 당시의 서머나 교회는 한 마디로 말하면 고난받는 교회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의 모습보다 더 위로가 되고, 더 용기를 주고, 더 소망을 주는 이미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고난 중에 최악의 고난, 최후의 고난은 죽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죽음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죽음을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 죽음을 이기신 분, 다시 부활하신 그분, 역사의 처음이요 마지막이 되시는 그분이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서머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시 자체가 부요합니다.  그곳은 돈이 많이 모이는 상업적인 항구 도시였습니다.  현재 서머나의 지명은 이즈밀(Izmir)이라고 불리는데 터키에서 이스탄불과 앙카라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이 도시의 옛날 지명이 서머나입니다.  이 도시는 과거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던 그 당시에도 에베소와 견줄 수 있는 소아시아의 2대 도시였습니다.  항구였고, 많은 돈이 밀려왔기 때문에 이 도시를 가리켜서 "아시아의 보석"이라고 불리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교회를 향해서 편지를 쓰시는 주님은 이 도시의 소망, 이 교회의 소망은 돈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소망은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변하지 않는 영원한 소망은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실 때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다고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것은 각 교회마다 칭찬과 책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칭찬을 듣기도 하고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서머나 교회는 책망이 전혀 없었던 교회였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책망을 전혀 받지 않았던 교회가 두 개의 교회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서머나 교회와 그리고 앞으로 살펴보게 될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순교자를 배출하고 있었던 이 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무슨 책망을 하시겠습니까?  다만 칭찬과 격려를 주실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우리 주님의 칭찬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본문 9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여기에 보면 중요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환난과 궁핍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희들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그들은 환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 때문에 극심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믿기 시작한 예수님 때문에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환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궁핍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궁핍은 오늘 우리가 이 시대에서 경험하는 어떤 상대적인 가난 정도가 아닙니다.  아주 처절한 가난입니다.  거의 굶주림과 벌거벗은 상태의 수준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 굶주림과 벌거벗은 상태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는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 굶주리고 헐벗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두 부부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나서는데 앞에 다이어트를 해서 아주 예쁘고 날씬한 아가씨를 보게 됩니다.  갑자기 남편의 눈이 돌아갑니다.  그 광경을 본 아내의 눈도 돌아갑니다.  그리고 아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 은혜를 받은 사람이 뭘 그런 걸 쳐다봐."
그랬더니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더라고 합니다.
"아니 여보, 성경에 주님이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돌아보라고 그러지 않았어."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서머나 교회를 향한 가난은 아주 처절한 가난입니다.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다."  사실은 네가 부요한 자다.  그리고 너의 환난과 궁핍을 내가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알아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 만물을 붙들어 섭리하시는 분, 우리 인생과 역사의 주인이 되신 그분이 내가 복음 때문에 받는 환난과 궁핍을 알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이 알아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 인생이 아무리 환난의 연속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경험하고 부딪히는 환난이 당할만한 가치가 있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내가 알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서 알아주신다면 넉넉히 견딜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원수 사탄이 우리를 아무리 배고프게 하고 힘들게 할지라도 우리 안에 하늘 나라의 만나가 있을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영혼이 그 만나로 배부를 수가 있다면, 우리의 속 사람이 하늘나라를 향한 영광의 찬양과 그분을 향한 놀라운 감격과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속이 가득 찰 수만 있다면 이런 찬양을 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가 바로 이와 같은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주님께서 아신다고 칭찬하십니다.  내가 너의 환난과 궁핍을 안다.  그러나 너는 실상 부요한 자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서머나 교회를 향한 주님의 권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해서 책망할 것은 없었지만 여전히 권면은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 앞에 다가오는 고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권면의 말씀을 본문 10절에서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본문 10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고난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그것은 그렇게 길지 않은 때에, 그러나 일정한 기간에 고난과 시련을 이 교회가 통과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죽도록 충성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역사적으로 이 교회는 이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통과하게 됩니다.  주님의 예언이 그대로 적중했습니다.  그러니까 주후 156년 2월 2일,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던 사도 요한의 제자 가운데 폴리캅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폴리캅은 이 서머나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체포를 당합니다.  이 도시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와 있었는데 이 유대인들이 폴리캅과 11명의 인근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이 로마 황제의 신상을 참배하지 않는다고 밀고함으로써 체포를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폴리캅의 인격과 그의 덕망을 흠모했던 그 지방의 총독은 이렇게 폴리캅을 회유했다고 합니다.
"그냥 형식적이지만 예수를 욕하시고 황제의 신상에 허리를 굽혀 절만 하시면 당장에 풀어 드리겠습니다."
그때 폴리캅은 이런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지난 86년 동안 내가 섬겨왔던 주님, 그분은 언제나 나를 자비와 인자로 대하셨오.  내가 어찌 그분을 모독할 수가 있단 말이오."

총독이 다시 "네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너를 야수의 밥이 되게 하겠다"라고 협박합니다.  그때 폴리캅은 침착하게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어서 그 맹수를 부르시지요."  총독은 "네가 맹수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너를 화형에 처하겠다.  여기에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불을 지를 것이다."  폴리캅은 다시 조용히 그를 향해서 이런 대답을 남깁니다.  "총독이여, 잠시 있다가 꺼질 이 불보다 장차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불길을 더 두려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는 화형을 당합니다.  이상하게 불길이 그의 몸을 당장에 태우지 못하자 거기에 있던 경비대원들에게 칼로 그를 찌르게 함으로서 그는 피를 흘리고 그 자리에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오늘날 서머나인 도시 이즈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폴리캅 기념 교회를 방문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교회당 벽에는 유명한 화가 레이몽 페레가 그린 폴리캅이 순교를 당하고 있는 모습을 붙여놓았습니다.  칼을 든 사람이 그를 찌르기 위해서 그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가만히 보면 그림의 한쪽 구석에는 손이 포승줄에 묶인 채로 고개를 숙인 채 폴리캅의 순교 장면을 지켜보며 자신의 순교 차례를 기다리는 한 사내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화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순교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반열 속에 화가는 자기 자신을 집어넣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교는 특별한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교는 누구에게도 올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순교는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성도라면 누구에게도 경험될 수 있는 사건임을 그리고자 한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달리 번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죽을 수 있을 정도로 충성하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다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순교를 자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루 하루 우리의 삶의 마당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의 양심과 정직을 지키며 순교적인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 권면이 서머나 교회에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서머나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이 서머나 교회를 통해서 오늘 우리들의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지기 위해서 붙잡아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영적인 부요를 추구하는 교회상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는 영적인 부요를 추구하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저와 여러분을 영적으로 부요하게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까?  1세기의 서머나 교회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교회와 성도 여러분들에게 던지는 교훈을 저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살려면 이 세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첫째는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폴리캅 감독처럼 어떤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는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길들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십니다.  나는 결코 그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나의 삶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이런 확실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들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마당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밝힌다면 당장에 손해가 올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사업상의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직장의 승진에서 내가 배제될 수도 있습니다.  나의 미래가 그것 때문에 불확실하고 불투명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이시고 그분은 나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저는 이런 그리스도인들, 이런 신앙고백을 붙잡고 있는 성도들로 충만한 교회가 영적으로 부요한 교회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이 확실한 성도들이 모인 교회가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라고 믿습니다.  아무리 많은 숫자의 성도들이 교회에 출입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우리들 가운데 예수를 주님이라고 분명히 고백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 없다면 그 교회는 결코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손해를 볼 각오도 없고, 희생할 의지도 없는 성도들만으로 채워져 있다고 한다면 그 교회는 결코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병든 교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교적인 신앙을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없이 무슨 순교를 할 수가 있습니까?
자신이 조금 불편한 것을 감당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 자신이 조금 손해보기를 꺼려하는 사람들, 그들이 무슨 순교를 말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상적인 친절과 상식을 지키며 이웃들을 돌아보고 연약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헌신에서부터 우리의 순교적인 신앙은 시작될 수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고백이 확실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영적인 부요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두 번째로 하나님의 백성된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1세기의 서머나 교회는 특별히 그 도시에서 유대인들에게서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당시 서머나 도시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선민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이 땅에서의 유일한 선민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보니까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나는 선택된 백성이다.  거기에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참된 영적 이스라엘이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을 듣고 유대인들이 찔림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도저히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그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의 명령을 불복종하고 황제의 신상에 참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라고 밀고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배경을 본문의 9절 하반부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그래서 박해를 받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임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이 핍박을 받고 박해를 받아도 그들이 궁지에 몰려도 어려움 속에 빠져도 아무도 그리스도인들의 선민의식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내 아버지요, 나는 그분의 자녀요 백성이라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부러워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1세기 서머나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자존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많은 물질을 가지고 산다고 할지라도 아직도 탐욕에 목말라한다면 이 사람은 여전히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진 것이 적어도 내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배부른 인생, 그리고 더 이상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이 부요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것이 바로 영적인 자존심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이런 자존심을 가지고 한 세상을 살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영적인 부요의 인생을 살려면 마지막으로 죽음 저 건너편을 바라보는 종말론적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받은 후에 1세기의 서머나 교회는 문자 그대로 고난을 잘 견디고 승리했습니다.  폴리캅 감독이 순교를 한 후에도 교회는 고난을 잘 견디고 계속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이 교회와 이 교회의 성도들이 약속된 소망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본문 10절을 다시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뭐라고 했습니까?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그들은 그 언약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11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서 둘째 사망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둘째 사망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죽는다는 것은 첫째 사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망 다음에 또 다른 사망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둘째 사망입니다.  우리가 죽은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견뎌야 하는 상태,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사망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습니다.  특별히 순교하면 죽습니다.  그러나 너희들에게는 둘째 사망의 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신실하게 산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없고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의 상급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죽음 이후에 이 하나님의 약속의 소망을 바라보는 믿음, 이것이 천국 신앙입니다.

이 천국에 대한 믿음이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다가오는 온갖 시련과 핍박을 극복하게 만드는 비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믿음을 바르게 산 사람들에게 보상과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는다면 이 세상의 시시한 것에 대해서 연연하고 그것 때문에 우리가 몸부림치고 그것 때문에 치사한 인생을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의 보물에 대해서 그렇게 목말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천국을 향한 종말 신앙의 회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천국 신앙을 갖고 나머지 인생을 살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순교자들이 순교한 것은 천국 신앙 때문입니다.  천국이 없다면 순교자들이 제일 불쌍할 것입니다.  저 영원한 천국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불쌍할 것입니다.  이 천국 신앙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당당하게 만들고, 이 세상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이 세상에서 거칠 것이 없게 하고, 이 세상에서 없고도 당당하게 살게 만드는 힘입니다.  영적 부요의 비밀이 바로 천국 신앙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 교회가 서머나 교회와 같은 건강하고 좋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교인이 만듭니다.  여러분들이 서머나 교회 성도들의 그 믿음을 가져 주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적인 의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어려운 일을 당할 줄 아는 교회와 성도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충성을 다 하는 교인들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시는 일이라면 그것이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최선을 다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사, 찬양대원, 셀리더, 집사, 권찰, 헌금과 안내, 주방봉사, 차량안내와 같은 모든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하여 하십시다.  그리고 모든 예배의 출석도 열심히 하십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언양영신교회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의 일에 조금만 더 열심을 내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욕심 내어 기도하십시다.  그러면 우리 교회도 얼마든지 서머나 교회와 같은 책망 없이 칭찬만 듣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교회가 서머나 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믿음의 귀가 열려지기를 축복합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교회는 영적인 부요를 추구할 줄 아는 성도들로 넘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다가 망해도 당당할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천국의 보상과 하나님의 인정 때문에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성도들이 넘치는 주님의 공동체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영적인 부요를 추구하는 인생을 살아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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